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성전설교_들으라! 보라! [렘 7:1-15]
 – 2023년 07월 20일
– 2023년 07월 20일 –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성전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선포하라고 말씀하신다. 7장과 26장은 성전 설교로 일컬어지고 있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에게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약속하기는커녕, 예루살렘을 “여호와의 성전”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하여 “거짓말”이라고 선포하라고 명령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성전이라는 안전 의식을 깨뜨리신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 없이 드려지는 제사는 심판을 초래할 뿐이다. 성전 제사에 앞서 먼저 자신의 길과 행실을 바르게 해야 한다. 하나님은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희생제물로 원하신다.

 

본문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제의 종교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다. 성전을 찾아가 제사를 지내는 것이 신앙생활의 중심축이 되면서 성전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체했다. 성전을 찾는 것이 곧 하나님을 찾는 것이요,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곧 하나님을 경외함이었다. 출애굽의 구속사와 언약에 뿌리를 둔 이스라엘의 종교가 제물과 제사에만 관심을 두는 제의 종교로 변질하였다. 그 결과는 치명적이다. 불의한 자들이 성전을 찾아와 제사를 지내고 자신의 죄를 세탁한다. 제사 행위가 일종의 면죄부가 된 것이다. 예레미야는 성전 제사가 여호와 신앙의 핵심에 속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부차적인 성전 제사가 말씀에 대한 순종을 대체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여 삶으로 드리는 제사”이다.

 

 

 

1.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1-7절)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말씀을 선포하라고 하신다(2절). 성전과 관련된 메시지이다. 먼저 긍정적인 권면이 주어진다.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너희의 모든 생활과 행실을 고쳐라. 그러면 내가 이곳에서 너희와 함께 머물러 살겠다.” (새번역_3절) 그런데 5절에서도 ‘모든 생활과 행실을 고치라’고 반복한다. 그것도 “참으로” 고치라고 강조까지 한다. 4절은 마치 가장 중요하게 고쳐야 할 것을 전제하듯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라고 3회 반복하며 이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선포한다.

 

이렇게 강력하게 “여호와의 성전이라”라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하는 이유를 3절과 5절에서 반복하고 있는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는 명령을 순종하며 살지 않는 이상 성전 제의가 의미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른길과 생활”은 무엇일까? 5절은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는 것”으로, 6절은 “이방인과 과부를 압제하지 않고,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않는 것”으로 정리한다. 출22:21-23은 하나님께서는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분이시다.

 

또,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해야 한다.” (6절) 이스라엘은 전통적으로 윤리와 종교가 일치된 사회였다. 여호와의 가르침을 따라 공동체 안에서 정의를 행하는 자는 여호와만 섬기는 자이다. 혼합주의의 길에 동참하지 않는다.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는 삶은 이웃 간의 정의를 실천하고 우상숭배에서 떠날 때, 여호와께서 유다 백성을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영원토록 살게 해주신다(7절).

 

 

 

2.그러나 유다의 현실은…(8-11절)

예루살렘 성전을 구원의 보루로 신뢰하는 자들은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는 예레미야의 선포가 거짓말이었다. 하나님을 섬기며 따르는 길을 성전 제의로 축소해버린 자들은 하나님의 윤리적인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들은 십계명조차 무시했다(9절). 거리낌 없이 도둑질하여 여덟 번째 계명을 무시했고, 살인(6계명), 간음(7계명), 거짓 맹세(3계명), 바알에게 분향하고 알지도 못하는 다른 우상들을 따라갔다(1계명). 유다 백성들은 여호와께 예배하러 성전을 찾아갔지만, 그분 말씀에는 정작 순종하지 않는다.

 

그리고 계명을 어긴 자는 원칙적으로 성전에 들어갈 수 없음에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에 들어와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았다고 떠들어 댄다(10절). 이들의 특징은 성전 예배를 통해 성전 밖에서 범한 죄가 모두 용서받았다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돌아가서는 다시 가증스러운 짓을 계속했다.

 

여호와의 성전으로 일컬음을 받는 성전은 도둑의 소굴이 되었다(11절). 도둑이나 강도가 범죄하고 은신처를 찾아 숨듯이 성전이 범법자들의 도피처로 악용된다. 사회적이고 규범적인 죄를 범한 이들이 제의적으로 용서 받기 위해 성전을 찾았다. 성전 밖에서 저지른 악행을 짐승의 희생제물로 세탁할 수 있기에 성전은 도둑들로 가득 찬다.

 

*성전에서 일어나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하나님께서 남김없이 보셨기에 멸망은 확정되었고 변함이 없을 것이다.

 

 

 

3.멸망, 유배당함(12-15절)

거듭된 경고와 권면에도 악에서 떠나지 않고 성전을 도둑의 소굴로 만들어버린 유다에게 여호와께서 멸망과 유배의 심판을 선고하신다. 유다는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 실로”가 멸망 당하는 것으로부터 교훈을 삼아야 한다(12절). 이는 여호와께서 실로 성소를 당신의 처소로 택하셨다는 사실이 실로 성소의 안전을 지켜주지 못했다. 성소가 오히려 이스라엘의 악을 막지 못하고 조장했다면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에 예외가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유다는 이와 같은 역사적인 사실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으나 실로의 비극적인 운명을 보고서도 깨우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데도 끊임없이 예언자들을 보내셨지만, 이들은 듣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다(13절). 예루살렘 성전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자들은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들의 예언 선포에는 관심도 없었다. 이스라엘의 죄악이 실소 성소를 멸망시켰다면, 유다의 죄를 조장한 예루살렘 성소의 운명도 다를 수 없다(14절).

 

*실로 성소의 타락이 “에브라임 온 자손”의 유배를 초래했다면 도둑의 소굴이 된 예루살렘 성전의 타락은 유다의 유배를 초래할 것이다(15절). 유다 백성은 다르다고 외치지만 여호와께는 둘 다 차이가 없다. 그들과 에브라임(북이스라엘)을 구별했으나 여호와께는 다르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실로 성소를 무너뜨린 것 같이, 북이스라엘(에브라임)을 멸망시킨 것 같이 남 유다도 하나님 앞에서 쫓아내리라고 선포하셨다.

 

*실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성막이 세워진 곳이다(수 18:1).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 때문에 먼저 블레셋에 의해 파괴되었고 그곳에 있던 언약궤도 빼앗겼다(삼상 4장). 이후 실로가 있던 북이스라엘이 아예 멸망하고 포로로 끌려갔다. 유다 백성들이 철석같이 믿고 있는 “성전 불패”의 확신은 사실 조금만 역사적인 사건을 살펴보면 얼마나 허황한 것인지 알 수 있다.

 

 

 

나는?

-유다 사람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라(1-2절) 외쳤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다. 실로 성소와 에브라임의 악함을 어떻게 했는지 보라(12절)고 하셨지만, 남유다 백성들은 듣지도 않고 보지도 않았다.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고 외쳤지만(3절), 성전에서 드리는 형식적인 제사 의식을 기대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바른길과 행위를 거절하고(5-7절)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악한 길과 행위를 서슴없이 행하였다(8-11절). 가증한 일을 행하면서 성전에서는 구원받았다며 예배를 드렸다. 역사적인 사건을 보며 이런 악한 길과 행위를 멈추어야 했지만, 악한 폭주는 멈추지 않았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돌이키기 위해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않았고, (애타게)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다(13절). 그러므로 실로와 북이스라엘에게 행함 같이 행하시겠고, 북이스라엘을 쫓아낸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 유다를 쫓아내시겠다고(14-15절) 확정하신다.

 

 

*”말씀하시고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가르침과 사건들을 듣고 볼 수 있어 “바르고 정의로운 길과 행위로 살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축복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길과 행위는 결정적으로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것과 보여주시는 것에 순종하는 것보다, 자신들이 듣고 싶고, 보고 싶은 것에 순종하는 것이었다. 이 길의 끝은 그야말로 멸망이다.

 

*오늘날의 “성전 불패 신학”과 같은 모습은 무엇일까? 예배와 일상이 다른 모습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바로 정의와 공의 행하는 삶임을 분명하게 선포했었다.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새번역_미 6:8)

 

 

*예배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일이 먼저다.

 

*하나님 백성의 삶은 성전의 하나님께 나아와 제사만 잘 드리는 것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과 행위로 바르게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 사는 길이다.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는 것이 없는 성전은 가증한 곳일 뿐이다. 오늘날 교회당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삶이 없이 그저 예배만 드리기 위해 나오는 곳이라면 그곳은 거룩한 곳이 아니라 가증한 “도둑의 소굴(범죄하고 은신하는 곳)”일 뿐이다. 우리 더온누리교회는 도둑의 소굴이 아니라 일상의 거룩한 동행을 마무리하고 다시 시작하는 거룩한 모임이 되기를 소망한다.

 

*존재와 행실의 변화 없는 하나님을 믿는 삶은 기만일 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삶의 변화와 성숙 없이 예배만 잘 드리는 그리스도인은 본문의 남유다 백성과 다를 바 없다.

 

 

*성전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고 성전 제의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체시킨 유다 백성에게는 심판 이외에 다른 길은 없다. 교회도 예외는 없다. 교회당을 하나님의 자리에, 예배 시간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체하는 삶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될 수 없다. 심판이 기다릴 뿐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상적인 삶( 그 속의 관계들)을 파괴하는 종교는 거짓이다. 상식을 뛰어넘는 믿음의 길이지만, 몰상식하지는 않다. 바른길과 행위는 단순히 종교적인 형식이 아니라 근본적인 구원의 상태와 생존 여부를 결정짓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일상에서 베풀어주시는 한량없는 은혜는 우리의 길과 행위가 정의와 공의, 선을 행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베풀어주신 것이다. 그 은혜를 따라 사랑하며, 선을 행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공의를 행하는 길로 나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어야 한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을 “보라” 그리고 바른길과 행위로 살아내라.

 

 

 

*주님, 말씀을 잘 듣겠습니다. 행하신 일뿐 아니라 행하실 일도 잘 바라보겠습니다.

*주님, 그래서 길과 행위를 바르게 살겠습니다. 주님 앞에 도둑과 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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