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내가 어떻게 용서하여 줄 수 있겠느냐? [렘 5:1-9]
 – 2023년 07월 15일
– 2023년 07월 15일 –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안다는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배반한 죄로 심판을 받아 멸망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하고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자신을 모른다며 심판하신다. 이런 동상이몽이 어디에 있는가?
 
 
 
1.한 명의 의인이 없는 예루살렘(1-6절)
하나님의 진단이 충격적이다.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아, 예루살렘의 모든 거리를 두루 돌아다니며, 둘러보고 찾아보아라. 예루살렘의 모든 광장을 샅샅이 뒤져 보아라. 너희가 그곳에서, 바르게 일하고 진실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을 하나라도 찾는다면, 내가 이 도성을 용서하겠다.” (새번역_1절) 둘러보고 찾아보아도, 샅샅이 뒤져 보라고 촉구하시며 “바르고 진실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참담해하신다. 바르고 진실하게(정의와 진리) 살려고 추구하며 사는 사람을 한 명이라도 찾으면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용서하실 것이다. 여호와의 성전과 다윗 왕조가 있으며 여호와의 율법이 선포되는 예루살렘에 의인 단 한 명이 없는 기막힌 상황, 역설적인 상황에 직면한다. 심지어 예루살렘은 악함에 있어서 소돔을 압도한다(겔 16:47-48). 소돔에 의인 열 명이 없어 멸망했다면, 이제 단 한 명의 의인도 없는 예루살렘이 멸망을 피해 살아남을 가능성은 아예 없다.
 
의인이 단 한 명도 없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예루살렘 백성들에게 황당하게 들렸을 것이다. 예루살렘에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넘쳐났다.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는 자들도 마찬가지다. 고대 세계는 특정 신의 이름을 부르며 맹세하는 자는 그 신의 통치 아래 있음을 전제하는 행위였다. 오늘날의 신앙고백과 비슷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의인 한 명이 없다고 하신 것이다. 결국 이들은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두고 ” 맹세하지만 “바르고 진실하게 살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자들이었다. “정의”는 먼저 이웃들 사이에 행해져야 하는 것으로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약자를 돌보고 불법과 폭력을 멀리하는 삶을 가리킨다. “진리”는 “올곧음”이다. 거짓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하나님의 목소리에 순종하고 교훈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나타낸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예루살렘 거리와 광장을 찾아 살펴보았지만 낙담한다. 예루살렘 백성들의 영적 무능력과 완악함만 드러날 뿐이었다. 하나님의 선언대로 올곧게 사는 사람, 진실을 추구하는 자가 한 명도 없었다.
 
 
*한 명을 찾으시는 하나님이시지만, 한 명도 찾을 수 없는 이스라엘이었다. 하나님의 마음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에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아브라함에게는 소돔과 고모라에서 의인 열 명을 찾으라 하셨으나 예루살렘에서는 공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자 한 명만 있어도 용서하시겠다고 하셨다. 하지만 그 한 명이 없었다.
 
*여호와께서는 절박한 심정으로 두루 돌아다니며 둘러보고 찾되 샅샅이 뒤져 성실한 자를 만나기를 원하셨지만, 이스라엘은 거짓 맹세를 일삼고 징계하여도 수치와 아픔을 모른 채 돌같이 굳은 얼굴로 회개를 거절한 그들이다. 비천한 자들이나 지도자들이나 모두에게서 한 명의 의인을 찾았으나 실패한다(4-5절). 비천한 자들은 하나님의 법(토라)을 몰랐고 지도자들은 알고서도 하나님의 법이라는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어 버렸다.
 
“그러므로 사자가 숲속에서 뛰쳐나와서, 그들을 물어뜯을 것이다. 사막의 늑대가 그들을 찢어 죽일 것이다. 표범이 성읍마다 엿보고 있으니, 성 바깥으로 나오는 자마다 모두 찢겨 죽을 것이다. 그들의 죄가 아주 크고 하나님을 배반한 행위가 매우 크구나.” (새번역_6절)
 
 
 
2.내가 어찌 너를 용서하겠느냐! (7-9절)
하나님께서 직접 예루살렘과 우상숭배와 배은망덕과 파렴치함을 고발하신다. 그들은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두고” 거짓 맹세할 뿐 아니라(2절) 심지어 “신이 아닌 것들로” 맹세하기도 했다(7절). 혼합주의의 늪에 빠져 우상을 섬기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것이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을, 사적인 자리에서는 우상을 찾았다. 그러다가 환난이 닥치면 여호와께 구원을 간구했다(2:27). 이런 악행이 한계를 몰랐다. 하나님께서 주신 풍요로움으로 배가 부르자 그 은혜를 잊고 간음하였다.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어떻게 용서하여 줄 수가 있겠느냐? 너의 자식들이 나를 버리고 떠나서, 신도 아닌 것들을 두고 맹세하여 섬겼다. 내가 그들을 배불리 먹여 놓았더니, 그들은 창녀의 집으로 몰려가서, 모두가 음행하였다. 그들은 살지고 정욕이 왕성한 수말과 같이 되어서, 각기 이웃의 아내를 탐내어 울부짖는다.” (새번역_8-9절)
 
“창기의 집과 이웃의 아내”와 같은 표현을 미루어 보면 종교적 혼합주의의 간음은 주로 윤리적인 간음으로 자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바알제의에서 필수적인 종교적 간음에 빠진 이들이 일상에서 윤리적인 간음에 빠지기는 쉬웠다. 하나님께서는 단호하게 선언하신다.
 
“이런 일을 내가 벌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나 주의 말이다. 이런 백성에게 내가 보복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새번역_9절)
 
하나님께서 용서의 한계를 넘은 예루살렘과 유다의 종교적 윤리적 타락에 책임을 물어 보복을 결정하신다. 하나님의 보복은 악인들에 의해 훼손된 그분의 정의를 바로잡는 사법적인 행동이시다. 하나님의 정의는 의인에게는 구원으로 악인에게는 심판으로 구체화 된다.
 
이스라엘은 “그분의 길과 법”을 잊어버리고 “이런 나라”로 전락했다. 즉, 우상을 숭배하고 윤리적으로 타락한 이방 민족들과 다를 바 없이 변질하여 하나님의 보복 대상이 되어 버렸다.
 
 
 
나는?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용서하리라(1절) … 돌아오기 싫어하나이다(3절)… 내가 어찌 벌하지 않겠느냐(9절)? 왜 이스라엘이 심판받아야 하는지 의문을 던지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와 나눈 대화이다. 참담하다.
 
-이스라엘의 상태는 여호와께서 직접 “의인 한 명”이 없어 진멸 당하게 될 것을 선언할 정도였다. 그들의 입에서 여호와라는 이름이 떠나지 않지만 사실상 그들은 거짓 맹세만 남발하며 하나님께 이미 삶에서 돌아섰다. 하나님께서 모르실 리 없었다. 오죽하면, 예루살렘의 넓은 거리를 샅샅이 뒤져도 진리를 구하는 자를 단 하나도 못 찾을 것이라고 단언하셨다.
 
*지금 우리 교회에서는 어떨까?…… 이 시대에서는 과연 어떨까?.
 
*여호와의 눈이 찾을지라도 진리를 추구하는 자를 한 사람도 못 찾을 예루살렘이 지금 이 시대의 교회와 도시들과 다를 바 무엇일까? 우리는 당당하게 우리는 하나님을 찾고 찾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돌아서지 않았다고 담대하게 외칠 수 있을까?
 
 
*하나님에게서 돌아선 예루살렘에 의인 한 사람도 없다는 절망스러운 진단은 구체적으로 찾아보고 내린 것임을 보여주신다. 예레미야가 이렇게 고한다. “주님, 주님께서는 몸소 진실을 찾고 계셨습니다….” (새번역_3절 상)
 
*예레미야는 “이 백성들이 주님께서 그들을 때렸지만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그들을(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신 것임에도 교훈 받기를 거절”했고, 오히려 얼굴을 바윗돌보다도 더 굳게 하고 주님께 돌아오기를 거절한다고(새번역_3절) 토로했다.
 
 
*예레미야의 탄식을 들은 하나님께서도 역시 답답함을 토로하셨다. “나는 이러한 생각도 해보았다.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은 주님의 길도 모르고 하나님께서 주신 법도 모르니, 그처럼 어리석게 행동할 수밖에 없겠지. 이제 부유하고 유식한 사람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이야기해보자. 그들이야말로 주님의 길과 하나님께서 주신 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한결같이 고삐 풀린 망아지들이다. 멍에를 부러뜨리고, 결박한 끈을 끊어 버린 자들이다.” (새번역_4-5절)
 
*유구무언이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도 별반 다르지 않아서 더 비참하다. 잘못된 길을 돌이킬 줄 모르면 망한다. 일상에서 사소한 부분에서부터 잘못을 인정할 줄 알고 돌아서야 더 큰 멸망이 찾아오지 않는다. 수풀에서 뛰어나오는 심판의 사자를 만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눈 감지 않으신다. 돌아오지 않는 자를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다. 심판을 받고서도 마음을 돌이키지 않는데 심판도 없이 마냥 용서한다면 아예 자기 죄를 깨닫지도 못할 것이고 인정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것은 불의이다.
 
*하나님 아닌 것에(바알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하나님께서 필요를 채워 주셔서 부요하게 되었지만, 창기 짓에 삶이 얽매이고, 마음에도 없는 거짓 회개를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이들을 용서해 주시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불의이다.
 
*징계를 달게 받고 다시 돌아오기까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허무하게 허비되지 않도록 거짓 선지자들이 헛되게 외치는 거짓 평안과 안전에서 지체하지 말고 떠나야 한다.
 
*어느 것 하나 성한 곳이 없는 총체적 부패, 거짓에 대한 당연한 징벌은 하나님의 공의이다. 언약을 파기한 백성에게 당연히 행사하는 정당한 권리이다. 생명을 주신 분이 취할 권리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진실로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찾고 계신다. 온 나라가 그렇게 물들어 가도 예루살렘에만은 그렇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셨다. 오늘날도 마찬가지 아닌가! 세상이 악에 물들어 가도 교회만은 의로운 삶의 최후 보루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세상 속에서 정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자를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찾으신다.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찾으신다.
 
*”진리를 구하는 삶”은 곧 “여호와의 길과 하나님의 법”을 아는 것과 행하는 삶임을 강조하신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이런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징계의 채찍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린다. 하나님의 말씀에 아무런 반응도 요동도 없는 무감각한 상태가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지도자들이 더 악한 것은 이들은 여호와의 길과 법을 알고 있다고 했지만, 반역의 길로 행하였다. 급기야 여호와의 길과 법을 자신들을 옭아매는 멍에와 결박으로 치부하고 끊어 버리기까지 한다. 누구도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이유이다.
 
 
*세상보다 교회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살지 않는 모습이 이에 해당한다.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바르게 일하고 진실하게 살려는)” 삶이 세상에서 비웃음을 당하니 이를 외면하고 그들과 다를 바 없이, 오히려 더욱 악하게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여호와의 길과 법을 생명의 테두리가 아니라 멍에와 결박으로 여겨 끊어 버린 지도자들과 다를 바 없다.
 
*이러한 삶은 자연스레 윤리적인 타락으로 이어지는데 바알제의에 빠진 이들에게 윤리적인 삶은 헛된 구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거룩한 삶은 직접 가르쳐주신 제의 규정과 지침들로 분명하게 제시되었기에 여호와를 따르는 거룩한 백성의 삶은 이방 민족과 달라야 했다.
 
*하지만 바알제의의 음란함에 빠진 백성들에게 삶의 거룩함은 몸에 맞지 않는 옷과 같았다. 마침내 거북스럽고 거추장스러운 하나님의 길과 법을 벗어던지는 것은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언약은 은혜의 경계선이다. 이 경계선을 깨뜨리면 하나님의 평안과 안전이 아니라 심판과 멸망이 밀려 들어온다.
 
 
*한 사람….예루살렘 백성들은 말하는 것과 사는 것이 달랐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복음으로 살지 않고 맘몬과 음란과 쾌락으로 살아가니 주님의 길과 법을 잊어버리게 되었다. 주님의 길과 법을 잊어버리니 지도자를 보는 안목도 흐려졌다. 부유하고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평등을 거부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나라와 민족에게 “숲속의 사자와 사막의 늑대”를 보내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게 물으셨다.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어떻게 용서하여 줄 수 있겠느냐?…. ” (새번역_7절), “이런 백성에게 내가 보복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새번역_9절)
 
*주님의 질문이 한없이 부끄럽고 민망할 따름이다.
 
 
 
*주님, 한없이 민망합니다.
*주님, 주님의 질문에 예레미야처럼 저도 대답을 쉽게 못 하겠습니다. 다만 예측할 수 없는 주님의 자비만 바랄 뿐입니다.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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