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유다의 교만에 대한 최후 경고 [렘 13:15-27]
 – 2023년 08월 02일
– 2023년 08월 02일 –
예레미야는 속울음을 참아가며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해 다시 경고한다. 무엇보다 왕과 왕후에게 이스라엘 권력이 몰락할 것에 대해 직접 선포한다. 이스라엘은 왕권이 무너질 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포로로 끌려갈 것이다. 또한 그들의 동맹국이었던 대 제국은 적국으로 변하여 그들을 침공할 것을 선포한다. 예레미야의 이 선포는 주전 600년 이후 격변하는 이스라엘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예레미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해 날을 세워 비판한다. 그의 선포를 들은 이스라엘은 회개할 가능성이 있을까? 그렇지 않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선포를 멈출 수 없다.
 
 
 
1.마지막 경고와 내려진 영광의 면류관(15-19절)
여호와의 심판 의지가 너무 확고하다. 바뀔 가능성은 없다. 고로 멸망을 피할 길은 없어졌다. 예레미야는 유다와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잔을 마시도록 권면하는 일만 남았다. 모든 것이 끝날 상황,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절대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 예견되어도 예레미야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멸망 앞에 놓인 자기 민족의 운명에 눈 감지 않고 절박하고 간절하게 호소하며 경고한다. “너희는 들을지어다, 귀를 기울일지어다, 교만하지 말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라.” (15절)
 
안타깝게도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은 듣지 않는다. 심판은 이미 시작되었다.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 “너희는 주님께서 날을 어두워지게 하시기 전에, 너희가 어두운 산속에서 실족하기 전에, 주 너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그때에는 너희가 빛을 고대해도, 주님은 빛을 어둠과 흑암으로 바꾸어 놓으실 것이다.” (새번역_16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은 심판을 선포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라는 말과 같다. 심판을 선포하시는 여호와의 말씀 앞에 낮은 자세로 돌아오는 것이 곧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유다와 예루살렘이 교만 때문에 마지막 경고를 듣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눈물과 통곡만 남을 뿐이다. 아무도 없는 은밀한 곳에서 홀로 비통하게 눈물을 흘리며 통곡할 것이다(17절).
 
여호와의 심판이 현실이 된다. 구원의 빛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심판의 어둠이 임한다. 예루살렘에서 네겝까지 전 지역을 흑암이 덮친다. 여호와께서 보내신 것이기에 누구도 벗어나지 못한다. 왕과 왕후는 “영광의 면류관”을 벗고 보좌에서 내려온다(18절). 네겝의 성읍들은 포위되고 주민들은 유배당한다(19절). 마지막까지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은 예루살렘과 유다는 교만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러야 한다.
 
*이 선언은 왕과 왕후도 왕권을 빼앗기고 평민이 되어 유다 백성과 함께 바벨론으로 끌려갈 것을 가리킨다. 이는 여호야긴 왕과 태후 느후스다가 당한 일을 미리 언급하고 있는 듯하다(왕하 24:6-17, 주전 597년). 교만한 유다의 불순종에 예레미야는 통곡할 것이다. 그 통곡은 자식을 다시 얻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눈물이다. 늑대가 자기 양 떼를 물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 목자의 눈물이다. 확정된 심판, 실행된 심판 날에 하나님께 피하지 않으면 사람은 피할 곳이 없다. 하나님께서 끌어내리시기 전에 스스로 왕위에서 내려와 겸손하게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야 한다.
 
 
 
3.멸망을 확정 지은 예루살렘의 죄악(20-27절)
본 단락은 화자에 따라 20-22절(예레미야), 23-24절, 25-27절(여호와)로 나뉜다. 하지만 죄로 인한 예루살렘의 멸망이라는 주제는 공통적이다.
 
유다를 향하고 있던 예레미야의 시선이 북쪽으로 옮겨진다. 그는 북방에서 내려온 적들에 의해 양 떼가 약탈당하는 것을 보고 “네게 맡겼던 양 떼, 네 아름다운 양 떼는 어디 있느냐?”고 외친다(19-20절). 이 양 떼는 17절에서 밝힌 “여호와의 양 떼”이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맡긴 양 떼가 굶주린 들짐승에게 약탈당할 위기에 처했다. 예루살렘은 백성을 돌보고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어야 할 책임이 있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예루살렘은 무능하고 무책임한 목자였다. 양 떼의 주인보다(하나님 보다) 주변의 친구들을 더 좋아했다. 예루살렘은 여호와께 의존하여 양 떼를 돌보지 않고 주변 나라들과 정치적 동맹에서 살길을 찾았다. 예루살렘은 여호와의 심판을 받은 후에야 자신들의 치명적인 어리석음 깨달았다.
 
여호와는 예루살렘이 친구 삼았던 자를 예루살렘 위에 우두머리로 세우실 것이다(21절 하). 이 비정한 모습에 몸부림을 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예루살렘은 산고를 겪는 여인처럼 고통에 사로 잡힐 뿐이다(21절 하). 예루살렘의 진통은 새 생명의 출생을 위한 것이 아니라 멸망의 출생을 위한 것이어서 더욱더 절망적이다. 그들은 적의 공격을 피할 길이 없고 막아낼 능력도 없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내게 닥쳤는고” 절망해 보지만 운명을 되돌리기에는 모든 것이 늦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된 이유를 매우 간결하게 밝힌다. “그때 너는 ‘어찌하여 내가 이런 신세가 되었는가??’ 하고 물을 것이다. 내가 대답하마. 네 치마가 벗겨지고 네 몸이 폭행당한 것은, 바로 네가 저지른 많은 죄악 때문이다.” (새번역_22절). 범죄의 결과, 예루살렘은 멸망하고 수치를 당하게 된다. 그 범죄는 27절에 따르면 그들 가운데 만연한 우상숭배였다.
 
 
유다 백성들은 아우성 칠 수밖에 없다. 예루살렘은 여호와께서 택하신 거룩한 도성이 아닌가?, 다윗 왕조와 여호와의 성전이 있지 않는가?, 유다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능욕을 당한단 말인가?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속담을 인용하여 대답하신다. “에티오피아 사람이 자기의 피부 색깔을 바꿀 수 있느냐? 표범이 자기의 반점들을 다르게 바꿀 수 있느냐? 만약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죄악에 익숙해진 너희도 선을 행할 수가 있을 것이다.” (새번역_23절) 즉, 에티오피아(구스) 사람이 검은 피부를 바꿀 수 없는 것처럼, 또한 표범이 얼룩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예루살렘 사람들도 악한 습성을 바꿀 수 없다.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회개를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으므로 그들을 북방의 적에게 넘겨 능욕당하게 하신다.
 
마음을 완전히 결심하신 여호와께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사막의 바람에 나부끼는 검불처럼, 산산이 흩어 놓겠다.”(새번역_24절)라고 결정하신다. 여호와께서 보내신 심판의 바람에 휩쓸려 사방으로 쫓겨가게 된다. 예루살렘이 여호와를 잊고 ‘거짓’을 신뢰하기에 ‘산고를 겪는 여인’과 ‘사막 바람에 불려 가는 검불’의 운명을 예루살렘의 몫으로 정하신다(25절).
 
여호와를 잊고 사는 것은 일상이었다. 그들이 다시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기대처럼 된다. 여호와를 신뢰하는 대신 거짓 우상을 신뢰한다. “거짓”은 다양하게 사용되는 단어이지만, 본문에서는 27절에서 보여주듯 “우상”을 가리킨다. 너무 오래전부터 잊어서 “그날 수는 셀 수”가 없을 지경이 되었다(2:32).
 
여호와를 신뢰해야 할 예루살렘 사람들이다. 그런데 거짓 우상을 신뢰한다. 예루살렘은 “들의 작은 산 위에서” 우상과 간음을 즐기며 욕정을 발산한다(27절 상). 그들의 우상숭배는 일부 사람들만의 은밀한 것이 아니라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자행되는 일상이었다. 오래전에 여호와를 잊은 예루살렘은 우상들로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이렇게 우상들과 간음을 즐긴 예루살렘에 상응하는 심판이 선고된다. “그래서 내가 너의 치마를 얼굴까지 들어 올려서, 너의 수치가 드러나게 하겠다.” (새번역_26절) 실제로 수치를 모르고 음행을 즐긴 예루살렘은 점령군 앞에서 자신들의 수치를 드러내고 능욕당한다. “북방에서 오는 자들”에 의해 예루살렘의 멸망은 표면적으로 정치적인 사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호와의 심판으로 이루어진 사건이다.
 
*신 8:19이 현실이 되었다. “내가 오늘 당신들에게 다짐합니다. 당신들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참으로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가서 그들을 섬기며 절한다면, 당신들은 반드시 멸망할 것입니다.” (새번역_19절)
 
 
 
나는?
-친구를 압제자로 두게 될 유다이다. 유다의 친구를 유다를 다스리는 자로 바꾸실 것이다. 앗수르에 대항하려고 바벨론의 손을 잡았으나 결국 그 바벨론의 노예가 되고 말 것이다. 유다에게 맡긴 아름다운 양떼가 그들에게 살육당하고 붙들려 가게 하실 것이다.
 
-깨닫는 능력을 잃어버린 유다였다. 백성들은 산고의 고통 같은 심판을 당하고 갖은 수치를 겪으면서도 그 이유를 모를 만큼 영적으로 둔감했다. 차라리 피부색을 바꾸고 표범의 반점을 변하게 하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예레미야의 눈에는 그만큼 악을 행하는데 능숙하고 익숙한 이 백성을 주께로 향하게 하는 일은 불가능해 보였다.
 
*악인 줄도 모른 채 악을 행하고 수치를 뒤집어쓰고도 자신에게 도취하여 부끄러운 줄 모르는 영적 치사 상태에 이르기 전에, 사막 바람에 흩어질 뿌리 없는 초개가 되기 전에 자신의 실상을 직면해 보는 것은 어떨까?
 
*발정기의 짐승처럼 우상숭배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유다가 다시 정결해질 것이라고 거의 기대하지 않는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을 수치 가운데 두는 일밖에 할 것이 없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대신에 바알(거짓)을 더 신뢰한 유다에게는 심판만이 합당한 몫이요 분깃이라고 하신다. 말씀을 떠난 삶은 우상숭배의 삶이요, 하나님을 망각한 삶이다. 하나님 나라가 아닌 사망을 그 몫으로 받은 것이다.
 
 
*흑암(재앙)이 임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교만하지 말라고 하신다(15-16절).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고도 하신다. 말씀을 듣지 않으면 자기 생각에 갇혀 교만하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보다 제 앞가림하기에만 급급해진다. 요즘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잘 들리는가?
 
*왕족이라도 교만하면 낮추신다(18-19절). 이들은 왕위에 오른 지 3개월 만에 바벨론으로 끌려간 여호야긴과 그의 어머니 느후스다를 가리킨다(왕하 24:6-17). 왕의 지위에 오르면 하나님께 순종하는 기쁨보다 권력의 힘을 더 좋아하게 되기 쉽다. 교만한 권력보다 겸손한 권위이다.
 
*유다가 한 때 친구로 삼았던 자(바벨론)를 유다의 통치자(수령)로 세우신다(20-21절). 이것은 하나님보다 세상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곤경에 처할 때 하나님보다 먼저 찾는 것, 그것이 결국 나의 가시가 되어 나를 얽어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에서 돌이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수치를 드러내신다. 수치를 드러내시기 전에 삶을 정결하게 해야 한다(27절 하).
 
*예레미야는 자신의 경고를 듣지 않으면 민족이 겪을 고초를 생각하며 통곡할 것이라고 한다(17, 27절). 지체의 허물을 지적할 때 이처럼 눈물로 하는가? 비판처럼 쉬운 것은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랑을 포기하면 안 된다.
 
 
 
*주님, 교만한 권력이 아닌 겸손한 권위로 사역하겠습니다.
*주님, 비판은 쉽지만, 사랑하기는 어렵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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