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가증함의 끝판왕… 쏟아지는 절망 [렘 7:30-8:4]
 – 2023년 07월 22일
– 2023년 07월 22일 –
유다의 죄악은 끝이 없었다. 본문은 예루살렘 성전에 둔 가증한 것과 더 나아가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있는 도벳에서의 끔찍한 인신 제사를 고발한다.
 
이스라엘의 어린아이 희생 제사는 단편적으로만 언급된다. 특별한 경우에만 이루어졌던 어린아이 희생 제사는 그 가증함 때문에 우상숭배의 대표 격으로 언급된다. 열왕기에서는 유다왕 아하스(왕하 16:3)와 므낫세(왕하 21:6)가 자기 아들을 불 속으로 지나가게 했다고 고발한다. 그뿐만 아니라 북이스라엘의 멸망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어린아이 희생 제사를 언급한다(왕하 17:17).
 
요시야 시대 진행된 종교개혁 이전에는 어린아이 희생 제사가 예루살렘 당국자들에 의해 여호와 제의 안에서 묵인되었던 것 같다. 요시야 왕이 도벳을 더럽혀 물록/몰렉에게 아이들을 바치지 못하게 했지만(왕하 23:10) 그의 사후에 다시 성행했다. 예레미야와 에스겔이 어린아이 제사를 신랄하게 비판한 것이 그 증거다. 심지어 포로기 이후에도 존속되었을 가능성이 크다(사 57:5).
 
*하나님의 진노는 처절했다.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않고 교훈을 받지 않는” 민족에게 심판을 선고하신다. “너의 머리털을 베어 버리고 벗은 산 위에서 통곡할지어다(29절 상)” 여호와께서 노하신 바 이 세대를 끊어버리셨기(29절 하)”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노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1.성전과 도벳의 우상숭배와 심판(30-34절)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 앞에서 노골적으로 악을 행한다. “예루살렘 성전에 가증한 것을 세워놓고 그 집을 더럽혔다”(30절)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를 점령한 우상들은 성전까지 자리를 차지했다. 도둑의 소굴(11절)일 뿐 아니라 “우상의 소굴”이 되어 버렸다. 에스겔도 환상 중의 성전에서 우상숭배 하는 자들을 보았다(겔 8:16) 백성들의 가증함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한계가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남서쪽을 두르고 있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세우고 자기 아들과 딸들을 불에 살라 제물로 드렸다(31절 상).
 
여호와께서 직접 밝히시기를, “내가 명령하지 아니하였고 내 마음에 생각하지도 아니한 일이니라(31절)”라고 했다. 백성들은 어린아이 희생 제사를[사를 여호와의 명령으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크다. 출 22:29 절을 따라 “네 처음 난 아들들을 내게 줄지며”를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바알에게 드렸던 어린아이 희생 제사를 여호와 제의 안에 수용한 것처럼 여기게 한다.
 
미 6:7에서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도 속죄제를 위해 맏아들을 드리는 경우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에스겔도 어린아이 희생 제사와 성전 예배를 함께 묶어 우상숭배를 고발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 자녀를 잡아 우상에게 음식으로 바친 그날 예루살렘 성전으로 돌아와 여호와께 경배를 드렸다.
 
*주전 6세기 전후의 이스라엘은 얼마나 철저하게 종교적 혼합주의에 빠졌는지 눈여겨보아야 한다.
 
 
*예루살렘에 하나님을 위한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여호와의 준엄한 심판이 도벳과 관련하여 선언된다. 도벳이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 대한 심판의 말씀도 선언된다. 여호와께서 심판하실 때 가장 가증스러움의 극단을 보여준 도벳과 관련한 심판의 메시지도 주신다. 어린아이를 제사한 그곳은 죽음의 골짜기가 될 것이다(32절).
 
*축복과 번영을 기대하며 우상을 섬긴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는 멸망과 죽음의 상징이 된다. 어린아이를 불살라 바치던 도벳은 공동묘지가 된다. 가증한 짓을 행하던 곳이 가증한 짓을 행하던 자들의 시체로 더럽혀진다.
 
*여호와의 심판은 죽음조차 비참한 죽음임을 선포한다. 전면적이고 파멸적이다. 매장되지 못하고 들판에 버려진 수많은 시체는 날짐승과 들짐승의 밥이 된다(33절). 기쁨과 즐거움의 소리로 활기가 가득했던 예루살렘 거리는 죽음의 적막이 가득하다(34절). *도벳에서 자녀들을 제물로 바친 결과로 자녀들이 완전히 끊어진다.
 
 
 
2.완전한 멸망(8:1-3)
여호와의 심판은 산 자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니다. 무덤에서 쉬고 있던 자들도 심판을 피하지 못한다. ““나 주의 말이다. 그때에는 사람들이 유다 왕들의 뼈와 유다 지도자들의 뼈와 제사장들의 뼈와 예언자들의 뼈와 예루살렘 주민의 뼈를, 그들의 무덤에서 꺼내다가, 그들이 좋아하고 노예처럼 섬기고 뒤쫓아 다니고, 뜻을 물어보면서 찾아 다니고 숭배하던, 해와 달과 하늘의 모든 천체 앞에 뿌릴 것이다. 그래도 그 뼈들을 모아다가 묻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니, 그것들은 이제 땅바닥에서 거름이 되고 말 것이다.” (새번역_1-2절)
 
고대 세계에서 무덤은 고인의 영원한 안식처이기에 때로는 복수의 차원에서 안식을 누릴 수 없게 무덤에서 뼈를 꺼내 들판에 버리기도 했다. 들판에 버려진 뼈들은 우상들의 무능력을 철저하게 보여준다. 우상들은 한 때 자신을 섬겼던 자들의 무덤이 파헤쳐져도 속수무책이다. 우상을 숭배하던 자들의 수치는 곧 그가 섬긴 우상의 수치다. 우상숭배자들은 죽음도 안식으로 허락되지 않는다. 헛것을 숭배한 대가는 영원한 저주였다.
 
하나님께서 이 심판을 철저하게 진행하신다. “그리고 이 악한 백성 가운데서 남아있는 자들은, 내가 쫓아 보낸 여러 유배지에서 사느니보다는, 차라리 죽는 쪽을 택할 것이다. 나 만군의 주가 하는 말이다.” (새번역_3절) 전쟁의 심판에[서 살아남았다고 해서 목숨을 구한 것은 아니었다. 살아남은 자들의 운명은 죽은 자들의 운명보다 가혹하고 더 비참할 것이다. 이들은 유배지에서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아야 한다.
 
*고향에서 쫓겨나 사방으로 흩어진 자들은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차라리 죽음을 소망하게 될 것이다. 이 끔찍한 심판은 아무도 여호와를 피해갈 수 없다.
 
 
 
나는?
-남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은 성전보다 우상에게 가증스러운 제물을 바친다. 선택받은 백성인 유다는 악한 족속이 되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컫는 하나님의 집인 성전에 가증한 것을 세웠다. 또 요시야가 무너뜨렸던 도벳 사당이 여호야김 때 다시 세워졌고 어린아이들이 희생당했다.
 
-짓무른 백합이 잡초보다 더 악취를 내듯이 최상의 것이 썩으면 최악이 된다. 이 시대의 아이들이 스스로 자기의 목숨을 던진다. 하나님 나라와 상관없는 세상의 가치관에 불살라지고, 신음하며 죽어간다. 자녀를 위한다고 하는 일이 어쩌면 부모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희생하는 것이 아닐까?
 
 
-자녀를 불태운 그곳이 부모들의 무덤이 되게 할 것이다. 시신이 너무 많아서 온전하게 장사 되지 못한 채 들짐승들의 밥이 되게 하신다. 하나님 말고 부모가 의지하는 그 우상들이 자녀는 물론이고 부모까지 삼킬 것이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의 성공을 위해 스스로 우상을 삼은 자녀들의 성공이 세상에서는 영광과 자랑거리가 될지 모르지만, 어느 순간 불현듯 그 자신이 짐이요, 가시요, 근심거리가 되어 돌아올지 모른다.
 
-혹독한 심판에 내던져진 유다 백성들이 섬겼던 하늘의 해외 달과 별들은 그저 심판을 무심히 쳐다만 보고 있을 것이다. 왕과 백성과 종교 지도자들은 모두 예외 없이 치욕을 당할 것이다. 간신히 살아남았을지라도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라고 탄식할 것이다.
 
 
*이와 같은 심판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완고하게 회개하지 않는 그들 자신이 자초한 것이다. 기억해야 한다. 유혹받을 때 죄가 가져오는 무서운 결과를 기억하고 두려워한다면 적어도 쉽게 범죄 하지 않는다.
 
*거짓된 우상의 제단이 성전 안에 버젓이 세워졌다. 므낫세 왕이 세운 앗수르 신을 위한 제단은 요시야 왕의 개혁 때에 파괴되었다. 그러나 이후 여호야김 치하에서 그와 유사한 것이 다시 등장했다. 게다가 예루살렘 남서쪽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는 자녀들을 불에 던지는 제사가 버젓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백성의 반역과 타락이 갈 데까지 갔다. 사람의 욕망과 필요를 채우는데 신앙의 초점이 맞춰지면 타락은 쉽게 찾아온다.
 
 
*상상할 수 없는 짓들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들이 버젓이 저지른다. 우상을 섬기는 정도가 너무 지나쳐 인간성이 말살 되었다. 윤리와 도덕의 경계선이 가볍게 무너졌다. 집착과 광기에 치우진 우상숭배가 가져온 참극이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다를까? 참담하게도 다를 바 없다. 교회에서도 입에 담기 부끄러운 일들이 너무도 당연하게 자행된다. 지금 이슈가 되고 있는 교단의 세습금지법을 버젓이 어긴 대형교회에서 교단 총회로 모이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난다. 일각에서는 “그 교단 뿐이겠나…”는 자조 섞인 한숨이 끊이질 않는다. 교단이 이런 형편인데, 교회라고 다를까? 슬프게도 그 무리 안에 나도 속해있다….
 
*예레미야를 통해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라는 질문에 쉽사리 답을 못하겠다. 답답하기만 하다.
 
*그렇다고 넋을 놓고 있어야 할까? 그래서는 안된다. 적어도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 백성으로서 분명한 기준을 알려주시고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고 계심을 말씀이 증거하기 때문이다.
 
*말씀으로 알려 주시는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분명한 기준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내려고 발버둥칠 때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신다. 그 발버둥의 시작은 역시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살아내려고 힘쓰는 것이다. 기도하면서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의지하는 것이다.
 
*말씀에 삶을 거는 것 외에 길이 없다. 이 길은 묵묵히 나의 자아와 싸우며 살아내야 할 여정이다. 말씀을 거부하고 외면하려는 본능과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살아내게 하시기 위해 부어주시는 그 깊은 사랑의 은혜을 붙잡으려는 마음과의 충돌이다.
 
 
*한편으로 예레미야서를 읽기가 무척이나 힘들다. 목이 터져라 외치는 그의 메시지는 언제나 메아리되어 돌아올 뿐 누구 하나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또 외쳐야 하는 예레미야가 딱하다. 듣지도 않는 메시지를 또 외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도 답답하실 터이다. 무엇보다 힘든 것은 예레미야 시대를 바라보며 이 시대를 지켜보아야 하는 절망감을 감출 수 없다.
 
*문제가 없었던 시대는 없었다. 고통과 절망, 한숨은 언제나 있었다. 한때는 희망과 기쁨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철저히 무너지는 유다의 역사가 남의 일처럼 읽혀지질 않는다. 유다맘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어서 고통스럽다. 지난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마치 의사가 수술해도 불가능하다고 선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참담하다. 한없이 참담하게 하는 말씀이 지금 이 시대에서도 읽혀지니 절망이 찾아오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다. 그래서 답답한 아침이다.
 
*그래도 주님, 포기하지 않으실 거지요? 그래서 오늘도 말씀을 깨우쳐 주시는 거지요?
 
 
 
*주님, 성전에 가증한 우상이라니요… 자녀들을 불 가운데 던지다니요….
*주님, 유구무언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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