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속속들이 거짓된 백성… 이런 나라 보복하지 않겠느냐? [렘 9:7-16]
 – 2023년 07월 25일
– 2023년 07월 25일 –
거짓과 사기가 하나님 백성의 본질이 되어 버렸다. 서로 속이고 악을 행하며 공동체의 모습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마치 하나님의 인내를 시험하듯 벌하지 않을 수 없게 변질하여 버렸다. 이스라엘이 야곱의 후손이듯, 그들은 속이는 행위에 익숙하다. 거짓과 사기가 그들의 본성처럼 나온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언하실 수밖에 없고, 깊은 탄식을 통해 심판을 확정하신다. 이스라엘을 전쟁터로 달려가는 ‘말’에 비유하듯이 하나님의 심판은 더 이상 유예되지 않고 진행된다. 본문은 하나님의 심판 선언, 심판의 정당함을 보여주는 근거, 그리고 심판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탄식으로 채워진다. 이는 이스라엘의 심판과 멸망은 하나님의 무능력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 유다 백성, 그들의 받는 심판의 이유는 백성의 거짓과 행음(우상숭배)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책임을 물으시고 혹독한 심판을 예고하신다.
    
    
    
1.심판선언(7-9절)
답답하다. 유다 백성들은 마치 악을 행하기 위해 사는 것처럼 악행이 가득했다. 거짓과 속임수가 사회 규범인 것처럼 일상적으로 행해졌다. 하나님 백성 공동체가 자신이 살기 위해 서로를 죽이는 들짐승의 세계처럼 되어 버렸다. “내 백성의 혀는 독이 묻은 화살이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거짓말뿐이다. 입으로는 서로 평화를 이야기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서로 해칠 생각을 품고 있다.” (새번역_8절) 웃는 얼굴의(서로 평화를 이야기하지만) 거짓 혀는 “죽이는 화살”처럼 치명적이다.
    
하나님께서 당혹해하신다. 동시에 분노를 감추지 못하신다. 징계를 통해 죄악을 제거하기로 결심하신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보아라, 내가 내 백성을 금속 단련하듯 단련하며, 시험하여 보겠다. 내 백성이 악을 저질렀으니, 죄 많은, 이 가련한 백성을, 내가 달리 어떤 방법으로 다룰 수 있겠느냐?” (새번역_7절) *이는 심판의 목적이 아직은 멸망이 아니라 정화에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혀를 치명적인 화살로 악용하는 자들을 녹이고 연단 하여 다시 깨끗게 하시려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유다 백성을 “내 딸 백성”이라고 표현했지만, 8절의 고발 이후에는 “이런 나라”로 표현이 바뀐다. “내 딸 백성”의 표현 속에는 징계를 피할 수 없게 된 유다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민이 느껴진다면, “이런 나라”는 상당한 거리감과 단호함이 묻어난다. 특히 9절에서 “벌하다(파카드)”라는 단어는 “잘못에 관하여 책임을 묻다”를 의미한다. 또 “보복하다(나캄)”의 의미는 “악한 자들을 보복하시고 세상을 다시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정의를 뜻한다.
    
*유다 백성의 죄에 대한 깊은 실망과 단호한 심판 의지를 드러내시는 하나님에게서 짙은 안타까움이 배어 나온다. 염증이 나실 만하지만, 유다 백성을 여전히 “내 딸 백성(7절)”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들은 감히 하나님께서 “내 백성”이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 뼛속까지 거짓된 백성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타락한 백성을 더 이상 두고 보실 수 없었다. 환부를 도려내듯, 불순물을 제련하듯 심판이라는 징계를 통해 그들의 죄악을 제거하실 것이다. 더 이상 지체하지 않으실 것이다.
    
    
    
2.멸망의 탄식(10-11절)
예레미야가 하나님께서 확정하신 심판이 성취될 것을 내다보며 죽은 자들을 위해 애곡 하듯 애가를 부른다(10절). 하늘의 새부터 땅의 짐승에 으르기까지 모두 도망쳐버렸다. 산들과 광야의 초원이 들짐승도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초토화 되어 버렸다. 울부짖는 예레미야의 통곡이 심금을 울린다.
    
이렇게 예레미야가 울부짖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완전한 멸망을 결정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예루살렘을 돌무더기로 만들어서 여우들이 우글거리는 소굴이 되게 하고, 유다의 성읍들을 황무지로 바꾸어 놓아 아무도 살 수 없게 하겠다.” (새번역_11절)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들이 감내하며 통과해야 할 고통의 시간을 바라보며 울부짖었다. 죽은 자를 위해 애곡하듯이 무지로 변할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바라보며 고통스럽게 울부짖는다.
    
*사람이 타락하니 땅도 황폐하여진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무너지고, 정의와 신뢰와 진실함이 사라지니 땅도 함께 죽어 나간다. 아무리 강성하여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이 없으면 짐승만 가득한 돌무더기가 될 뿐이다.
    
*주체하지 못할 슬픔이 예레미야를 짓누른다. 아무리 울어도 확정된 심판은 철회되지 않는다. 그러나 심판의 연단을 감내해야 할 백성들의 고통을 생각하면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십자가의 죽음을 목전에 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통곡하신 그 모습 그대로다. 이스라엘은 예레미야의 통곡이 무색할 만큼 또다시 죄악과 벗하였고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스스로 거부하며 멸망의 길을 자초했다. 멸망의 고통스러운 심판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예레미야의 마음과 다르지 않았다.
    
    
    
3.재난의 원인(12-16절)
예레미야는 가상 질문과 변의 틀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의 멸망 원인을 요약적으로 가르쳐준다(예를 들면 5:19; 13:22; 16:10-13; 22:8-9이다). 보통 백성이 묻고 예레미야가 답하지만, 본문은 예레미야가 묻고(12절) 하나님께서 답하신다(13-16절). 예레미야의 질문은 10-11절에서 선포한 심판 위협이 눈앞의 현실이 되었음을 전제한다.
    
예레미야가 질문한다. “이 땅이 왜 망하였는지, 왜 사막처럼 황폐해졌는지, 왜 행인마저 끊어졌는지, 이것을 알아낼 만큼 지혜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이 까닭을 말할 수 있도록, 주님의 입에서 직접 말씀을 받은 사람이 누구인가?” (새번역_12절) 놀랍게도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 주신 땅이 심판이 떨어져 황무지가 된 이유를 아는 백성들은 아무도 없었다. 이 질문은 당연히 백성들이 해야 할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랄 일은 아니다 예루살렘 거리에는 단 사람의 의인도 없었기 때문이다(5:1). 하나님 백성이 이처럼 무참하게 멸망한 원인을 깨달아 아는 지혜자도 없고 이에 관해 말씀을 받아 선포할 예언자도 없었다. 그저 할 말을 잃고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원인을 모르면 치유할 수 없다. 상황은 매우 절망적이기만 하다. 유다 백성들은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예레미야를 “여호와의 입”으로 인정하고 그의 선포를 들어야만 했다. 질문거리가 없는 신앙은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얕기 때문이다. 맹목적이고 일방적인 믿음으로 덧칠해져 있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살아내려면 무수한 부조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질문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 “도대체 하나님…. 왜 이렇습니까?”라고 말이다.
 
    
예레미야의 질문에 하나님께서 반응하신다.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이 백성에게 나의 율법을 주면서 지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버리고, 나의 말을 순종하지 않고, 실천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자기들의 고집대로 살고, 조상이 섬기라고 가르쳐준 바알 신들을 따라다녔다.” (새번역_13-14절) 이스라엘은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을 때 주어진 율법을 버렸다. 그 대가로 죽음과 저주가 그들에게 임했다. 우상숭배에 있어서 유다 백성들은 조상들의 가르침에 충실하였다. 이는 오래전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들을 섬기며 멸망의 길을 걸었음을 보여준다.
    
15~16절은 시점이 바뀌어 다시 현재에서 심판을 선언하시는 장면이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불순종과 우상숭배의 길을 간 유다 백성에게 심판을 선고하신다. 조상 대대로 불순종하며 우상을 섬긴 이스라엘의 완악함을 따라 철저하게 심판을 선언하신다. 땅은 폐허가 되고 백성은 그들도 알지 못하는 여러 나라로 유배될 것이다. 그러나 유배로만 끝나지 않고 늘 칼(위협)이 떠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을 버린 결과는 참혹했다. 하나님을 버린 인생에게 불안은 떠나지 않는다.
    
    
    
나는?
-가망 없는 백성에게 남은 것은 심판뿐이다. 그들의 위선과 이중성은 입술로는 평화를 말하지만, 마음으로는 해를 꾸민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치명적인 화살(혀)을 감춘 채 평화를 말한다. 하나님 보시기에 더는 기회를 줄 수 없을 만큼 총체적으로 썩었다.
    
-하나님께서는 환부를 도려내듯, 그리고 제련사가 불로 불순물을 태워 녹이듯, 유다 백성들을 녹이고 연단 하시겠다고 하신다. 겉과 속을 다른 모습으로 용케도 사람들을 속이며 살아온 자들에게 남은 것은 수치뿐일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무수한 하나님의 제련을 받아왔다. 삶 속에서 지나왔던 곤경과 고난, 수치 등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제련하시는 불이었다. 특히나 코로나 팬더믹은 한국교회를 세밀하게 제련하신 시간이었다. 예배의 본질을 고민하게 했고, 공동체와의 관계, 이웃들과의 관계를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코로나 엔데믹은 아직 선언되지 않았지만, 상당하게 풀린 지금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떻게 변했을까? 과연 불순물이 태워졌을까?
    
*오히려 더욱 세상과 교회, 백성들과 공동체를 기만하고 있는 교회들이 버젓이 서 있지는 않을까? 예레미야의 탄식이 우리의 탄식인 것만 같아 괴롭고 슬프다.
    
    
*행음과 패역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떠나가신다. 예루살렘을 광야와 황무지가 되게 하신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이 한 사람도 없는 도시에 더 머무르실 필요 없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는 그곳은 짐승들이 우글거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떠나가시면 어디든 그곳은 죽음의 땅이 된다. 그러나 광야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거하시면 생명의 땅이 된다.
    
    
*심판의 이유는 분명했다. 우상숭배이다. 율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목소리에 청종하지 않고 완악함을 따라 조상들처럼 하나님 대신 바알을 따랐다. 하나님을 생명과 안전의 원천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들에게 생명 대신 죽음을 주신다. 백성에게 쑥을 먹이고 독한 물을 마시게 하고 그들이 숭배하던 그 나라들로 흩어버리려고 하신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조상이 가르친 바알을 섬겼다. 타락한 조상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신뢰했다. 한국교회가 본문의 조상들의 가르침을 더 신뢰하는 유다 백성들과 다를 바 무엇일까?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치열하게 씨름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전통을 받아들인다.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는 것들이어도 말씀보다 더 권위를 갖는다.
    
*유다 백성들 조상의 가르침을 따라 우상을 숭배하는 모습이 오늘날 한국교회가 다르다고 확신 있게 반론할 수 있을까? 목사의 말이라고 성경 말씀을 따라 확인조차 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신뢰하는 무지함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오랫동안 교회 안에서 이렇게 해 왔다면서 자연스럽게 행하는 전통들 속에 말씀의 뜻과 가치에 충돌되는 것을 끝까지 고집하는 완고함을 어찌하면 좋을까?
    
    
*혹시 나에게도 이런 완고함이 있지 않은지 고민하게 되는 아침이다…. 특히 8절의 말씀이 탄식으로 다가온다. “내 백성의 혀는 독이 묻은 화살이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거짓말뿐이다. 입으로는 서로 평화를 이야기하지만, 마음 속에서는 서로 해칠 생각을 품고 있다.”(새번역) 영락없이 우리의 교회들에게 하시는 경고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입술에서 거칠기 짝이 없는 언어가 쉽게 나간다. 그런면서 기도는 고상하게 한다. 평화를 위해 기도하지만, 일상에서 편을 가르고 용서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기도는 기도일 뿐 삶으로 연결하는 것조차 생각하지 않는다. 번지르한 기도의 소리가 울려퍼지지만, 그만큼 일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위선도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한다. 사회정의를 외치는 어떤 교회는 결국 막대한 재개발 이익을 고집하여 지역사회를 곤경으로 몰아넣었다. 이런 일이 다반사다. 겉으로는 사랑이 제일이라고 버젓이 간판을 걸었지만, 실제로는 탐욕을 감추기 위한 것 뿐이었다. 이슈를 이슈로 덮는다고 했든가? 이뿐인가? 남과 같은 죄를 짓고도 겉으로는 안그런척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러한 자들을 내가 벌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나 주의 말이다. 이러한 백성에게 내가 보복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새번역_9절)고 한탄하시는 하나님의 한숨이 역력하다. 나와 우리 더온누리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지 않기를 그저 바랄 뿐이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이 질문 앞에 변명할 수 있을까? 변명할 수 있을 만큼 치열하게 말씀을 아는 것과 사는 것에 힘썼다면 모를까…. 누구도 변명할 수 없다. 그래서 심판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슬프다….
    
    
    
*주님, 마음이 아픕니다. 멸망의 원인이 하나님보다 우상을 붙잡고, 진실함보다 거짓으로 삶을 채운 백성들에게 있음을 보며 고달픕니다.
*주님, 하나님 계신 곳이 생명의 땅이기에 어느 곳에 있든지 저와 함께하심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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