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내가 벌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렘 5:20-31]
 – 2023년 07월 17일
– 2023년 07월 17일 –

심판은 확정되었다. 이제 예레미야의 역할은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는 것이다. 백성들의 우둔함을 고발하는 것도 뺴놓지 않는다. 그들은 눈이 있지만 장님 같으며 귀가 있지만 귀머거리 같다. 백성들의 상태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가? 그렇다 그것이 예언자의 사명이다.

 

인간을 압도하는 엄청난 힘을 가진 바다도 창조주께서 정해놓은 경계를 넘지 않는다. 하나님의 질서에 완전하게 복종한다. 그러나 야곱/유다는 자신의 창조주이시며 복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고 도리어 그분께 등을 돌린다.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의 타락은 정치 지도자와 종교 지도자가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하겠지만 백성의 책임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다. 처음에는 잘못 인도받았으나 나중에는 좋아서 따라갔다. 31절은 이와 같은 의롭지 못한 결탁을 유감없이 고발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거짓을 예언하는 예언자들과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는 제사장을 좋아했다. 그들은 백성이 듣기 원하는 말을 하나님 말씀으로 선포해주고, 백성은 자신들의 욕망을 신학적으로 충족시켜주는 자들을 지지하고 따랐다. 종교 지도자들은 백성의 영적 능력을 마비시켰다. 백성은 종교 지도자들의 부패와 무능력을 조장한다. 백성의 지지가 없었다면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이 계속해서 활개를 칠 수 없었을 것이다.

 

 

 

1.어리석고 지각이 없는 백성(20-25절)

하나님께서 자신을 경외하지 않는 “야곱 집”과 “유다”를 책망하신다. 이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은 이유는 예전의 북이스라엘과 다를 바 없었다. “어리석고 지각이 없으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이었다(21절). 겉은 멀쩡했지만, 영적으로는 기능을 상실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한 어리석은 백성들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도, 그분 앞에서 떨지도 않는다(22절). 심지어 사납게 날뛰는 바다도 하나님께서 경계로 정해 놓은 모래를 넘지 않고 준수하는데(22절 하), 유다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질서를 무시한다.

 

눈과 귀가 영적으로 고장 났기에 마음도 온전할 리 없다. 이들은 “배반하여 반역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어서 하나님께 등을 보이고 돌아서서 가버린다(23절). 하나님을 주로 인정하고 그의 인도를 따르는 길을 거절했다. 자기 계획과 결정에 집중했다.

 

자신들의 생존에 필수적인 자연 질서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의존하지도 않았다(24절). 하나님께서 때에 따라 비를 주시고 추수 기한을 정하신 분임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때 비가 내리지 않아도 가뭄과 흉년이 들어도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았다. 눈과 귀와 마음이 영적으로 마비된 유다는 자신들의 삶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이런 유다를 책망하신다.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로부터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25절). “이러한 일들, 좋은 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연 질서, 때를 따라 주시는 비를 가리킨다. 현재의 재앙이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아서 임한 것이다.

 

 

 

2.어느 것 하나도 온전하지 않은 불의와 불법(26-31절)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은 사회는 폭력과 속임수가 판을 치고 악인이 승승장구하는 사회였다. 정의와 공의는 사라지고 가난한 자가 부당하게 짓밟힌다. 악인들은 노골적으로 악을 행한다. 새 사냥꾼이 함정을 설치하고 새들이 빠지기를 기다리듯 덫을 놓고 숨어 기다리다 사람들을 잡았다(26절).

 

즉, 우연이나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악을 계획하고 이를 실행에 옮겨 이득을 탐했다. 이들에게 이웃은 사냥감에 불과했다. 사기를 쳐서 얻은 재물로 제집을 가득 채우고 더욱 번창하고 부자가 되었다(27절). 이렇게 부당한 수단으로 부자가 된 자들의 얼굴에는 기름기가 흐른다. 당시 유대 사회의 인식에 부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이기에 이들의 악행은 한계를 몰랐다.

 

*하나님의 길과 법을 안다는 자들이었으나, 정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또, 고아의 송사를 공정하게 하지 아니하고 빈민의 재판을 공정하게 판결하지 아니했다(28절). 자기 집을 채우는 것에 혈안이 된 이들은 사회적 약자들의 송사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 부유해 진다면 정의(법)을 무시하고 거짓을 서슴없이 따랐다.

 

*하나님께서 “내 백성”이라고 불렀던 유다는 정의를 왜곡하고 부패한 지도자들로 인해 하나님의 보복을 받아야 하는 “이 같은 나라”가 되고 말았다(29절).

 

*하나님의 법과 길을 모르는 백성은(4절)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21-24절), 하나님의 법과 길을 아는 지도자들은(5절) 하나님의 정의와 진리를 유린한다. 그야말로 총체적인 난국이다.

 

 

*이와 같은 유다의 상황을 한마디로 “무섭고 놀라운 일”이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요약한다(30절). “무섭고”라는 “황량하다, 황폐하다, 생명에서 잘리다”를 의미한다. 황량함과 폐허가 불러일으키는 두려움과 놀람과 같은 경악스러움을 가리킨다.

 

*더 충격적인 것은 사회와 정치의 영역뿐 아니라 하나님을 섬긴다는 종교 지도자들에게서도 이런 일이 자행된다는 점이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 (31절)

 

*하나님의 의지를 대변하는 선지자와 제사장들이 주도하고 백성들이 순응하며 벌어지는 끔찍한 일이라는 것이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고,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하나님의 집을 제멋대로 다스린다.

 

*더 큰 문제는 황당하게도 하나님 백성이 그런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예레미야와 같은 심판 예언자들을 싫어하고 죄와 용서와 구원을 값싸게 선포하는 그들을 더 좋아한 것이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은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이 한 패거리가 되어 “무섭고 놀라운 일”을 즐기므로 필연적으로 임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스라엘이 심판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분명했다. 그들은 “목이 곧았다.” (23절). 마목이 곧고 완고했기에 고집이 세지고 반역하는 백성이 되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버렸다. 또 악하게 재물을 모으고 그 행위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도 않았다(27절). 권력자는 속임수로 세도를 부리며 자기 잇속을 챙기기 위해 원하는 대로 악을 행하였다. 종교 지도자들도 거짓과 기만으로 백성들을 속이며 자기 잇속을 챙겼다. 더 큰 문제는 그런 거짓 선지자들의 거짓 예언을 좋아한 백성들이다.

 

-백성들은 바른 말씀에는 관심이 없었다. 자신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거짓 예언을 듣기 좋아했다. 그 결과 거짓 선지자들이 넘쳐났다(31절).

 

-바른 말씀을 전하는 심판 예언자는 그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기에 싫어했다. 반면 거짓 예언은 그들의 귀를 즐겁게 했기에 그들의 말과 다스림을 좋아했다. 이런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탄식이 참담하다. “마지막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새번역_31절 하)

 

 

*오늘 본문은 곱씹을수록 소름이 돋는다. 마치 이 시대를 보고 예언하는 것 같다. 자기 생각만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조차 자기 생각이나 마음과 다르면 외면하고 귀를 막는다.

 

*사람들의 양심은 이미 마비될 대로 되어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물에 탐닉한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재물만 모으면 된다는 식이다.

 

*또 고아와 소외받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법의 배려는 찾아볼 수 없다. 학벌, 사회적 지위에 따라 판결이 고무줄이 되버린지 오래다. 오죽하면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자조 섞인 한탄이 진리가 되버렸을까….

 

 

*교회라고 다를까? 더 참담하다. 봉사, 사역 잘하고 헌금 잘하면 복 받는다는 엉터리 기복 신앙이 마치 기독교 신앙의 본질인 것처럼 호도하는 교회와 목사가 얼마나 많은가! 진정한 복의 근원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왜곡시킨 지 오래되었다.

 

*그런데 더욱 슬픈 것은 성도들이 이런 거짓 메시지에 열광한다. 참담하다….이 모든 모습은 하나님의 심판 이유라는 것이 참담하다. “이런 일들을 내가 벌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나 주의 말이다. 이러한 백성에게 내가 보복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새번역_29절)

 

 

*어떻게 하면 좋을까? 참담한 시대 속에서 바른 말씀과 바른 신앙을 붙잡는 것이 얼마나 고된 여정일지 예레미야의 모습에서 깨달을 수 있다. 그렇더라도 이렇게 믿을 수 있을까?

 

 

*유다 백성들은 듣고 싶은 말만 말씀으로 들었다. 예레미야의 선포에 귀를 막고 거짓을 말하는 예언자와 권력을 위하여 일하는 제사장의 말에는 귀를 열었다. 이렇게 한 것은 한 마디로 “탐욕” 때문이었다.

 

*우상숭배와 음행뿐만 아니라 자기 욕망에 집중하여 하나님의 의를 배반한 것이다. 이를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지속적인 예레미야의 회개 외침도 철저하게 거부하였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확정하신 이유는 이들의 안일함과 탐욕을 추구하는 욕망을 심취한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회개 거부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분노가 유다에만 구한 된 것일까? 지금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이 사회와는 무관할까? “놀랍고 끔찍한 일들(30절)” 일상으로 벌어지고 있는 정치계와 종교계, 기득권 계층의 탐욕 때문에 그들을 위해 봉사하는 종교 지도자들, 권력의 악행과 전횡을 눈감아 주기 위해 저널리즘을 포기한 언론인과 지식인들이 버젓이 활개를 치는 이 사회를 하나님께서 가만두실까? 과연?

 

 

 

*주님, 참담합니다.

*주님, 지금 당장 보복하셔도 할 말 없습니다. 그런데도 용서해 달라고 외치고 싶습니다.

Leave a Comment

매일성경 묵상

스데반의 설교_모세 이야기 [행 7:17-36]

스데반은 출애굽의 이야기 가운데 중요한 대목을 요약하는 방식으로 모세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는 모세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바로 공주의 아들로 입양된 이야기로 시작하고, 청년 시절 애굽

자세히 보기 »
매일성경 묵상

2차 투옥과 하나님의 적극 개입 [행 5:12-26]

산헤드린 공회의 엄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은 솔로몬의 행각에 모이고 하나님은 사도들의 사역을 통해 지속적으로 표적과 기사를 일으키신다. 이에 시기로 가득한 사두개인들은 사도들을 다시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