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이 언약의 말(들) [렘 11:1-17]
 – 2023년 07월 29일
– 2023년 07월 29일 –

언약의 말씀을 통해 유다 백성 죄악의 본질을 말씀하신다. 그들이 여호와의 징계를 받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선명하게 밝혀주신다. 유다 백성들은 언약을 깨뜨린 자들이다. 이스라엘이 언약 백성이라는 전통은 자랑스러운 것이지만, 그 전통만으로 언약 백성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언약 백성은 여호와의 모든 명령을 실천할 때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고 유다 백성은 여호와의 백성이 된다.

 

 

 

1.언약의 말(1~8절)

11장은 “여호와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이라 이르시되”로 시작한다. 이 문장은 예레미야에서 본문을 포함하여 5회 사용된다(7:1; 18:1; 11:1; 21:1; 30:1). 이를 근거로 11장부터 17장까지의 대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표현을 통해 단락 안의 다양한 말씀들은 예레미야를 통해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상기시킨다.

 

1~5절까지 “너희”에게 주는 권면의 말씀이다. “이 언약의 말(들)”이라는 표현은 4회(1, 3, 6, 8절) 등장하고 그 내용을 달리 기록하지 않음으로 “너희”가 잘 알고 있음을 전제한다. 이 언약의 말은 출애굽 때 맺은 언약이므로 “시내산 언약”을 가리킨다. “말(들)”은 언약을 체결하면서 주어진 율법 또는 규정이므로 십계명으로 집약된다.

 

또 “들음”은 총 9회 사용된다. 단지 청각적인 들음의 넘어 실천적 순종까지 포함된 개념으로 사용된다. 특히 6절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말로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선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 언약의 말을 듣고 지키라”라고 말씀하시므로 중요한 것이 언약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 곧 언약 규정을 준수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이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되 이 언약의 말을 따르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 (3절) 와 같이 분명하게 저주를 경고하시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유다 백성은 이전 세대의 지속적인 악한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전 세대가 불순종으로 저주받았다면, 지금은 “이 언약의 말”을 따르지 않았기에 저주를 피할 수 없다. 심판은 필연이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을 판단하는 근거는 “언약”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 맘대로가 아니라 언약을 따라 살아야 할 존재다. 그 언약의 조건에 귀를 기울이고 지킬 때 가장 큰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속하는 올무가 아니다.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좋은 선물이다. 언약을 어기면서 저주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

 

*언약을 체결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구원이 있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구원을 위해 이스라엘에 자격을 요구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친히 그 약속을 지키신 것뿐이다. 이스라엘은 다만 바로의 종이 아니라 너무도 명백하게 온 땅의 참 하나님으로 증명된 여호와의 보호와 공급과 인도를 따라 살기로 작정하면 됐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옳다고 인정하고 따르는 믿음만 요청하셨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요청을 외면했다.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명령에 순종하는 이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 있다. 이것은 어려운 요구가 아니었다(신 30:11, 14). 은혜를 은혜로 인정하라는 것이었고, 모든 일이 하나님의 역사임을 인정하라는 것뿐이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해 새벽부터 부지런히 경계하고(7:13), 종 선지자들을 끊임없이 보내어 경계하여(7:25) 말씀을 청종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완고한 자기 마음을 따라 언약을 어겼고 그들이 멸시한 언약이 말하는 대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8절).

 

*하나님을 역사의 주권자로 인정하고 삶으로 고백하며 살아내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은 없다. 지금의 심판은 언약에 대한 불순종이 가져온 저주였다.

 

 

 

2.언약파기와 피할 수 없는 재앙(9-17절)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반역했다. 언약의 규정을 따르지 않고 우상들을 섬기면서 언약을 깨뜨렸다. 그들은 언약에 따른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을 거절했다. 그 결과 언약을 파기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언약의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보호와 구원을 거절한 결과는 치명적이다.

 

불순종의 완악함에 있어서 유다 백성들은 조상들보다 더했다. 그들은 하나님께 “반역(케쉐르)”을 꾀했다. 언약을 통해 하나님 백성이 된 이스라엘이 자기 하나님의 통치에 반기를 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도 자기들의 옛 조상이 저지른 죄악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그 조상이 나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다른 신들을 쫓아다니면서 섬기더니,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과 유다 백성도, 내가 그들의 조상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였다.”(새번역_10절)라고 하셨다. 우상숭배의 암초에 걸려 결국 난파했다.

 

“자기들의 옛 조상이 저지른 죄악으로”라는 표현은 불순종의 반역에 있어서 현세대는 조상들과 전혀 다르지 않음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의 반역자들에게 “그러므로 나 주가 말한다. 보아라, 그들이 벗어날 수 없는 재앙을, 내가 그들에게 내리겠다. 그들이 나에게 도움을 간청해도, 내가 응답하지 않겠다.” (새번역_11절) 라고 선언하신다.

 

하나님께 도움을 간청하여도 응답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은 치명적인 저주다.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찾을 수 있는 길이 없어진 것이다. 예레미야에게 중보기도도 금지하셨다(14절). 제사도 그 기능이 상실됐다(15절). 이제는 여호와께서 내리시는 재앙을 그대로 받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시면 그들이 섬기는 우상들에게 달려가겠지만 “그 신들이 그 고난 가운데서 절대로 그들을 구원하지 못한다”(12절) 고 말씀하신다. 재앙이 임했을 때 우상의 실체는 확실하게 드러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심히 향을 피우고 섬긴 이방 신들이 진짜 신이라면 여호와께서 내리신 재앙 때문에 울부짖는 자들을 구원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수치스러운 물건”에 불과한 우상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수치”밖에 없다. 수치가 본질인 우상을 섬기면 당연히 수치밖에 받을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조상들의 죄였던 우상숭배가 현재 유다 백성들의 죄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려 주신다. “유다 사람들아, 너희가 섬기는 신들은 너희가 사는 성읍 수만큼이나 많고, 너희가 바알에게 분향하려고 세운 그 부끄러운 제단은 예루살렘의 골목길 수만큼이나 많구나!” (새번역_13절)

 

 

*유다와 예루살렘이 우상들에게 점령당했다. 참담하게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 가운데서 “이방신”처럼 되어 버렸다. 무참하게 그 우상들 안에 함께 거하든지, 유다와 예루살렘 거리에 가득 찬 우상들을 심판하시든지 무엇이든지 하셔야 했다. “내 목소리를 청종하라”는 여호와의 목소리가 무색하셨기 때문에 언약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반역을 심판하시기로 하셨다.

 

 

*중보는 예언자의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에게 선포하는 중요한 사역과 함께 때로는 백성 편에서 하나님께 간구했다. 모세, 사무엘 등 탁월한 지도자들의 공통점은 탁월한 중보기도자였다. 이들은 모두 중보기도를 통해 여호와의 진노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할 수 있었다. 북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 앞에 중보기도 한 아모스의 헌신은 일시적으로 심판을 연기할 수 있을 정도였다(암 7:2-3, 5-6).

 

*그런데 예레미야는 하나님으로부터 중보기도 금지 명령을 받았다. “예레미야야, 너는 이런 백성을 보살펴 달라고 나에게 기도하지 말아라. 너는, 그들을 도와 달라고 나에게 호소하거나 간구하지 말아라. 그들이 재앙을 당할 때, 네가 나에게 부르짖어도, 내가 들어주지 않겠다.” (새번역_14절) 이미 하나님께서 “피할 수 없는 재앙”을 결정하시고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을 선언하셨기 때문이다(11절).

 

 

이제 피할 수 없는 재앙만 남았다. 이스라엘이 의지하는 제사제도와 성전 중심의 신학적인 전통도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 의지 앞에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다. 그들은 “거룩한 제물 고기”로 재앙을 비켜 갈 수 있다고 착각한다. “이 언약의 말”에 순종함 없는 제사는 사람의 행사일 뿐이다. “내가 사랑하는 유다가 악한 음모나 꾸미더니, 내 성전에 들어와서 어쩌자는 것이냐? 살진 짐승을 희생제물로 바친다고 해서, 재난을 피할 수 있겠느냐??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겠느냐?” (새번역_15절)

 

하나님께서 “좋은 열매 맺는 푸른 감람나무(올리브 나무)”로 부르셨던 시절은 지나갔다. “유다야, 한때에 나 주도 너를 ‘잎이 무성하고 열매가 많이 달린 올리브 나무’라고 불렀으나, 이제는 요란한 천둥소리와 함께 내가 그 잎을 불로 사르고, 그 가지를 부러뜨리겠다.” (새번역_16절) 한때 “내 백성(4절)”, “나의 사랑하는 자”, “좋은 행실을 맺는 아름답고 푸른 감람나무”로 불렸던 백성을 심판하신다. 탐욕과 우상숭배와 악행을 버리지 않은 백성은 성전을 밟을 권리도 예물과 예배를 바칠 자격이 없다.

 

*기도가 다 상달되는 것이 아니고 예배와 예물이 다 주께 기쁨이 되는 것도 아니며, 예배당이 다 주님의 임재 처소가 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언약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시내산에서 맺어진 것으로, 율법을 낭독함으로써 정기적으로 갱신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달랐다. 도끼가 유다의 뿌리에 놓인 이유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반역했기 때문이다. 심판이 선언되고 그때가 가까워져도 그들은 하나님을 찾을 생각을 하지 않고 더욱더 우상을 찾을 뿐이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기도와 부르짖음을 거절하신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절망뿐이다. 나의 기도는 과연 하나님께서 들을 만하실까?

 

*감람나무는 유다가 마땅히 누려야 할 풍성함을 상징한다. 하지만 가지가 꺾이고 불에 타 없어진다고 선언하셨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당연하게 여기면 안 된다. 열매를 내지 못한 나무는 찍혀 불에 던져진다. 순종이 없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찍혀 불에 던져진다.

 

 

*언약에는 사랑, 역사, 책임, 기대가 있다. 이스라엘은 언약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 그의 구속의 역사를 기억한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의 책임을 다해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언약 백성이라는 정체성은 언약 백성으로 살아내는 의무와 책임을 수반한다. 땅을 차지하고 풍성한 소산물을 소유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차지한 그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사는 것이다.

 

*더 이상 기도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선언이 두렵기 그지없다. 오늘날의 상황이 예레미야의 때와 다르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심판과 재앙의 때는 아무리 부르짖어도 들으시지 않는다. 성전을 출입하는 것도 정성스러운 제물도 소용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그 완악함이 기도마저 무력화시켰다. 기도가 하나님과의 건강한 관계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임을 다시 확인하고 결심해 본다.

 

*처음에는 비밀히 했던 우상숭배였지만, 예레미야의 때는 만연하다 못해 넘쳤다. 비밀스럽게 행하던 것이 이제는 성읍 전역에 만연해졌다. 자기의 탐욕의 크기만큼 우상들이 많았지만, 그만큼 백성들의 마음을 온전히 채울 수 없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우상은 평생 나를 지켜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나, 오히려 우리의 생명을 옭아매는 올가미가 된다.

 

 

 

*주님, 언약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내가 못미덥습니다.

*주님, 이 언약의 말을 얼마나 마음을 다해 지키려고 하는지 되돌아 보고 싶습니다.

*주님, 기도를 그치라는 말씀이 두렵습니다. 나의 삶은 기도가 그쳐지지 않도록 바르게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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