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확정된 멸망, 그러나 네가(우리가) 구할 수 있는 사람은 구해야 한다. [렘 6:1-15]
 – 2023년 07월 18일
– 2023년 07월 18일 –
예루살렘을 벌하기로 하신 여호와의 결정에 따라 북방의 대적이 예루살렘을 목표로 원정을 떠났다. 유다 백성은 거침없이 진격하는 적의 공격을 피할 길이 없었고, 적들에게 예루살렘이 포위 당하기 전에 빨리 더 남쪽으로 피신해야 했다. 본문은 대적들이 이스라엘을 추수하듯이 쓸고 갈 것이라고 서술한다. 이들의 기세에 예루살렘도 안전한 곳이 될 수 없기에 서둘러 피신하라고 하지만 사실상 피할 곳은 없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을 정복하는 대적을 다양한 방식으로 비유한다. 본문에서 ‘목자’로 비유된 적의 왕은 양 때 곧 군대를 몰고 와서 예루살렘을 둘러쌀 것이다(3절). 또 여호와는 적들의 수장으로 이스라엘을 향한 공격을 진두 지휘하는 분으로 등장한다(4절). 예루살렘을 향한 심판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된 원인을 다시 반복하여 밝히는데, 예루살렘이 여호와께 돌이키지 않고 변하지 않았다는 것과(6-7절) 이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과(11-12절) 심판의 이유를(10, 13-15절) 들려준다.
 
 
 
1.북방에서 오는 적(1-5절)
침략이 예루살렘에까지 이르렀다. ‘재앙과 큰 파멸’이 오기 전에 서둘러 예루살렘을 떠나 남쪽으로 가야한다(1절 상). 드고아는 나팔을 불고, 벧학게렘은 깃발을 들어 피난민들이 안전하게 유다 산지로 피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1절 하). 예루살렘의 운명은 확정 됐고, 북방에서 민족들을 불러 파멸시키기로 결정 하셨기에 다른 선택이 없다(2절). 아름답고 우아한 시온은 멸절 당한다(3절). 적들은 목자들이 초지를 찾아 장막을 치고 양 때를 먹이는 것처럼 예루살렘을 함락 하기 위에  주변에 진을 칠 것이다(3절). 시온을 택하셨던 하나님은 이제 시온을 치려는 자들과 함께 하신다. 여호와께서 공격을 명령하시자 적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4-5절). 한 낮이라도 출정하여 예루살렘을 치고자 했지만  준비가 길어져서 저녁이 되었어도 중단하지 않는다. 한 낮의 무더위나 밤의 어둠이 이들에게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
 
*유다가 자랑하는 예루살렘의 파멸을 경고하신다. 아름 다운 도시였고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었지만 이제 적들로부터 공격을 당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을 버린 자들은 그 분께 무참하게 버림을 당할 것이다. 아무리 성전이 있는 곳이라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안전한 곳이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한 번” 하나님의 백성이면 영원히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공식을 깨뜨리고 계신다.
 
*이스라엘을 향해 싸우시는 하나님이시다. 잠시 피신한 성 예루살렘도 안전한 곳은 되지 못한다. 예레미야는 고향 베냐민 지파 사람들에게 남쪽의 드고아와 벧학게렘으로 도망하라고 한다. 이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안전할 것이라는 헛된 믿음에서 서둘러 도망하라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이 전쟁은 이제껏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신 하나님이 놀랍게도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향한 “거룩한 전쟁”을 이끄시고 있기 때문이다.
 
 
 
2.벌 받을 성(6-8절)
출정을 명령하신 여호와께서 성의 공격도 진두 지휘 하신다. 도착한 군대에게 공격용 축대를 쌓도록 명령하신다(6절 상). 이렇게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시는 이유를 다시 상기 시키신다. 예루살렘 성은 “오직 포학한 것”이 넘치고(6절 하), 샘에서 시원한 물이 흘러 나오듯 끊이지 않고 악이 흘러 나왔다(7절 상). 성 안에서 들리는 것은 “폭력과 탈취(폭력과 파괴)”의 소란스러운 소리였고, 보이는 것은 폭력과 파괴로 생긴 “질병과 살상”뿐이었다(7절 하).
 
심판 직전 예루살렘의 일상은 폭력으로 이웃을 억압하고 공동체를 파괴하며 서로 병들게 하고 상처를 입히는 것이었다. 아름답고 우아한 성 예루살렘은 포악과 폭력과 퐈괴가 지배하는 “벌 받을 성”이 되고 말았다. 멸망의 심판 이외에 달리 기대할 것은 없어졌다. 이제 적들에게 최후 공격 명령만 내리면 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예루살렘에게 최후의 기회를 한 번 더 주신다.
 
“예루살렘아, 이 고난을 경고로 받아들여라. 그렇지 않으면, 나의 마음이 너에게서 떠나갈 것이다. 그래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내가 너를 황무지로  만들고, 아무도 살 수 없는 땅이 되게 하겠다.”(새번역_8절) 더 이상의 기다림은 없다. 예루살렘이 이번에도 기회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여호와는 예루살렘을 버리고 떠나실 수 밖에 없다. 예루살렘을 인적이 없는 폐허로 만드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교훈을 받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기회를 주신다.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내신 것이다.
 
 
 
3.심판을 불러올 수 밖에 없는 백성의 완악함(9-15절)
예레미야의 선포를 비웃으며 거절했기에(9-10절) 여호와께서 ‘그들’을 보내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남김없이 거둬들이게 하신다(9절 상). 남은 자라는 표현을 통해 이미 한 차례 심판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즉, 이전의 심판에서 살아남은 자들마저 남김없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때조차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부탁하신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농부가 포도나무에서 포도송이를 다 따내듯이, 적군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샅샅이 뒤져서 끌어 갈 것이다. 그러니 예레미야야, 아직 시간이 있을 때에, 포도 따는 사람이 포도덩굴을 들추어보는 것처럼, 네가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새번역_9절). 마치 포도농부가 포도넝쿨을 들추며 살펴서 꼼꼼하게 포도송이를 따듯이 한 영혼이라도 이 말씀을 듣고 돌이킬 사람을 끝까지 찾으라고 당부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시나 끝까지 구원의 문을 닫지 않고 기다리신다.
 
그런데 예레미야의 답변은 매우 부정적이다. 사람들의 완악한 반응은 예레미야를 좌절 시킨다(10-11절). 그들의 귀는 할례 받지 못하여 아무리 선포하고 경고하여도 비웃기만 할 뿐이다. 평안하다는 예언에 길들어진 귀는 멸망과 심판의 선포를 들을 수 없었다. 이 모습은 예레미야를 좌절하고 분노하게 한다. “그들을 향하신 주님의 진노가 제 속에서도 부글부글 끓고 있어서, 제가 더 이상 주님의 진노를 품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 “(새번역_11절 상) 배역한 자들에게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예레미야의 마음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의 마음속에 가득찬 “여호와의 분노”를 남김없이 쏟아붓도록 허락하신다(11절 하). 완고하게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예레미야를 조롱하는 자들에게 멸망의 심판을 확정하신다.
 
이 심판은 누구도 피하지 못한다. 길거리에서 노는 아이들, 모여서 젊음을 즐기는 청년들, 남자나 여자, 나이 든 노인도 모두 사로잡혀간다(11절 하).북방에서 내려온 대적들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말갛게(알랄_가혹하게, 호되게, 학대하다)” 주울 것이다(9절 상). 심판은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광범위하게 모든 영역에서 이루어 진다. 사람들은 죽거나 포로로 잡혀가고, 삶의 터전이었던 집과 밭과 아내는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다(12절 하). 생존에 필요한 모든 소유가 상실된다.
 
이렇게 심판받을 수 밖에 없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또 다시 고발한다. 가장 작은 자부터 가장 큰 자까지 유다 백성은 모두 “탐욕”을 부린다(13절 상). 종교지도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예언자와 제사장이 거짓으로 백성들을 오도하고(13절 하), 이 때문에 백성들의 완악함이 가속화 되었다. 백성들의 죄악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평강이 없는데도 평강을 외쳤다(14절). 영적 지도자들의 무능과 부패가 이스라엘의 멸망을 재촉하였다. 심각한 것은 지도자들을 포함하여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이 “가증한 일”을 범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15절 상). 탐욕과 거짓된 삶에 대하여 어떤 죄책감도 없었다.
 
*부끄러움을 부끄러움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이스라엘에게, 무엇보다 이들의 영적 무감각에 책임이 있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확실한 심판이 선포된다(15절 하).
 
 
 
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싸우신다. 이스라엘의 보호자가 이스라엘의 심판자가 되셨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 어떤 곳도 안전한 곳이 되지 못했다. 철석같이 안전하다, 평안하다 믿었던 예루살렘이 철저하게 유린 당할 것이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지파 사람들에게 예루살렘 성이 아니라 남쪽 드고아와 벧학게렘으로 도망치라고 외친다.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은 안전할 것이라는 헛된 믿음에서 도망하라는 경고이다.
 
-범죄한 이스라엘을 치는 하나님의 군대는 지체함이 없다. 북방에서 내려오는 군사들은 뜨거운 대낮에도 멈추지 않고 캄캄한 밤중까지 일사불란하게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여호와의 전쟁을 수행한다. 아름답고 우아한 딸 시온은 질병과 살상과 포학만 가득한 악의 소굴이 되어 있었고 솟구치는 신선한 샘물처럼 늘 신선한 악을 생산해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거침없는 하나님의 심판이 선언 되었음에도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평안만 외쳤다. 더 엄밀하게 말하면 성 안에 가득한 죄악들을 직면하지 않았다. 그저 평안하다고만 외쳤다. 그렇기에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은 농부가 남김없이 포도를 수확하기 위해 넝쿨들을 들춰내는 것처럼 철저하게 이루어 질 것이다. 가장 작은 자부터, 가장 큰 자까지, 선지자부터 제사장까지 탐욕과 거짓에 취해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백성들의 마음에 가득찬 탐욕과 거짓은 예레미야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분노”를 듣지 못했다. 그것을 들을만한 귀가 되지 못했다. 여호와의 말씀은 우습게 여겨도 되는 것이었다. 청조하기를 아예 싫어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지도자들은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저 “괜찮다”고 거짓 위안만 주었다. 그들부터 백성들보다 더 역겨운 일을 하면서도 전혀 수치를 느끼지 않을 만큼 중병이 들었으니 의사 노릇을 제대로 할 리 없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회는 남아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심이다. 이제라도 훈계를 받아들이면 살겠지만, 끝내 듣지 않겠다면 황무지가 되게 하실 것이다. 혼돈이 질서를 삼킬 것이다. 여러 핑계와 변명을 그치고 하나님의 훈계 앞에 직면하여 서자. 그래야 살 수 있는 기회를 잡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가증함은 일상이었다는 것에 심각함이 있다. 하나님의 공동체였지만 예루살렘 도성 안에는 폭력과 폭압의 탄압이 자행 되었다. 경고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가볍게 무시하였다. 백성들은 탐욕을 따라 살고,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은 이를 제대로 교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거짓을 일삼았다.
 
*나라의 흥망성쇠는 원인이 반드시 있기 마련이고, 순식간에 일어나지 않는다. 반드시 돌이킬 기회가 주어지는데, 이를 가볍게 여기면 망할 수 밖에 없다.
 
 
*이 시대는 어떨까? 유구무언일 뿐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표상임에도 세상과 다를 바 없는 탐욕 집단이 되버린지 오래다. 이잇집단이 되버린 교회에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는 가볍게 무시된다. 수백억의 재정 비리에 관련된 장로가 자살을 한 교회, 그 일을 주도한 목사가 버젓이 세습을 하고, 이제는 교단 총회를 열겠다고 한다. 기가 찰 노릇이다. 그 교단에게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는 가볍게 무시되었다.
 
*성범죄와 재정비리로 얼룩진 목사와 교회는 차고도 넘친다. 목회자가 이 지경이니 교회가 건강할 리 없다. 무참하다. 교인들은 어떤가? 일상에서 세상의 가치와 다를 바 없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욕심을 채운다. 성도들이라고 떳떳할 수 없다. 총체적인 난국이다.
 
*답답한 마음 금할 길 없고, 그저 심판을 목전에 둔 예루살렘과 다를 바 없어 절망스럽다. 하지만 이 와중에 하나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신다. 예레미야에게 간절하게 부탁하신다. “네가 구할 수 있는 사람은 구해야 한다(새번역_9절 하)” 심판이 확정이 되었지만 아직 심판의 때가 완전히 오기 전에 구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해야 한다. 이것이 이 시대 교회의 분명한 사명이다.
 
*”아직 시간이 있다”, 얼마인지 모르지만 아직은 있다. 남아 있는 시간 동안 교회는 구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해야 한다. 아무리 예언을 해도 멸망을 돌이킬 수는 없다. 하지만 “구할 수 있는 사람은 구할 수 있다”
 
*하나님의 경고가 쉽게 무시되어지는 이 시대 그래도 희망은 있다. 어떤 교회라도 구할 수 있는 사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구하는 교회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구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소수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 말씀을 듣기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새번역_10절). 그러나 그 와중에도 말씀을 듣기를 좋아하는 소수가 있다. 반응하는 소수가 있다.
 
*우리 더온누리교회가 말씀 듣기를 좋아하는 교회, 그런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아침이다.
 
 
 
*주님,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감이 큰 시대입니다.
*주님, 그래도 말씀을 듣기 좋아하는 한 사람을 끝까지 찾으시는 마음을 받습니다. 우리가 그런 교회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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