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탄식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렘 8:18-9:6]
 – 2023년 07월 24일
– 2023년 07월 24일 –
여호와께서 치명적인 뱀과 독사를 보내신 것을(8:17) 알기에 예레미야는 고통스럽게 반응한다. 유다 백성의 절망적인 현실에 대한 예레미야의 깊은 탄식이다. 고집스럽게 귀를 막고 제 길로만 가지만 그래도 유다는 같은 민족이다. 깊은 슬픔에 그의 마음이 병들고, 유다 백성의 상처 때문에 예레미야도 상처를 입는다. 돌이키지 않는 유다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앞서 보는 먹먹하기만 한 깊은 상처였다.
 
 
 
1.탄식(18-9:1)
“유다는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완강하게 거절하고 하나님은 심판을 결정하신다. 북쪽에서 몰려오는 대적들은 이미 출발했다. 하나님께서 뱀과 독사를 보내고 독이 든 물을 마시게 하시기에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내 딸 백성”을 덮치는 재앙을 먼저 알게 된 예레미야는 고통과 절망에 빠진다. 견딜 수 없는 슬픔이었다. 자기 백성의 고통이 그의 가슴을 찔렀다. “나의 기쁨이 사라졌다. 나의 슬픔은 나을 길이 없고, 이 가슴은 멍들었다.” (새번역_18) 나에게 이런 슬픔이 있었던가? 나라와 민족을 위한 애달픈 고통과 슬픔을 가졌는가? 교회의 아픔에 방관하거나 혹 가혹한 심판자의 자리에만 있지 않은가? 예레미야는 백성들 앞에서는 하나님의 심판 선언을 단호하게 외치면서도 하나님 앞에서는 함께 고통당하는 백성의 심정으로 섰다. 나에게 이런 마음이 있을까?
 
나을 길이 없는 슬픔의 마음을 토로하는 예레미야는 “치료받지 못하는 이스라엘”의 고통 때문에 더 깊이 슬퍼할 뿐이다. 이스라엘의 고통이 예레미야의 고통이었다. “나의 백성, 나의 딸이, 채찍을 맞아 상하였기 때문에, 내 마음도 상처를 입는구나. 슬픔과 공포가 나를 사로잡는구나.” (새번역_21절) 백성들이 맞는 채찍의 고통을 그대로 느낀다. 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심판과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백성을 보며 괴로워한다. 백성들의 죄에 분노하던 그가 백성들의 고통에 운다. *오늘날 교회에 대한 분노만 표출하는 것에 멈추지 말고, 교회의 아픔을 슬퍼하기까지 사랑해야 할 것이다.
 
 
예레미야는 곳곳에서 넋이 나간 듯이 부르짖는 소리를 듣는다.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의 왕이 그 가운데 계시지 아니한가?” (19절 상) 여호와께서 시온의 왕으로 계시는데 시온을 덮친 재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예루살렘 성전을 구원의 보루로 간주하는 자들에게 시온의 왕이신 여호와께서 시온의 심판자가 되시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백성들의 장탄식이 그칠 줄 모른다.
 
그런데 백성들의 탄식에 뒤이어 여호와께서도 탄식하신다. “그들이 어찌하여 그 조각한 신상과 이방의 헛된 것들로 나를 격노하게 하였는고” (19절 하) 여호와가 시온의 왕이시라면 그들이 합당한 모습으로 왕을 섬겨야 했다. 그러나 입술로만 그리할 뿐 왕을 배반하고 다른 왕(우상)을 섬겼다.
 
백성들의 탄식이 다시 이어진다. 자신들의 처지가 마치 수확 없이 여름을 보내고 굶주림의 겨울을 맞는 농부의 절망적인 형편과 같다고(20절) 탄식한다. 재앙의 원인은 살펴보지 않고 자신들의 곤궁한 상황만 부각하며 시온의 왕이 도와주지 않다고 원망을 토로하는 것이다. 이들은 여호와라면 당연히 백성이 재앙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해주셔야 하고 재앙이 닥쳤다면 구해주셔야 한다. 자신들의 행위는 고려사항이 아니다.
 
이러한 백성들의 “안하무인”과 같은 모습에 예레미야가 탄식한다. 먼저 “내 딸 백성”을 덮치는 멸망의 그림자 때문에 공포와 놀라움에 사로잡힌다. (21절). 유다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으나 치료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환자와 다름없다. 길르앗에는 상처를 치료하는 좋은 유향과 유능한 의사가 있었지만, 유다에게는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한다(22절). 여호와께서 마시도록 한 “독이 든 물, 그분이 물게 하신 뱀과 독사의 곡”이기에 어디에서도 해독제를 구할 수 없다. 피할 수 없는 멸망 앞에 예레미야는 슬픔과 절망 가운데 눈물을 흘리며 애도할 뿐이다(9:1). 죽음에 넘겨진 자기 민족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애곡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눈물이 메말라 마음껏 울지 못한다.
 
 
 
2.책망 가득한 탄식(9:2-6)
“나”의 참담한 마음의 독백을 한탄하며 토로한다. “내가 광야에서 나그네가 머무를 곳을 얻는다면 내 백성을 떠나가리니 그들은 다 간음하는 자요 반역한 자의 무리가 됨이로다.” (2절) “나”가 하나님이시라면 유다의 맹목적인 거절에 무력감을 느끼시고 가슴이 에이는 아픔에 빠지신다. 단호하게 그들과의 관계를 끊으셔야 하지만 “내 백성”이기에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마지막까지 끈을 놓지 않으신다. 만약 “나”가 예레미야라면 완강한 거절에 지친 예언자의 절망과 그런데도 끊을 수 없는 자기만족에 대한 연민 가득함을 읽을 수 있다.
 
하나님과 예레미야의 거듭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멸망을 향한 유다의 질주는 도무지 멈출 줄 모른다. 예레미야의 선포는 허공만 가를 뿐, 최소한의 반향도 일으키지 못한다. 예레미야는 절망적인 현실 앞에 차라리 아무도 없는 광야로 도망하고 싶으나 자기 민족과 함께 있어야 하기에 이들을 버리고 떠나지 못한다.
 
 
*듣지 않고 응답하지 않더라도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것이 예언자의 사명이다. 백성들은 “간음과 반역”으로 하나님과 정면충돌한다. 예레미야는 더 깊이 좌절과 절망에 빠져들어 간다. 구약에서 간음과 반역은 자주 우상숭배의 죄악을 지칭한다. 하나님과 관계 단절을 초래한 간음과 반역의 구체적인 예로 사회에 만연한 거짓과 사기를 고발한다. “내 백성”의 혀가 전쟁 무기인 활과 같다(3절). 이들의 혀는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것처럼 이웃을 향해 거짓의 화살을 날려 보낸다. 진실에는 관심이 없고 거짓에 있어서는 뛰어난 능력과 열심을 발휘한다.
 
속임수와 거짓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 제 혀를 가르치고 만족을 모르는 탐욕을 채우기 위해 지칠 때까지 악을 행한다(5절). 거짓과 속임수가 진실을 쫓아내고 사회규범으로 통용된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가 속이기 위해 사는 사회로 변질하고 말았다.
 
형제는 서로 사기를 치고, 이웃은 서로 헐뜯는다. 어떤 형제도 신뢰하지 말고 자기 이웃을 조심해야 한다(4절). 이런 사회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3절), 하나님을 알기 싫어하는(6절) 사회의 추한 단면이다.
 
이웃을 속이며 살아가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거추장스러운 존재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거짓과 악을 행하는 데 방해만 됐다. 하나님 없는 사회는 중상모략이 난무하고 거짓이 승리하는 불신과 불의의 사회이다. 폭력이 폭력을 부르는 불법이 난무하는 사회이다(6절 상). 유다 백성이 여호와를 떠나 “거짓을 고집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하는 것”은(5절) 어쩌면 “완전히 속이며(는)” (4절) 사기꾼의 본성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행태이지 않겠나….
 
 
 
나는?
-예레미야가 할 수 있는 것은 “통곡”뿐이었다. 변하지 않는 백성, 돌이킬 가망 없는 나라, 멈출 수 없는 추락, 더 이상 기도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을 바라보는 선지자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다. 그 눈물마저 말라서 자기 눈이 눈물의 근원이 될 수만 있다면 주야로 백성을 위해 울겠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판단하시기에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확정하시기 전에 어서 돌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심판을 당하고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백성들이다. 오히려 안하무인이다. 이제 고생할 만큼 했는데 왜 구원하시지 않느냐고 불평하기까지 한다. 그들은 다른 우상을 섬기는 것과 동일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치유할 수 없는 상태에 빠졌고 값비싼 유향과 용한 의사가 있어도 고칠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가망 자체가 없다. 세상이 주는 처방은 하물며 어떻겠는가?
 
-유다 백성들은 재난을 예견하고서 간담이 녹아버린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떠나지 않았느냐는 두려움이 임했다. 과거 다윗왕 치세에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안전을 무조건 보장하실 거라고 믿었다.
 
*과거의 신앙이 나를 지켜주지 못한다. 평생 주 앞에 신실해야 한다.
 
-동족의 간음과 반역을 더 이상 눈 뜨고 볼 수 없어서 선지자는 이 백성을 떠나 거할 만한 광야가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이 떠난 그들을 위한 인내심과 동정심이 더 이상 남지 않는 것이다. 유다 사회는 거짓이 진실을 대체했고 악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었지만, 그 땅이 여전히 강성하였기에 더욱 자신을 정당화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신앙 회복 없는 경제회복이 더 큰 재앙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을 떠난 유다는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사회가 되었다. 어쩌면 하나님의 심판이 일어나기 전 이미 와해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더 잘 보인다.
 
 
*동족을 향한 심판이 임박했음을 알고 예레미야가 탄식한다. 유다 백성의 무지한 모습과 여호와의 탄식이 이어지며 통곡하기에 이른다. 모든 원인이 이스라엘의 탐욕에서 시작된 우상숭배와 거짓과 악행이 여호와 알기를 싫어하므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죄악은 치료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 아닌 우상을 숭배하는 질병은 처음에는 문제의식조차 느끼지 못하지만 조금씩 병들게 하여 무너뜨린다.
 
*그런데 죄악의 영향력은 공동체를 함께 무너뜨린다는 것이 문제다. 예레미야는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심각해졌다.
 
 
*매일 성경 본문을 따라 전하는 주일 설교가 참 고통스럽다. 예레미야 시대의 유다의 상황과 오늘날 우리 민족의 상황이 신기하게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 시대 거짓 선지자와 제사장들의 부패와 타락상은 오늘날 교회의 부패와 타락상과 다를 바 없다는 것에 절망하게 된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의 분노와 책망, 그리고 예레미야의 비탄과 절망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 탄식이 본문에서도 어김없이 들려온다(18-19절). 백성들은 자신들이 당하는 고난 때문에 탄식하고(19-20절), 이를 바라보는 예레미야의 가슴은 깊은 상처로 채워진다(18,19,21, 9:1). 그 누구보다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모습도 빼놓을 수 없다(19,22). 이런 상황인데도 백성들은 돌아올 줄 모른다.
 
*오죽하면 예레미야가 이런 백성을 떠나 홀로 광야에 있기를 희망했다(9:2). 백성들에게 환멸을 느낀 것이다. 광야는 하나님께서 머무시는 곳이다(출 19:1). 안하무인, 적반하장, 하나님 앞에서 도무지 돌이키지 않는 백성들과 함께 거하느니 차라리 홀로 광야에서 하나님과 함께 지내는 편이 낫겠다는 것이다. 그의 마음이 깊이 공감된다.
 
 
*원하지 않는 일이 현실이 되어버린 시대, 그런데도 주님을 바라보는 것에서 희망을 놓고 싶지 않은 아침이다.
 
 
 
*주님, 한숨만 나옵니다. 그러나 이 한숨이 절망되지 않도록 이끌어 주실 것을 바라봅니다.
*주님, 도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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