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심판선언, 북쪽에서 재앙이 몰려온다! [렘 4:5-18]
 – 2023년 07월 13일
– 2023년 07월 13일 –

파수꾼이 주민들에게 경고를 발하여 다가오는 위험을 대비시키는 것처럼 여호와께서 어떻게 하면 멸망 심판을 모면할 수 있는지를 이스라엘에 알려주신다. 이미 선언된 심판으로 인한 파국은 피할 길이 없지는 않다. “마음의 악”을 씻어버리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이스라엘이 회개한다면 구원의 가능성이 열린 듯 보였지만, 5절 이후에는 다시 북방에서 오는 대적을 경고한다(6절). 이는 이스라엘이 회개했음에도 하나님의 심판은 멈추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북방에서 온 대적들로 인해 예루살렘은 에워싸이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은 역사적으로 요시아 시대에 일어난 신흥 강국 바벨론이 주전 612년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함락하고 여세를 몰아 갈그미스 전투에서 애굽의 연합군을 격파하며 남 유다를 지나 애굽으로 진격한 사건을 가리킨다. 이때 요아스 왕이 전사한다.

 

 

 

  1. 북방에서 오는 재앙(5-8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예루살렘과 유다에게 전쟁의 위험을 경고하게 하신다. 예언을 전할 당시 이미 그의 처소를 떠난 대적은 “나라들을 멸하는 자”로 유다가 맞서 싸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7절). 굶주린 사자가 수풀에서 뛰쳐나와 먹이를 더치듯이 민족들을 멸망시키고 막강한 제국을 세운 자가 원정을 떠났기에 유다의 멸망은 확정적이다. 성읍들은 폐허가 되고 주민들은 사라질 것이다.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안전한 곳으로 도망하는 것뿐이다.

 

북방에서 몰려오는 재앙은 확정적이기에 조금도 지체할 여유가 없다. 서둘러 행동에 나서야 한다. 가능한 한 빨리 나팔을 불어 긴급상황을 알리고 요새화된 성으로 즉시 대피하도록 알려야 한다(5절). 골짜기로 둘러싸인 예루살렘이 그나마 유다에서 가장 안전하므로 높은 언덕 위에 깃발을 세워 피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6절).

 

그러나 상황이 매우 절망적이다. 하나님께서 이 침략을 결정하셨기 때문이다. 이 “재난과 큰 멸망”은 피할 길은 없다(6절). “여호와의 맹렬한 노”가 돌아서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을 피할 길은 없다(8절). 이들은 하나님께서 진노하심으로 불러온 적들이다. 이 절체절명의 위기에도 유다는 하나님께 부르짖거나 도움을 간구할 수 없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굵은 베를 두르고 애곡하는’ 것뿐이다. 자신의 죽음을 탄식하며 슬피 우는 것만 남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임박한 재앙을 바라보며 넋 놓고 있으라고 하지 않으신다. 예레미야에게 유다와 예루살렘에 나팔을 불어 재난과 큰 멸망 곧 하나님의 심판 전쟁이 임박했음을 알리라고 하고 유다 백성은 애곡하며 지체하지 말고 피하라고 하신다. *나팔을 불라는 것은 적어도 피할 기회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심판의 재앙이 몰려오지만 적어도 피할 기회를 한 번 더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늘 이렇다. 끊임없이 기회를 주셨으나 거절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기 위해 재앙이 몰려오도록 하시나, 마지막까지 피할 기회를 주시는 분이시다.

 

 

 

2.예레미야의 탄식(9-10절)

북방에서 재난과 큰 멸망을 가져오시는 하나님의 선언은 유다의 지도자들을 공황 상태로 빠져들게 한다. 왕과 지도자들은 낙심하고, 제사장들은 놀란다. 선지자들은 더욱 깜짝(소스라치게) 놀란다(9절). 특히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은 그들이 늘 평안을 외쳤기 때문이다. 정반대의 상황에 당황한다. 무엇보다 이 전쟁의 상황에 대한 신학적인 설명을 해주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은 이들이 선포해온 다윗 왕조의 영원성과 성전 신학의 붕괴와 다름없었기 때문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예레미야도 부정적으로 반응한다. “그 때에 내가 이렇게 아뢰었다. “아, 주 나의 하나님, 진실로 주님께서 이 백성과 예루살렘을 완전하게 속이셨습니다. ‘예루살렘은 안전하다’ 하셨으나, 이제는 칼이 목에 닿았습니다.”(새번역_10절)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유다 백성들을 속이셨다고 강변한다. 사자와 같이 나라들을 멸하는 자가 생명을 위협하는데도 예언자들을 통해 평안을 선포하게 하셨다고 항변한다.

 

*예레미야의 비난은 유다와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기로 결정하신 하나님께서 다른 예언자들로 평안을 선포하게 하여서 백성이 죄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멸망을 결정하신 여호와께서 멸망의 심판을 집행하시기 위해 백성들이 회개하지 못하도록 속이셨다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멸망이 하나님께도 책임이 있음을 강변한 것이다. 이것은 당시 평화를 선포하여 백성들이 추종하는 선지자들의 활동을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신 것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재앙과 큰 멸망의 상황에 부닥친 백성들이 안타깝고, 여호와의 통치하심을 인정하는 예레미야의 신앙고백이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며 계속적으로 말씀하시고 깨우시며 돌이키도록 경고하셨으나 그런데도 회개하지 않은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을 여호와를 향해 탄식하고 있는 것이다.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과 그의 통치 방식과 내용은 성경이 말하는 부분까지, 주님께서 계시해 주시고 깨닫게 해주시는 데까지만 알 수 있다. 진리의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는 수준을 넘어서는 것은 다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 영역이 바로 하나님의 신비이다. 이때 하나님의 섭리를 향한 신뢰를 굳건하게 행사하는 것이 곧 믿음이다.

 

 

3.그러나 재앙을 자초한 것은 백성들의 죄악(11-18절)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의 강변에도 바람의 표상을 사용하셔서 “백성들과 예루살렘의 심판”을 경고하신다. “뜨거운 바람이 광야에 있는 헐벗은 산에서 내 딸 백성에게 불어온다(11절).” 광야의 뜨거운 바람은 요단 동편 사막에서 불어오는 뜨겁고 건조한 바람을 가리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적당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이용하여 타작하였다. 타작한 곡식을 까불러 고를 때 바람이 적당하게 불어오면 알곡과 쭉정이를 나누는 데 도움이 되지만, “광야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동풍)”은 파괴적인 바람으로 키질하는 사람을 힘들게 할 뿐 아니라 알곡과 쭉정이를 모두 쓸어가 버린다. 유다와 예루살렘에 불어오는 바람은 광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동풍보다 훨씬 더 강한 여호와에게서 오는 치명적인 바람이다(12절).

 

광야의 동풍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여호와께서 보내신 강한 바람에 휩싸여 모두 날아갈 것이다. 이 바람은 유다가 막을 수 없는 중무장한 군대이다. “구름 같이” 많은 군대가 땅을 뒤덮고 진격한다(13절). 그 군대의 병거는 회오리바람처럼 무서운 소리를 내며 어지럽게 달리고, 말들은 독수리보다 날래게 달린다. 그 군대를 바라보며 “우리”는 두려워 몸을 떨며 멸망을 탄식할 뿐이다(13절).

 

 

적들의 공격은 이겨낼 수 없지만 그런데도 기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구원의 문은 닫히지 않았다. 예루살렘은 지금이라도 서둘러 그 마음에서 악을 깨끗이 씻어내고 더는 악한 생각을 마음에 품지 말아야 한다(14절). 뜨겁고 “강한 바람”을 불어오게 만드는 불순종과 우상숭배의 죄악을 떨쳐버려야 한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간절하고 긴급한 외침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유다 백성들과 예루살렘은 마음에서 “악한 생각”을 쫓아내지 않았기에 “재앙”이 임하고야 만다. 구름같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오고 회오리바람처럼, 독수리보다 빠르게 진격해 내려온다. 얼마나 빠른지 이스라엘의 최북단 “단”에서 출현 소식을 알렸지만 벌써 이스르엘 골짜기 남쪽의 에브라임 산지가 위협을 받는다(15절). 예루살렘 코앞까지 위기가 닥친 것이다. 북쪽에서 내려온 군대는 예루살렘 주변의 성읍들을 점령하며 포위해 온다. 사방에서 물샐틈없이 에워싼다(16-17절 상).

 

이렇게 된 원인은 “그 도성이 주님께 반역하였기 때문이다’ 한다. 나 주위 말이다.” 너의 모든 길과 행실이 너에게 이러한 재앙을 불러왔다. 바로 너의 죄악이 너에게 아픔을 주었고, 그 아픔이 너의 마음속에까지 파고들었다.”(새번역_18절)

 

“너의 모든 길과 행실”, “너의 죄악”이 초래한 파국적 재앙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거짓 평화를 외치는 선지자들을 내버려 두심으로 백성들을 속여 죄에서 돌이킬 기회를 주지 않으셨다고 항변했지만, 결국 파국의 원인은 백성들 자신의 죄악에 있다. 그들이 스스로 선택해서 걸어온 “길과 행위”가 초래한 파국이기에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을 떠넘길 수 없다. 심장까지 파고드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네 마음의 악을 씻어버리라는(14절) 권면을 거절하고 “네 악한 생각”을 마음에 품은(14절) 예루살렘이 성을 에워싼 재앙, 곧 “마음까지 파고드는 쓰라린 재앙”을(18절) 당하게 된 것이다.

 

 

 

나는?

-마음의 악을 씻어버리라는 권면은(14절) 구원과 직결된 것이었다. 여기서 마음은 악이 자리 잡은 곳이다. 예레미야는 2장 22절에서 이 마음에 있는 악함을 “물로 스스로 씻으라”고 했다. 물론 아무리 씻어도 “네 죄악이 내 앞에 그대로 있을 것이다”고 말했지만, 그런데도 본문에서 “다시” 씻어버리라”라고 요구한다. 또, 4장 4절에서 “마음의 가죽을 베라”고도 했다. 마음의 굳은 것을 제거하고 새 마음으로 거듭날 것을 요구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지속적으로 포기하지 않고 여호와께 회개해야 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마음의 악”을 씻지 않는다면(14절) “마음 가죽”에 할례를 행하지 않는다면(4:4) 재앙의 고통이 마음에까지 이를 것이라고 선언하며(18절) 여호와가 회개하라는 경고를 받아들이라고 요청한다.

 

 

*예레미야는 북방에서 몰려오는 재앙의 소식을 유다에게 알리고, 예루살렘에 선포하라, 이 땅 방방곡곡에 나팔을 불어서 알리라, 큰 소리로 외치라고 다급하게 선포한다. 심판이 확정되어 북방에서부터 구름같이 재앙이 몰려오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어서 모여서 견고한 성으로 들어가자!”(새번역_5절)고 소리치자고 한다. 예레미야의 절박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심판은 정해졌지만, 그 가운데서도 견고한 성읍에라도 모두가 들어가자고 외치는 그의 마음에 간절함이 역력하다.

 

*이런 상황에서 나라를 책임져야 할 왕과 지도자들은 넋이 나가버린다. 백성들의 영적인 타락에 둔감했던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그제야 깜짝(소스라치게) 놀라게 된다. 이와 같은 기가 막힐 상황(날)이 오기 전에 나 자신과 공동체의 영적인 상태를 세밀하게 돌아보아야 하겠다.

 

*북쪽에서부터 몰려오는 재앙의 소식은 소식을 전하는 전령보다도 더 빠르게 몰려 내려온다. 단에서 목격한 군대는 이미 에브라임 산에 나타났고, 그 소식이 퍼지기도 전에 유다의 성읍들이 함락되기 시작할 것이다(16절). 하나님의 심판은 지체함 없이 맹렬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이렇듯 계속 돌이키라는 하나님의 요청이 반복되고 있음에도 혹시 요지부동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미 하나님 심판의 소식이 눈앞까지 와있음에도 마음은 외면하고 있지 않은가?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운 심판 선언의 책임은 특히, 지도자들의 잘못이 크다. 특히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도록 지식과 명철을 따라 백성들을 가르치고 양육해야 할 제사장들이나 선지자들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알리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경고하는 예레미야의 말을 콧등으로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들은 다윗 언약의 영원함과 성전이 자리를 잡고 있는 예루살렘은 멸망할 리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다윗 언약과 성전 제사조차 온전하게 순종하지 않고 불순종하는 백성에게는 평화를 누릴 자격은 이미 상실되었다. 불순종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여지없이 임하고 안이한 평화에 심취한 백성들은 이미 몰려온 끔찍한 재앙에 몸서리치게 될 것이다.

 

*더 이상 늦기 전에 돌아서야 한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분노한다. 그는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했다. 그러나 다수의 선지자들은 백성들의 죄를 눈감아 주고 “평강하다, 평강하다(6:14)”라고 예언했다. 이 기간은 의외로 상당 기간 지속되었다. 그러니 백성들은 다수의 선지자들의 말을 신뢰하여 평화 예언을 참으로 받아들이고 예레미야의 심판 예언은 거짓으로 무시하였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자신이 전한 예언이 실현되기 전까지 철저하게 거짓으로 매도당한 이 시간을 “하나님께서 속이셨다”다고 표현한 것이다.

 

*지금 우리의 시대가 딱 이와 같지 않은가? 평화하다 평화하다는 다수의 외침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내는 것을 방해한다. 성도들은 죄와 벗하고 죄를 탐닉하는 삶을 하나님의 자녀다운 거룩한 삶과 함께 살아간다. 이를 분별하여 죄에서 구별되도록 외치는 말씀은 평안을 비는 말씀에 희석되기 마련이다. “하나님의 속임”의 시기에는 더욱 날이 선 영적 분별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을 다해 듣고 받아들이고 살아내야 한다. 그래야 산다.

 

*또 기억해야 할 것은 예레미야의 탄식에 섞인 하나님에 대한 한숨은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아니라 백성들을 향한 사랑 때문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좀처럼 변하지 않는 백성에 대한 애증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미혹되고서 미혹한 자에게 책임을 돌릴 수는 없다.

 

*예레미야처럼 백성들의 외면과 거부가 만연하더라도 끝까지 말씀을 말씀으로 선포하는 영적 분별력과 담대함이 내 안에 바로 채워져 있어야 하겠다. 뼈아픈 권면이라도 주저하지 않고 지혜롭게 전할 수 있는 담대함도 내 안에 필요하다.

 

 

 

*주님, 심판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 유구무언일 뿐입니다.

*주님, 지도자들의 무능과 놀람이 더 도드라지는 말씀입니다. 혹시 우리의 지도자들이 이런 꼴이 아닌가 싶어 더 소름이 끼칩니다. 이 나라와 민족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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