매일성경 묵상
돌아오기에 너무 가버린 유다, 그러나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렘 3:1-18]
 – 2023년 07월 11일
– 2023년 07월 11일 –
렘 3:1-18 돌아오기에 너무 가버린 유다, 그러나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예레미야는 이스라엘과 여호와의 관계를 부부관계로 비유하여 보여준다. 남편을 떠나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던 여인이 돌아온다면, 남편은 그 여인을 받아줄 수 있을까? 1-5절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행음한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다시 돌아오는 것을 비판한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은혜”를 빙자하여 우상과 행음하였다(6-9절). 여호와께서는 그러한 이스라엘의 행태를 거부하신다. 예레미야는 유다에 대하여 북이스라엘은 유다에 비하면 선한 자들이었다고 선언한다. 왜냐하면 유다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반면교사로 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의 고발이 서글프다….
 
 
 
1.유다의 음란_위선으로 포장된 경건, 불가능한 하나님과의 재결합(1-5절)
2장의 고발은 유다는 하나님과 우상을 함께 섬기는 혼합주의의 늪에 빠져 자신의 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3장은 그런 유다에게 구원의 여망이 남아 있을까?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좇는 유다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일이 가능할 것인가? 또, 혹시 유다가 돌아온들 하나님께서 받아 주실까?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한 답변이 이어진다.
 
1-5절은 두 가지 근거로 하나님과 유다의 화해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먼저 법적으로 불가능하다(1절). 신 24:1-4의 재혼 금지에 관한 규정은 이혼하고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던 여자는 처음 남편에게 돌아올 수 없다고 규정한다(신 24:4). 이에 근거하여 남편(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남자(우상)과 놀아난 유다를 다시 아내로 받아들이는 것은 신명기 율법에 위반되어 불가능하다고 전한다. 다음으로  유다의 일방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하나님 이해가 재결합을 불가능하게 한다. 유다가 이해하는 하나님은 돌아가기만 하면 언제나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이다(4-5절). 아무때나 찾아가도 쌍수를 들고 환영하실 하나님이라고 이해하기에 그들의 돌이킴은 진정성을 찾아볼 수 없다.
 
유다는 우상숭배와의 근본적인 단절 없이 가볍게 하나님께 돌아갔다가 다시 쉽게 하나님에게서 돌아섰다. “지금 너는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오랜 친구’라고 하면서, ‘하나님은 끝없이 화를 내시는 분이 아니다.  언제까지나 진노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면서, 온갖 악행을 마음껏 저질렀다.”(새번역_4-5절)
 
*1-5절의 고발은 하나님과 유다의 화해는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과연 그런가? 유다 쪽에서는 불가능하지만, 그렇다고 끝장은 아니다. 이어지는 단락들은 하나님의 결정으로 화해가 가능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2.유다의 반역, 그러나 하나님께서는…(6-18절)
유다의 반역을 고발하면서 백여 년 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한 북이스라엘의 종교적 타락을 되짚는다. 이스라엘은 “모든 높은 산에 오르며,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음란을 즐겼다(6절). 하나님께서는 배역한 이스라엘이 음란에 지치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하셨으나 그들은 끝까지 돌아오지 않고 제 길을 갔다(7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기다림을 음행을 저지르는 기회로 악용하였다. 더 이상의 기다림이 무의미해지자 하나님께서는 결정을 내리셨다. 이혼장을 들려주고 이스라엘을 내보내셨다(8절). 출애굽에서 시작된 결혼 관계가 파탄에 이르렀다. “이혼장”은 역사적으로 앗수르에 의한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신학적으로는 언약의 파기를 상징한다.
 
자매 유다는 누이 북이스라엘이 이혼당하는 전 과정을 빠짐없이 지켜 보았다(7절) 그런데 아무런 깨달음이 없었다. 북이스라엘처럼 유다도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고 우상을 찾아가 행음을 행하였다(8절). 남유다는 이런 행음을 오래전부터 가나안의 풍요제의에 빠져 살아왔기에 “가볍게” 여겼다. “돌과 나무”를 세우고 이것들과 더불어 행음하며 땅을 더럽혔다(9절). 남유다는 우상숭배의 가증한 짓을 가볍게 여겼기에, 하나님께 드리는 회개도 가벼웠다. 남유다는 “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거짓으로” 돌아올 뿐이었다(10절)
 
“그는 음행하는 것을 가벼운 일로 여겨, 그 땅을 더럽히고, 심지어 돌과 나무를 음란하게 섬겼다. 이런 온갖 음행을 하면서도, 배신한 자매  유다는, 건성으로 나에게 돌아온 척만 하고, 진심으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나 주의 말이다.”(새번역_9-10절) 진심이 담기지 않는 회개는 철저함도 따라오지 않았다. 언제든지 다시 우상을 찾아갈 수 있게 마음 한구석에 남겨두었다. 이런 상태로 우상에게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차라리 죄를 더할 뿐이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처절하게 외친다. “주님께서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비록 이스라엘이 나를 배신하였다고 하지만, 신실하지 못한 유다보다는 낫다.(새번역_11절)”
 
*두 가지 이유에서 북이스라엘이 남유다보다 낫다. 먼저 유다는 북이스라엘이라는 반면교사가 있었다. 북이스라엘의 비극적 운명에서 교훈을 삼고 우상숭배에서 벗어나야 했다. 다른 한 가지는 유다의 돌아옴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거짓으로 돌아왔기에 돌아오지 않은 북이스라엘보다 더 나쁜 것이다.
 
 
북이스라엘에게서 남유다와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더 의로움이 나타났기에” 구원의 기회가 북이스라엘에게 먼저 주어진다.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북을 향하여” 선포하라고 명령하신다(12절). 이미 100년전에 멸망 했지만 여전히 돌아오지 않은 북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용서의 말씀이 선포된다(12절).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어떤 책임도 묻지 않고 관계 회복을 시도하신다. 법적으로도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긍휼로는 가능하다.
 
*하나님의 긍휼이 공의의 진노를 스스로 누르시고 이스라엘게 구원의 기회를 마련해 주신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손을 내밀어 주셨기에 이스라엘은 “거짓”이 아니라 “진실하게, 진심으로” 돌아서기만 하면 된다. 자신이 지은 우상숭배의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고, 진실하게 그 음란에서 떠나야 한다. “다만, 너는 너의 죄를 깨달아라. 너는 너의 주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나서, 푸른 나무마다 찾아 다니며, 그 밑에서 다른 신들에게 너의 몸을  내맡겼으며, 나에게 순종하지 않았다. 너는 이것을 깨달아라. 나 주의 말이다.”(새번역_13절)
 
*하나님을 배반하고 이방 신들을 섬기며 그분의 음성을 듣지 않고 제 길을 간 잘못을 고백하고 과거의 죄로부터 떠나면 된다. 이렇게 새로운 시작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파탄을 가져온 과거의 악한 행태를 뿌리까지 뽑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된다.
 
 
북이스라엘에게 먼저 기회를 주셨다는 것은 남유다에게도 기회를 주시겠다는 의미다. 여호와께서 유다의 남편이므로 그들은 하나님께 돌아와야 한다(14절). “남편”으로 번역된 동사 “바알”은 “지배하다, 소유하다” 또는 “남편, 주인이 되다”를 의미한다. 고대인들의 사고는 아내는 남편의 소유였다. ‘바알’은 보통 명사로는 “주인”, “소유주”, “남편”을 뜻하고 고유명사로는 가나안의 풍요제의를 주관하는 “바알”을 가리킨다. “바알”의 이런 이중적인 의미가 이스라엘의 혼합주의에 일조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의 신 바알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남편, 주인, 보호자 되심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유다는 거짓 남편이자 주인인 바알을 떠나 참된 남편이자 주인되시는 하나님께 돌아와야 한다. 이혼장을 손에 쥐고 쫓겨난 북이스라엘에게는 여호와의 긍휼이, 거짓으로 돌아오다 징벌을 당한 유다에게는 “여호와의 남편과 주인되심”이 구원의 문을 열어준다.
 
 
여호와께서는 “내 마음에 합한 목자들”을 세워 시온으로 돌아온 자들을 다스리고 “지식과 명철”로 양육하게 하실 것이다(16절). 왕정 시대의 왕들은 세습적인 통치자들로 폭력적인 권력을 의지하여 백성들을 지배하다가 멸망에 떨어지게 하였다. 그러나 미래의 구원 공동체를 인도할 목자들은 “지식과 명철”로 백성을 돌본다. 지식과 명철은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분(9:24)”이심을 아는 것이다. 이와같은 여호와의 마음과 뜻에 합당하게 통치하기 때문에 양들은 안전하게 보호받게 된다.
 
소수의 사람들이 시온(예루살렘)으로 돌아오지만(14절), 여호와의 마음에 합한 목자들의 통치 아래에서 번성하게 된다(16절). 번성한 구원 공동체에는 “여호와의 언약궤”가 불필요해진다(16절). 예루살렘이 언약궤의 역할을 맡게 되기 때문이다. 성전의 지성소 안에 있던 하나님의 현존과 통치하심이 모든 민족이 볼 수 있도록 예루살렘의 넓은 공간으로 나온다.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보좌”가 되고 모든 백성이 그리로 모인다(17절).
 
여호와를 왕으로 인정하는 민족들은 “다시는 그들의 악한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지 않는다(17절). “그 때에” 유다와 이스라엘의 분열도 극복된다. “유다의 족속이 이스라엘 족속과 동행하여 북으로부터 나와서” 여호와께서 저희 조상들에게 상속재산으로 주신 가나안 따응로 함께 귀환한다(18절). 이는 역사적으로 주전 587년에 멸망하여 바벨론으로 끌려간 유다 백성이 주전 722-721년에 멸망하여 앗수르로 끌려간 북이스라엘의 백성(왕하 17:6, 23)과 함께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는 바벨론 포로귀환을 가리킨다.
 
 
 
나는?
-돌아오기에는 너무 멀리 가버렸다(1-5절). 유다는 그들 스스로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주께 돌아올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말도 안 된다. 돌아오려고 해도 돌아올 수 없는 때가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내가 죄악을 향해 너무 멀리 갔기 때문이다. 너무 뿌리 깊게 죄가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몸과 마음, 인격과 행실에 죄가 가득 차버렸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상태가 그랬다. 하나님께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그치게 하여 바알이 아니라 하나님서 창조주 이심을 분명하게 드러냈는데도 부끄러움을 잃은 창기의 낯을 한 이스라엘은 이제 깨닫지도 못하고 부끄러워할 줄도 몰랐다. 돌아오기에는 너무 멀리 가버렸다. 여전히 입술로는 하나을 나의 아버지, 보호자로 고백하지만 아버지로 신뢰하거나 공경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정성없는 종교적 경건이 몸에 익었으니 하나님께 진실하게 돌아오기에는 너무 멀리 가버린 것이다.
 
 
*유다 땅에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내리지 않았다(3절). 유다 백성의 음행으로 땅이 더럽혀졌기 때문이다(2절).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땅에서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한 백성을 그 땅에서 쫓아내셨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여 그 땅을 맡기실 때 “하나님의 소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출 19:6)”으로 그 땅에서 살아야 하는 전제가 있었음에도 이를 살아내지 못해 가나안 족속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도 거룩한 땅에서 추방하신다.
 
*북이스라엘에게 이혼장을 써주며 쫓아 내신 것을(주전 722년 멸망) 자매인 유다가 보았음에도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모르고 오히려 자기도 음행을 행하였다(8절). 이를 두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나를 배신하였다고 하지만, 신실하지 못한 유다보다 낫다(11절)”고 하실 정도로 유다가 이스라엘보가 완악해 졌다.
 
*북이스라엘의 패망을 보고 유다는 그 길을 따르지 않았어야 했다. 올바로 걸었어야 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닌가? 세상 역사든지, 교회의 역사든지 보고 배워야 한다. 적어도 패망으로 가는 길을 답습하면 안 된다. 실패를 통해 배우지 않으면 삶의 소망은 사라진다.
 
 
*북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을 보고도 남유다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당혹스럽게도 북이스라엘이 간 음행과 반역의 길을 똑같이 답습하였다. 오히려 더 심해졌다. 늘상 돌아오겠다고 말을 했으나 진심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진실하게 회개하지 않았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에게 남편으로서 “이혼장”을 써서 내보낸 것처럼, 이제 남유다 차례일 수 밖에 없다.
 
*죄는 알고도 선택하는 일이다. 돈이 일만악의 뿌리라는 말을 모르는 이는 없다. 그러나 너무도 잘 알고 있음에도 하나님 대신 맘몬을 선택하고 추앙하는 것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나…. 변명의 여지가 없다.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보고도 남유다가 그 길을 스스로 따라 갔으니 그들은 더 완악하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너무 멀리 가서 돌아오기 어려운 그들에게 또 기회를 주신다. 입술로 죄를 자복하고 행실로 우상숭배에서 돌아서라고 하신다.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라고 하신다. 바알을 버리고 참 남편되신 하나님에게 돌아오라고 요청하신다.
 
*그렇게 돌아오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목자들을 세워 지식과 명철로 양육하시겠다고 하신다. 언약궤가 아닌 예루살렘 전체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 구원의 공동체를 이루어 주시겠다고 하신다. 아론의 자손이 제사장이 아니라 돌아온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가 되어 전 세계 민족을 여호와의 통치에 온전히 순종하도록 이끄시겠다고 하신다.
 
*묵상중에 나에게 주신 감동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목자”로서 “지식과 명철”로 돌아온 백성들을 양육하는 것에 최선을 다해야 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올바른 지식으로 올바르게 양육해야 하는 막중한 사명을 다짐하게 된다.
 
 
 
*주님, 돌아오기에 너무 멀리 가버린 남유다도 또 기다리시는 긍휼 때문에 저도 구원 받았음을 믿습니다.
*주님,  주님 마음에 합한 목자로 서겠습니다. 지식과 명철로 저에게 맡겨주신 성도들을 양육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올바르게 아는 지식과 진심과 진실함으로 양육할 수 있도록 명철을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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