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고난과 좌절이라는 (삶의) 동반자, 그러나 함께하시는 하나님 [렘 11:18:12:6]
 – 2023년 07월 30일
– 2023년 07월 30일 –
11~20장은 예언자의 “탄식”이라는 주제가 중요하게 나온다. 본문은 그 첫 번째 단락이다. 언약을 깨뜨린 이스라엘을 여호와가 심판하겠다고 선언한 후 예언자의 첫 반응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자에게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11:14)고 했지만, 여호와와 백성 사이에 선 예레미야는 백성을 위하여 탄식하며 간구한다. 한편으로는 백성을 위해 간구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한편 유다 백성은 여호와의 심판을 선포하는 예레미야에게 맞서며 그를 제거할 음모를 꾸민다. 홀로 남겨진 예레미야는 의로우신 재판관(여호와)께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며 도움을 간구한다.
 
언약을 깨뜨렸기에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선포하면서 이스라엘의 신학적인 전통을 부정한(11:1-17) 예레미야에 대해 사람들이 침묵하지 않았다. 이들의 눈에는 언약 백성에게 저주를 선포한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모독한 자로 저주받아야 마땅한 자였다. 언약을 교리와 특권으로 이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하는 자였다. 이에 고향 아나돗 사람들이 행동에 나서 예레미야를 제거할 음모를 꾸몄다(11:18-21). 그러나 백성들의 이런 행동은 예레미야를 보낸 하나님께 대드는 행위이기도 했다(12:8). 언약의 파기를 고발하는 예언자를 “살아 있는 자의 낯선 땅에서 끊어서 그의 이름이 다시 기억되지 못하게” 하려는(11:9) 이스라엘의 완악함은 하나님의 심판을 되돌릴 수 없게 확정 짓는다(12:7-13).
 
 
 
18~23절 예레미야의 좌절과 탄식과 여호와의 응답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알려 주심으로 자기 고향 아나돗 사람들이 그를 제거할 음모를 꾸몄다 사실을 알게 된다(18절). 예레미야는 인지하지 못했으나 렘 1:8에서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라”라고 약속한 대로 함께 하셨다. 예레미야가 받은 충격은 매우 컸다. 오죽하면 “주인의 손에 이끌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 양(19절)”으로 자신을 비유할 정도였다. “순한(알루프)”으로 번역된 단어는 “신뢰하는(사람)”, 또는 “잘 길들여진”을 의미한다. 제 운명도 모르고 신뢰하는 주인의 손에 이끌려 도살장으로 가는 어린 양처럼 자신의 주변 사람들이 그런 음모를 꾸미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더구나 이 음모는 “나무와 열매를 함께 박멸하자 그를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끊어서 그의 이름이 다시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고 모의할 정도로 심각했다. 그들은 예레미야의 생명뿐 아니라 출생 전부터 예언자로 성별된 그의 존재감도 없애려고 했다.
 
그런데 아나돗 사람들은 왜 그렇게 했을까? 먼저 예레미야가 요시야의 종교개혁과 맞물려 그것을 지지했다면, 아나돗 사람들의 눈 밖에 날 수밖에 없었다. 요시야는 지역 성소를 파괴하고 지방의 제사장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직무를 수행할 것을 요구했다(왕하 23:8-9). 제사장들의 생계 수단이 잃게 된 것이다. 이는 각 지방에 흩어져 있던 제사장들에게 심각한 분노를 유발하게 하는 것이었다. 왕의 개혁정책에 대한 예레미야의 지지는 가문의 명예와 충성에 대한 위험한 배신으로 그렇다고 여기었을 것이다. 여기에 더 분명한 이유가 있는데, 예레미야의 예언 내용이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세계관의 핵심 내용을 체계적으로 공격하였다. “성전과 땅, 기록된 율법, 할례, 여호와와 맺은 언약”에 대한 백성들의 맹목적인 신뢰를 깨뜨리는 데 주력했다. 예레미야는 이와 같은 것들이 이제 곧 이루어질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백성들을 지켜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유다 백성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를 잡은 오랜 전통과 깊은 신학적 무게와 같은 소중하고 근본적인 신념을 공격한 것이다. 그래서 21절에서 “….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와 같이 신명기 13장의 관점에서 예레미야를 거짓 선지자로 간주했을 것이다. 거짓 선지자는 반드시 뽑아내 제거되어야만 한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진실은 정반대였다. 예레미야는 진실로 주님의 말씀을 하고 있었다(렘 1:9). 그렇다면 오히려 유다 백성들은 신 18:19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심판받아 마땅하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전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생명을 노린 아나돗 사람들에게 멸망의 심판을 선언하신다(22~23절). 아나돗 사람들이라면 예외 없이 모두 재앙에 떨어질 것을 경고하는 것이다.
 
 
 
12:1-6 예레미야의 탄식 질문과 하나님의 응답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하여 질문한다. 특히 “악한 자의 길에 형통하며 (하나님을)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라고 한숨 쉰다.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시기에 불의한 자의 승리와 의로운 자의 고난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음은 딴 곳에 두고 오직 입으로만 섬기는 악인의 승리에서 하나님의 개입을 보았기에 더욱더 심란할 수밖에 없었다.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 이다” (2절).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에 악인이 뿌리를 깊이 내리고 많은 열매를 맺힌 것이 아니냐고 묻는 것이다.
 
신명기의 인과응보의 법칙에 근거하여 의인이 복을 받기에 복을 받은 자는 의인이 되고, 악인이 화를 받기에 화를 당한 자는 악인이 된다. 이것을 예레미야에게 적용하면 “사역의 결실이 없는 예레미야는 복을 받지 못한 자가 되는 것이다. 백성들은 이런 관점으로 예레미야를 하나님께서 보내지 않은 거짓 예언자가 되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간절히 하나님께 호소한다. 그는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열매가 아니라 마음(중심)을 살펴 판단하시는 분임을 알기에 악인의 징벌을 요청한다(3절). 또 악인들이 파국적인 재앙에 직면하여도 하나님을 찾지 않음을 보면서 “마음은 멀고 입만 가까운 자들의 삶에는 하나님의 자리가 없음을 탄식한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의 탄식을 책망이 말씀으로 응답하신다(5절). “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강 물이 넘칠 때는 어찌하겠느냐?” 걷는 자의 뒤를 따라가기도 어려워한다면 질주하는 말과 어떻게 겨루어 이길 수 있겠는가? 안전한 곳에만 있으려 한다면 맹수가 우글거리는 요단의 울창한 숲에서는 어떻게 하려느냐? 지금의 어려움은 사소한 것인데 이처럼 불평불만을 토로한다면 앞으로 있을 심각한 위험과 박해는 도대체 어떻게 이겨낼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질문에 대한 대답보다 하나님 자신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명령하는 대로 따를 것을 강권하신다. 고향뿐 아니라 형제와 아버지의 집에서도 버림을 당하고(6절) 고아와 같은 신세가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자를 맞이하는 것은 폭력과 음모와 박해뿐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정의를 믿는다. 하지만 왜 정의가 그렇게 오랫동안 지체되어야 하고, 왜 악한 자들이 악행을 하고도 처벌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번영하도록 허용하시는가? (1~2절). 무엇보다 예레미야가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이 입증되지 않고 있어서 상황은 더 심각하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확신은 예레미야만 확고할 뿐이다. 대부분의 유다 백성,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은 이를 외면하고 오히려 거짓 예언이라며 죽이려고 달려들고 있다. 심지어 고향 사람들이 더욱 앞장서고, 집안사람들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이와 같은 긴급하고 급박한 상황을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가혹하다고 생각한다면, 더 힘든 것은 아직 오지도 않았다”(5~6절)라고 말씀하신다. 실제로 하나님의 심판은 예레미야가 박해받는 생애 후반기에 다가온다.
 
 
 
나는?
-예레미야의 소명과 예루살렘 멸망 사이에는 40년이란 시간이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큰 소리로 말하며 무수한 고난이 그를 덮치고, 선포된 말씀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좌절감이 40년을 채웠다. 하나님의 심판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과 왜 아직 이루어지지 않는가에 대한 마음이 수수로 그의 마음을 좌절해 했을 것이다. 금방 이루어지지 않는 좌절감이 그를 힘들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확신하고 하나님의 공의와 신실하심을 신뢰하며 꿋꿋하게 버틴다. 그런데 아직 더 힘든 것은 오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그가 고행 사람들과 집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목숨의 위협과 회유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미리 알려 주셨다.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이에게 하나님은 늘 이렇게 먼저 일깨우신다. 목적은 분명하다. 사람의 말을 믿지 않고(12:6) 하나님의 말씀만 신뢰하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심판과 진멸의 메시지를 전하므로 필연적으로 받아야 했던 고난과 좌절이 결론되지 않게 하시려고 앞서 일깨워주신다.
 
*힘들겠지만 직면하게 하심으로 하나님만 신뢰하고 의지하도록 도우신다. 우리의 믿음의 걸음이 이와 같이 않은가! 하나님의 도우심은 일깨워주심을 통해 상황을 눈으로 보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만 신뢰하며 걷도록 하신다.
 
 
 
*주님, 하나님의 일깨워주심을 신뢰하며 말씀으로 살겠습니다.
*주님, 사람의 말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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