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탄식, 절망 속에서 미래를 찾다! [렘 4:19-31]
 – 2023년 07월 14일
– 2023년 07월 14일 –
하나님의 심판은 무시무시하다. 이 심판으로 고통당하는 백성과 이를 바라보며 공감하는 예레미야의 비통한 심정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폭력적인 재앙을 드러내는 재앙을 바라보며 예레미야가 울부짖는다. 유다를 덮치게 될 멸망 심판이 그를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고통스럽게 만든다. 어디 그뿐인가! 하나님께서도 탄식하신다. 악을 행하기에만 열심인 이스라엘의 어리석음과 미련함을 슬퍼하신다.
 
 
 
1.탄식 이중주(19-22절)
대적들이 예루살렘을 (환상 중에) 에워싸는 것을 본 예레미야가 격렬하게 반응한다. 대적들의 손에 넘겨질 수밖에 없는 유다의 참담한 운명이 예언자를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빠뜨린다. “아이고, 배야. 창자가 뒤틀려서 견딜 수 없구나. 아이고, 가슴이야. 심장이 몹시 뛰어서, 잠자코 있을 수가 없구나. 나팔 소리가 들려 오고, 전쟁의 함성이 들려 온다. (새번역_19절)” 표현하기도 버거운 영적, 육적인 고통이 고스란히 육체에 전달된다. “아이고 배야! 창자가 뒤틀려서…. 심장이 몹시 뛰어서” 견딜 수 없고, 잠자코 있을 수 없다고 소리 지른다. 머릿속에서는 싸움터에서 혼란스럽게 울려 퍼지는 나팔 소리와 함성이 귀에 쟁쟁하다!
 
*예레미야는 백성의 입장에서 예언의 성취를 앞서 보고 먼저 경험하였다. 언젠가 닥칠 전쟁과 재난의 현실에 심장이 타들어 가는 슬픔과 아픔을 토로하였다. 하나님의 계획을 몰랐거나, 자신은 멸망할 백성들과 상관없다는 식으로 분리했다면 느끼지 않았을 고통이었다. 그저 선언되어 실현될 고통스러운 심판을 지켜만 보아야 하기에 그의 마음은 타들어 가고, 입술에는 탄식만 흘러나왔다.
 
 
예레미야뿐인가?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백성은 참으로 어리석구나. 그들은 나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모두 어리석은 자식들이요, 전혀 깨달을 줄 모르는 자식들이다. 악한 일을 하는 데에는 슬기로우면서도, 좋은 일을 할 줄 모른다.” (새번역_22절) 어리석기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분을 모르기에 예언자를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한다.
 
그뿐인가? 지각이 없기 때문에 “네 마음의 악을 씻어버리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14절)”라는 권면을 이해조차 못 한다. 미련한 자들이기에 완강하게 고집을 부리며 자기 길과 행실을 따르며 재앙을 자초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임에도 악을 저지르는데 지혜롭고 선을 행하는 데는 아무것도 모른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탄식 속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곧 선을 행하는 삶을 사는 것”임을 보여준다. 이는 선을 행할 줄 모르는 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백성임을 자부해서도 주장해서도 안 된다는 의미이다.
 
 
 
2.혼돈의 땅(23-26절)
예루살렘이 에워싸이는 것을 보면서 창조 질서가 붕괴하여 혼돈과 공허, 하늘의 빛이 사라지고 없는 것을 보았다(23절). 창조 이후 흔들림 없었던 질서와 빛이 사라지고 생존에 큰 위협이 되는 혼돈과 어둠이 세상을 지배한다. 심지어 굳건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던 산들이 떨고 언덕들이 뒤흔들린다(24절). 흔들리는 세상 어디에도 사람이 살만한 안전한 곳은 없다. 땅에는 사람이 없고 하늘의 새도 모두 도망갔다(25절). 창조 질서가 파괴된 세상에서 인간의 삶은 지속될 수 없다. 좋은 땅이 메마른 땅으로 안전한 삶을 위해 지은 성읍이 모두 허물어진다(26절).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 질서를 파괴하는 불의와 불법과 폭력을 징벌하는 “맹렬한 심판”이 이스라엘에 이루어질 것이다.
 
 
 
3.확정된 심판(27-31절)
이렇게 확정된 심판은 “이 온 땅이 황폐할 것이나 내가 진멸하지는 아니할 것이다(27절)”라고 하셨다. 온 땅을 폐허로 만드시지만, 완전히 끝장내지는 않으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 의지는 단호하고 확정적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고 계획하셨으며 후회하지 아니하시고 돌이키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28절). 어떤 경우에도 유다(땅)를 심판하시려는 결정은 취소되거나 바뀌지 않는다. 피할 수 없는 심판으로 인해 땅은 통곡하고 하늘은 어두워진다(28절).
 
 
‘먼 땅에서 나라들을 멸하는 자가 유다와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오자 사람들은 공황 상태에 빠진다. ‘기병과 활 쏘는 자의 함성’에 유다 백성은 감히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하고 모든 성읍에서 주민들이 도망한다(29절). 성읍을 버리고 울창한 숲속이나 접근이 어려운 바위로 뒤덮인 산으로 피한다. 텅 빈 성읍들은 무자비한 적들의 수중에 들어간다. 유다의 성읍들이 이처럼 넘어가고 예루살렘의 함락이 멀지 않았다.
 
이렇게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예루살렘은 대적의 환심을 사서 위기를 넘겨보려고 한다. 여인이 애인을 꾀하기 위해 화려한 옷과 값비싼 금붙이로 치장하고 눈 화장을 하는 것처럼, 예루살렘도 대적들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시도한다(30절). 하지만 그들의 경멸 어린 시선만 받을 뿐이다. 이들이 노리는 것은 예루살렘의 미모가 아닌 생명이었다.
 
예루살렘의 절망적인 상황은 마치 첫아이를 낳느라고 온 힘을 소진한 여인의 형편과 같았다(31절). 이미 기운을 다했기에 대적들을 막을 엄두조차 없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도움을 구하지만,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이렇게 안타까운 상황 속에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이 파국적인 재앙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하나님을 버리고 택한 우상은 결국 유다와 예루살렘을 이렇게 내팽개칠 것이다.
 
 
 
나는?
-이스라엘의 패망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이 예레미야의 탄식과 고통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진다. 이스라엘이 고통스러워하고 탄식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께서 아파하신다. 하나님은 심판하시면서 죄의 대가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당연하고 통쾌한 마음으로 실행하지 않으신다. 자기 백성이 우상숭배에서 돌이키지 않아 공통당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편할 리 없다.
 
-예레미야의 탄식이 곧 하나님의 탄식이다. 그 탄식 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고 동시에 죄악의 대가가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는 결국 심판의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북이스라엘의 멸망 전철을 철저하게 답습한 유다도 패망하고 탈취당하며 파멸될 것이다. 불순종했던 시간이 길었던 만큼 심판의 전쟁은 더 참혹하고 오래일 것이다.
 
*우상숭배로 더럽혀진 그 땅을 정결하게 회복하는 데는 파멸되는 시간뿐 아니라 포로로 끌려간 오랜 시간만큼 지속되었다. 죄악의 기간만큼 고통의 대가는 길고 오래가며 그만큼 아픈 것이다. 죄악을 분별하여 빠지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예레미야의 탄식함이 곧 하나님의 탄식함임을 우리가 안다면 심판의 자리까지라도 함께 아파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은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죄의 삯을 짊어지고 가장 고통스러운 죽임을 당하시는 모습을 통해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 마땅히 받는 심판의 고통조차 외면하지 않으시고 함께 슬퍼하신다.
 
*주님 십자가의 고통과 눈물은 우리의 불순종과 불의한 죄악 때문이었다. 여호와를 온전히 의지하고 붙잡는 것만이 지금 우리가 붙잡아야 할 생명의 길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혼돈과 공허 속에서 무너져 갈 뿐이다(23-26절).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묘사하는 그림은 창조 이전의 혼돈과 공허라는 심각한 모습으로 표현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의 어리석음과 하나님을 부인하고 영화롭게 하지 않으며 혼합주의적인 신앙으로 채워진 삶의 결과이다.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혼돈과 공허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신실하시고, 진노 중에도 긍휼을 베푸신다. 이스라엘이 황폐하여질 것이지만 그러나 진멸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슬퍼하시겠지만 이미 작정하신 심판은 후회함 없이 돌이키지 않고 반드시 실행하신다.
 
*이방 나라를 도구 삼고 인생 채찍으로 삼아 이스라엘을 치시지만 진멸하시지는 않으신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이 돌아오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심판은 확정될 결정이며 바뀌거나 물리지 않는다. 결국 이렇게 이스라엘과 남유가 망했지만 남겨진 그들을 통해 다시 재건해 가신다.
 
*파국적인 상황에서도 미래를 위해 소망이 남겨진 것이다.
 
*하나님 심판의 의지가 얼마나 단호한지 보여주신다. 때로 후회함도 비치시고 심판의 결정을 잠시 돌이키실 때도 있었지만 남유다에 대한 심판은 확정된 것임을 분명하게 보이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 앞에 취해야 할 자세는 “여호와께 돌아오는 것” 밖에 없다.
 
 
*이렇게 확정된 심판은 어떤 수고와 노력으로도 피할 수 없다(29-31절). 심판의 전쟁이 시작되면 사람들은 급하게 산으로 바위틈으로 피하려고 하지만 결국 멸망한다. 어처구니없게도 여전히 정치적으로 해결해 보려고 하지만 소용없다. 대적들의 함성 소리와 더불어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하는 소리가 들릴 뿐이다. 도움을 요청하지만 어느 사람도 도울 수 없다.
 
*이스라엘은 본질을 여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전쟁이 진행되기 전이나, 전쟁의 와중에도 위기의 본질을 파악조차 못 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파멸과 심판의 재앙들 배후에 누가 있는지를 전혀 보지 못한다. 그러니 자신들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여 외교적으로 극복하려 하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누가 나의 삶의 주권자이냐의 싸움이다.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고 일상에서 하나님을 앙망하고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을 인정하고 사는 것이 곧 신앙이다. 그렇기에 지금 개인의 삶 뿐 아니라 나라의 정치 현안 속에서, 그리고 국제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 손길을 찾으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부지런히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살아내야 한다. 그래야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서 보호함을 받을 수 있다.
 
*미국이냐? 중국이냐? 일본이냐? 어리석기만 한 취사선택의 정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살피며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이 우리나라가 든든히 서 나갈 길이다.
 
*교회 지도자들은 정치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찾으려는 노력을 한순간도 내려놓으면 안 된다. 지금 일어나는 모든 사건 속에 계신 하나님의 뜻을 찾는 신학적인 노력을 게을리하면 안 된다. 이런 과정 없이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의 뜻이 보이는 것이 아니다.
 
*기록된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판단할 수밖에 없으므로, 우리 정치와 사회 속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과 의지가 무엇인지, 어떻게 말씀하시는 지를 탐구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리라.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이 현실이 되어버리는 시대 속에 살고 있지만, 낙심하지 않고 더욱더 주님만을 바라보리라. 고난에 무감각해진 한국 교회에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눈물로 주님 앞에 서야 함을 일깨워 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다.
 
*지금은 웃고 즐길 때가 아니라 탄식하고 슬퍼하며 통곡해야 할 때이다. 하나님의 탄식 하심이 오래되었는데도, 웃고 있는 교회라면 소망이 없다. 아…. 탄식하는교회의 모습을 회복하고 싶다.
 
 
 
*주님, 주님의 탄식이 저의 탄식이 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 오늘의 탄식과 절망이 결국 미래의 소망이 됨을 믿음으로 바라봅니다. 탄식 속에서 희망을 붙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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