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자랑거리가 심판거리가 되다! [렘 9:17-26]
 – 2023년 07월 26일
– 2023년 07월 26일 –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은 확정됐다. 여호와께서 보복하기로 하셨기에 다른 길은 없다. 사람이 죽으면 그를 위해 애가를 부르는 것처럼, 유다와 예루살렘을 위해 애가를 부르는 일만 남았다. 하나님께서는 애곡하는 여인들에게 임박한 심판을 알리고 무사안일한 백성들을 일깨우신다. “지혜, 부, 용맹, 할례”와 같은 헛된 자랑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를 바라신다.
    
보통 애곡하는 애가는 고인의 좋은 성품과 업적을 기억하고 그의 떠남을 슬퍼하며 부르는 세속적인 노래이다. 성경에서는 왕정 시대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를 자주 이와 같은 애가 형식으로 선포했다. 북이스라엘의 심판을 선언했던 아모스가 처음 애가의 형식을 따라 백성들에게 알렸다(암 5:1). 애가의 내용은 주로 패역한 백성을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하며 그들을 위해 애가를 부르는 것이었기에 매우 도발적인 방식이었다고 한다. 또 죽은 자로 취급되는 청자의 처지에서는 조롱하는 노래로 들리게 된다. 그런데도 심판의 확정성과 필연성을 보여주기에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멸망(죽음)은 가능성이 아니라, 이미 애가가 불린 대로 곧 현실이 된다. 그래서 뼈아프다.
    
    
    
1.시온의 죽음을 슬퍼하는 애가(17-22절)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주민에게 “곡하는 부녀”, “지혜로운 부녀”를 불러오라고 명령하신다(17절). 오늘날로 표현하자면 장례 예식 전문가쯤 되겠다. 당시 사회에서 “곡하는” 곡꾼은 지혜자로 간주되었다. 또한 상주를 대신하여 곡하는 자가 곡꾼이기에 하나님의 이와 같은 명령은 누군가가 죽었음을 전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누가 죽었는지에 대한 것보다 왜 곡꾼이 필요한지를 먼저 밝히신다. “서둘러 와서, 우리를 도와서 조가를 불러 다오.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우리의 눈시울에서 눈물이 쏟아지게 하여다오!” (새번역_18절)
    
곡꾼의 역할은 초상을 당한 이들의 애통함을 더 크게 하는 역할을 했다. 성경의 기록은 상중에 곡하는 애곡은 중요한 의식 중의 하나였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을 위하여 이레 동안 애곡했다(창 50:10). 18절에서 밝힌 것처럼 곡꾼을 불러 애가를 부르게 한 목적은 멸망한 시온을 위한 애곡 때문이었다. 시온은 황폐해지고 큰 수치를 당한다. 백성들은 제 땅을 떠나야 했다. 시온은 폐허가 되고 백성들은 유배당한다. 이를 슬퍼하고 슬퍼할 애곡을 불러야 한다.
    
20절부터는 예레미야가 곡하는 부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여인들아, 너희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너희는 귀를 기울여서,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받아들여라. 딸들에게 애도하는 법을 가르치고,  너희도 장송곡 부르는 법을 서로 익혀라.” (새번역_20절) 기존의 곡꾼들만으로 감당하기에 죽음의 재앙이 너무도 크다. 예레미야는 곡꾼들의 딸들, 이웃의 부녀들에게 애가를 가르쳐서 끝없이 이어지는 장례식을 감당해야 한다. 죽음이 없는 곳이 없다. 집 안이나 집 밖이나 온통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 궁궐, 거리와 광장까지(21절) 피할 수 있는 곳은 없다. 시온의 백성들이 모두 죽음에 삼킴을 당한다. 어린아이들과 청년들마저 희생당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기약도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다시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신다. 들판의 오물이 그대로 버려지는 것처럼 시체가 매장되지 못하고 거리에 나뒹군다. 추수 때 거두지 못한 곡식단도 옮기기 좋게 묶어 놓았지만 거둬들일 사람이 없어 밭에 쓰러져 썩는다(22절). 이처럼 시체들이 거리에 그대로 방치된다. 시온에 죽음이 편만하다. 남은 자가 없이 진멸 당할 것이다. 아이들과 청년들마저 죽임을 당하기에 시신을 수습할 사람이 없어 거리와 광장과 들판에서 그대로 썩어 간다.
    
*시온의 영화로움은 온 간데없이 사라지고, 죽음이 가득 덮었다.
    
    
    
2.참된 자랑(23-24절)
고대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가르침에 따르면 지혜자의 지혜와 용사의 용맹함과 부자의 부함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에 속한 것으로 여겼다. 솔로몬이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힘입어 백성들을 통치하였고(왕상 3:4-15), 다윗은 이스라엘의 군대의 하나님 이름에 의지하여 용감하게 블레셋의 골리앗과 싸웠다(삼상 17장). 그리고 지팡이만 가지고 요단을 건넜던 야곱은(창 32:10) 하나님의 축복으로 수많은 양과 소와 낙타를 거느리고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창 30-31장). 전통적으로 이것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에 지혜자는 그의 지혜를, 용사는 그의 용맹을,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고 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돌렸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이와 같은 전통적인 가르침에 맞선다. “나 주가 말한다. 지혜 있는 사람은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아라. 용사는 자기의 힘을 자랑하지 말아라. 부자는 자기의 재산을 자랑하지 말아라.” (새번역_23절) 이는 지혜문학의 가르침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예레미야는 “지혜와 용맹과 부함”에서 하나님에게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교만을 본 것이다.
    
*사람들은 늘 그렇다. 하나님께서 지혜와 용맹과 부함을 주셨다고 자랑하면서 이를 자기 능력과 업적으로 드러내며 자기를 자랑하다가 결국 여호와를 떠난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사람이 참으로 자랑해야 할 것은 “지혜와 용맹과 부함”이 아니라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24절)”이라고 말한다.
    
*곧 여호와를 아는 것과 그분의 주권과 통치를 인정하고 따르는 역동적인 삶을 의미한다. 여호와를 아는 자는 역사와 삶 속에서 계시가 된 하나님의 활동을 인정하고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임을 깨닫고 동의하며 기뻐하는 자이다.
    
*지혜자나 용사나 부한 자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땅에서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주체이심을 알아야 한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혜와 용맹함과 부함이 여호와의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대신할 수 없다. 참된 자랑을 하는 사람은 자기의 지혜와 용맹과 부함을 가지고 설익은 행동을 하기보다 여호와께서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이 땅에서 행하시기를 믿음으로 기다린다.
    
*예레미야는 분명하게 선언한다. 이스라엘 지혜자들의 지혜와 용사들의 용맹함과 부자들의 부요함이 결국 애가를 부르게 했음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이 땅에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실천해 주시기를 기대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3.마음의 할례(25-26절)
언약 백성의 표지인 할례가 하나님께 전혀 인정받지 못한다. 더 직접적으로 심판의 날은 “포피에만” 할례받은 자들이 징벌을 받는 날이다. “나 주의 말이다. 그날이 이르면, 몸에만 할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내가 모두 벌을 내리겠다.” (새번역_25절) 역사적으로 할례의 풍습을 알고 있는 “애굽과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과 모압 및 광야에 살면서 살쩍을 깎은 자들(26절)”이 모두 심판에 떨어진다.
    
특징적인 것은 애굽이나 유다나 구별하지 않고 심판받을 국가들로 같이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심판의 날에 언약의 표지인 할례는 유다에게 어떤 혜택도 가져다주지 못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몸의 할례는 구원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주변 민족들도 잘 알고 있는 포피를 잘라내는 풍습일 뿐이다.
    
그런데 26절 하반절에서는 “…. 이 모든 민족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와 마찬가지로, 마음에 할례를 받지 않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새번역) 라고 언급한다. 애굽, 에돔, 암몬,모압, 광야에 거하는 자들은 육신의 할례를 받지 못해 심판에 떨어진 것이 아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해 심판에 떨어진 것이다. 이스라엘도 역시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해 심판에 떨어진다.
    
*즉, 몸에 받은 할례가 여호와의 징벌을 면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면 다른 민족들도 할례를 받음으로 징벌을 면할 수 있다. 하지만 몸에 받은 할례는 구원과 전혀 상관없다. 하나님의 구원은 “마음의 할례”로만 가능하다. 즉, 지혜나 용맹이나 부함, 율법의 지침이 아니라 여호와의 사랑과 정의와 공의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사랑과 정의과 공의의 하나님을 온전히 순종해야 구원받을 수 있다.
    
    
    
나는?
*애곡하라 하시지만 은혜를 거두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종말이 임박해도 울지 않고 슬퍼할 줄 모르는 백성들을 대신하여 애곡하는 곡꾼을 부르게 하신다. 이 백성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질 때까지 애곡하게 하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임박한 심판을 내다보시면서 여전히 완악한 유다 백성들을 향해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을 하여도 울지 않는 시대”를 한탄 하셨다(눅 7:32).
    
*목 놓아 울어야 할 많은 이유가 있게 될 것이다. 이처럼 죄는 우리에게 궁극적인 슬픔을 가져다줄 뿐이다.
    
*말씀에서 멀어져 가는 이 땅의 교회들을 바라보며 마음으로 애곡하는 사람이 드문 시대이다. 반면, 그저 형식을 따라 애곡하는 흉내를 내는 애곡 전문가들만이 넘쳐난다. 우리 더온누리공동체가 이런 모임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과 공의와 정의를 행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을 알기에 일상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와 정의를 드러내기를 순종하며 살아가야 한다. 재림의 심판이 확정된 지금,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와 정의로우심이 늘 언약을 깨뜨리는 백성들을 단번에 심판하지 않고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은혜를 안다면 마땅히 사랑과 공의와 정의(인애와 공평과 정의)를 행하기를 기뻐해야 한다.
    
    
*여호와의 말을 버린 백성들은(8:9) 그 땅을 떠나야 했고, 평안하다 평안하다 외치는 이들에 애곡이 찾아왔다. 거짓말을 가르치기까지 한 시대(9:5)는 이제 딸들에게 애곡을 가르치고 이웃에게 애가를 가르쳐야 했다. 평안하다는 그들의 바람과 달리 하나님의 심판은 잠깐 시늉만 내고 끝나지 않는다(8:20). 포로로 끌려간 뒤에도 심판은 이어진다. 자식들 세대까지 이어진다. 심판이 임하는 날은 이스라엘 안에는 안전한 곳이 없을 것이다. 집은 물론이고 궁전 안까지 침략당한다. 아이들은 거리에서, 청년들은 광야에서 칼에 쓰러질 것이다. 죽은 자들이 너무 많아 들판에 거름처럼 내던져지고, 쓸모없는 볏단처럼 버려질 것이다.
    
    
*심판의 날에는 지혜와 용맹함(권력)과 소유(부함)는 자랑거리가 되지 못한다. 몸에 할례를 받은 흔적이 있다고 해서 저절로 심판이 비껴가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피할 수 없다. 마음의 할례, 즉 마음은 복종하지 않은 채, 몸만 예배당을 오가는 신앙이 우리를 지켜주지 못한다.
    
*여호와가 누구신지, 그분이 기뻐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진정한 자랑거리가 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구원의 길이고 생명의 길이기 때문이다(렘 17:3).
    
*내가 자랑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어떤 것에 자랑스러움을 느끼나? 유다 백성들과 다름없이 지혜, 용맹(권력), 부함(소유)에 자랑거리를 두고 있지는 않은가? 나의 하나님의 성품을 세상에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지혜, 용맹함, 부함은 오늘날의 우리 언어로는 출신학교, 재산, 사회적 지위, 자식, 여가생활, 외모, 재력 등이 아닐까? 나는 혹시 이런 자랑거리들(?) 때문에 자존감이 낮아지지는 않는가?
    
 
*할례는 언약의 표징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유다 백성들의 어리석음이 나의 어리석음이 되지 않기를 분별해야 하겠다. 겉으로 드러난 흔적은 그 자체만으로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한다. 마음의 변화, 구체적인 일상의 변화가 하나님의 새 백성, 새 사람임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유다 백성들은 자신들이 자랑거리로 삼은 것들로 인해 심판받았다. 지혜, 용맹, 부함, 할례…. 하나님을 떠난 지혜와 용맹과 부함은 교만에 이르게 했고, 아무리 육체의 흔적인 할례를 지니고 있다고 한들,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으로 순종하지 않은 형식적 순종은 심판의 대상일 뿐인 것을 처절한 애가를 부를 때에야, 그들의 귓전에 울릴 때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때는 이미 늦었다.
    
*자랑하고 싶은 자랑거리들이 결국 멸망을 불러온 심판거리가 되어 버렸다.
    
 
    
*주님, 나의 헛된 자랑거리가 나를 심판의 자리로 밀어넣지 못하도록 늘 마음으로 말씀을 순종하며 살겠습니다. 일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펼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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