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피할 수 없지만 부디 우리에게 너그러이, 부디 이방에게 심판을 [렘 10:17-25]
 – 2023년 07월 28일
– 2023년 07월 28일 –
예루살렘의 멸망은 확정됐다. 여호와께서 극적으로 구해주시리라 기대한다면 착각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멸망과 유배를 결정하셨기에 다른 선택은 없다. 유다는 이제 필요한 물품을 미리 싸놓고 유배를 준비해야 한다. 형식적으로는 예레미야가 이 상황 속에서 멸망의 시대를 살 때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 지를 가르쳐 준다.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해야 하나, 그 앞서 사람이 자기 운명의 주인이 아님을 인정하고 절망적인 현실을 하나님의 공의에 따른 징계로 받아들여 조건 없는 용서와 구원을 간구하지 못하고 그저 진노로 다뤄주지 않기만을 기도한다.
 
여호와의 멸망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다. 여호와의 진노는 시위를 떠난 활처럼 오로지 과녁을 향해 나아갈 뿐이다. 이스라엘은 포로로 끌려갈 것이 확정되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앞으로 일어날 멸망에 대해 탄식하며 임박한 미래 사건이 현재 사건이 눈앞에 닥친 것처럼 묘사한다. 동시에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진노를 거둬주시기를 기도하지는 않지만, 이스라엘을 끝까지 붙들어 주시기를 간구한다.
 
 
 
1.피할 수 없는 멸망(17-22절)
본문이 묘사하는 처음 두 구절은 포위당한 예루살렘과 유다에게 주는 말씀이다. 역사적인 배경으로는 주전 597년 제1차 유배, 또는 주전 587년 제2차 유배를 짐작할 수 있다. “에워싸인 가운데 앉은 자”는 예루살렘이 적들에게 포위당한 것을 묘사한다. 그들에게서 벗어날 길이 없음을 일깨운다. 항복하든지, 함락당하든지 적들에게 서로 잡히는 것은 정해진 사실이다. 그래서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유배를 대비한 짐을 꾸려 놓으면 조금의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17절).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번에는 이 땅에 사는 백성을 먼 곳으로 내던지고, 그들이 자신의 죄를 깨달아 알도록, 내가 직접 그들에게 고통을 주겠다..” 하셨기 때문이다.” (새번역_18절) 하나님께서 확정하신 심판이기에 피할 길이 없고 도움을 구할 수도 없다. 멸망을 맞이해야 한다.
 
19~20절은 이미 포위가 끝나고 유배지로 쫓겨나는 장면을 내다본다. 앞서 선포한 위협이 현실이 된 것이다. 예루살렘을 대변하는 “나”는 이 처참한 현실을 탄식하며 고백한다. “아! 우리가 이렇게 심하게 다쳤으니, 우리의 상처가 나을 것 같지 않구나. 이런 고통쯤은 참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새번역_19절) 모든 것이 절망적이다(20절). 장막이 부서졌고, 장막 줄도 끊어졌다. 자녀들도 모두 떠나가고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 아무도 없는 예루살렘의 재건은 불가능하다.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 주민도 모두 떠나가거나 사로잡혀 갔다. 폐허가 된 예루살렘의 회복을 소망할 수 있는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다.
 
21~22절은 이와 같은 참담한 멸망의 심판이 임하게 된 원인을 밝힌다. “백성의 목자들이 미련하여, 주님께서 인도해 주시기를 간구하지 않더니, 일이 이렇듯 뒤틀려서, 우리 백성이 모두 흩어지게 되었구나!” (새번역_21절) 양 떼가 흩어지게 된 것을 목자에게 묻는다.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따라 멸망의 길로 인도했다는 것이다. 지도자들의 어리석음과 불순종에 백성들도 호응하였다. 백성들은 “여호와를 찾지 않았다.” 이 와중에 이와 같은 완악한 도성 예루살렘을 향해 북녘에서부터 몰려 내려오는 요란한 소리, 즉 패망의 소리를 듣지 않는다.
 
 
 
2.간구(23-25절)
19-20절의 “나”는 예루살렘이다. 그러나 23-25절의 나는 “예레미야”이다. 예레미야는 확정된 심판을 듣고 바라보면서 상심하고 좌절만 하고 있지 않는다. 그래도 기도의 끈을 놓지 않는다. 예레미야는 자기 기도를 통해 심판당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려야 할 기도이며 태도이다. 심판을 당한 이스라엘 백성이 드려야 할 기도이다. 예레미야는 이 기도를 통해 멸망의 시대를 사는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할지를 가르쳐 준다.
 
먼저 예레미야는 지혜문학의 가르침을 소개한다. “주님, 사람이 자기 운명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제가 이제 깨달았습니다. 아무도 자기 생명을 조종하지 못한다는 것도, 제가 이제 알았습니다.” (새번역_23절, 잠 16:9; 20:24) 이스라엘은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여호와만을 유일한 결정권자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결정권자를 찾지 않는 어리석음(21절)은 자신을 최고 결정권자로 간주한 유다 백성의 교만에서 비롯된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계획, 이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스스로 능력을 의지했다. 그러나 그 교만의 대가는 멸망의 늪을 온전히 품게 했다. 이스라엘의 심판을 결정하시고 이를 그대로 실행하신 분께서 앞으로의 운명도 결정하신다. 이를 인정한다면 가장 먼저 확정된 심판의 선언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를 받아들이면 이스라엘은 멸망과 유배를 하나의 공의로운 징계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미래를 철저하게 하나님께 의탁해야 한다. 과거의 극복 없이 새로운 시작은 없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완전히 소멸할 수밖에 없기에 “너그러이(미쉬파트_공의)” 채찍질해 주시기를 간구한다.
 
*주님의 자비와 공의를 함께 구한다. 인간은 스스로 자기 길을 지도할 수 없다고 고백하며 하나님만 가장 좋은 길을 아시고 인도하실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자기 눈에 옳은 대로 인생의 주인 노릇을 했던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것은 마땅하다. 또 공의로운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이런 상황에서 살길은 주의 자비뿐이다. 당당한 요구가 아니라 예외적으로, 이번만이라도 변심을 촉구하는 간구이다.
 
*하나님께서 먼저 돌아서 주시는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죽어 마땅한 죄인들이기 때문이다.
 
 
반면, 주의 이름으로 기도할 줄 모르는 열방을 향하여서는 심판을 간구한다. 사적인 감정이기보다, 비록 하나님 심판의 도구로 쓰임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능멸한 민족들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심판해 달라고 간구한다. “주님의 진노는 주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백성에게 쏟으십시오.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사람들에게 쏟으십시오. 그들이 야곱 자손을 삼켜 버렸습니다. 삼켜서 아주 없애고, 그 거처까지도 황무지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새번역_25절)
 
 
 
나는?
*내 백성을 내던지리라! 충격적인 선언이다. 자기 백성을 이방 땅으로 옮기시겠다는 것이다. 애굽에서 빼내어 가나안 땅에 심으신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사랑하고 소중한 보물처럼 여기고 세상 앞에 제사장 나라를 삼은 이스라엘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망각하고 소명을 배반한 이스라엘이 자초한 심판이다. 자기 악행을 깨닫지 못할 만큼 완악한 백성임을 아시기에 멸망을 불러오셨다.
 
*주님께서 말씀 한마디 하시면 그간 하나님 없이 쌓아 놓은 모든 짐을 놔두고 도망하듯 떠나야 한다. 이런 삶이 되면 안 된다.
 
*깨닫게 하시려고 짐을 꾸려 떠나게 될 때를 준비하라 하신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결코 자기 백성을 버리시지 않는다. 사람들이 어리석어서 건강하고 평안하면 하나님을 잊기 쉽다. 죽음의 문턱에 이르는 고통을 당하고서야 하나님을 찾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지금 내가 당하는 고통은 나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깨닫게 하시려는 분명한 뜻이 있다.
 
 
*이스라엘이 이 지경이 되도록 목자들이 앞장서서 죄를 범하였고 백성들을 오도했음을 고발한다. 목자들은 우상숭배와 거짓을 확산하는 데 앞장섰다. 여호와의 거처가 들짐승의 거처가 될 때까지 자기 배와 자기 명성만 관리하고 자기 자리만 연연했다. 그러니 그들의 양들이 다 흩어지게 된 것이다.
 
*파멸에 이르게 된 것은 지도자들의 책임이 크다. 어리석은 지도자는 하나님의 뜻을 찾지도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르지도 않는다. 나는 주님의 뒤를 따르는 지도자일까? 어리석은 지도자일까?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가는 사역자이기를 다져본다.
 
 
*하나님의 징계는 달게 받겠다고 고백한다. 백성들에게 내리신 징벌이 공의롭다고 인정한다. 그런데도 자비를 구한다. 징계의 시간 속에서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성품을 기대어 용서하여 주시기를 구해야 한다.
 
*열방에 하나님의 분노를 부으시기를 구하는 것은 유다 백성들이 포로에서 풀려나 다시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을 암시한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에 대한 확신을 포기하면 안 된다. 그 사랑이 구원과 회복의 은혜를 소망하게 한다.
 
 
 
*주님, 피할 수 없는 주님의 진노의 심판중에라도 “너그러이” 채찍질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주님, 결국 열방을 심판하시는 것은 주님의 백성이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을 소망하게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의 변치 않는 사랑하여 주심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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