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그래도! [렘 14:1-12]
 – 2023년 08월 03일
– 2023년 08월 03일 –
극심한 가뭄이 예루살렘과 유다 전역을 휩쓴다. 사람뿐만 아니라 들짐승에게도 전면적이고 치명적인 기근이다. 가뭄은 고대 근동 지역에서 빈번하게 발생해왔고 그것은 국가의 흥망성쇠와 연결되기도 했다. 가뭄은 인간만이 아니라, 가축과 들짐승에게도 큰 위협이었다. 파국적인 가뭄에 직면한 “우리” 공동체는 “그래도” 하나님께 나아가 탄식하며 도움을 간구한다.
 
구약성경에는 “기근”과 관련하여 많은 이야기가 등장한다.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간 이야기(창 12장), 이삭과 야곱 역시 기근으로 이방 땅에 거주한 이야기도 있다. 이렇게 빈번한 기근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에는 여호와의 징계로 간주되었다. 열왕기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탄원의 주요 원인으로 나온다(왕상 17장). 본문은 기근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도움을 간구하지만(7~9절), 여호와는 백성의 탄원을 외면하고(10절), 백성을 위해 중보하지 말라고 예언자에게 명령하신다(11절). 여호와께서는 확정된 심판을 멈추지 않으실 것이다. 극심한 가뭄으로 예루살렘의 피해가 막심해지자, 선지자는 하나님께 나아가 탄식하며 도움을 구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중보기도와 제사마저 금지하시고 끝내 심판을 선언하신다.
 
 
 
1.가뭄으로 인한 탄식(부르짖음_1~6절)
가뭄은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고 닥쳤다. 극심한 가뭄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부르짖기만 한다. 가뭄이 들면 가장 타격이 큰 곳은 예루살렘이다. 우기에 비가 오지 않으면 건기를 버틸 수 없다. 얼마나 힘든지, “슬퍼하며…, 애통하니…, 부르짖음이 위로 오르도다.” (2절) 물을 구하지 못해 귀족들이나 농부나 부끄러워 머리를 가린다. (3,4절) “머리를 가린다”라는 표현은 이스라엘이 당할 수치를 묘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기 얼굴을 가림으로 수치 당함을 보이지 않으려는 모습이다.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신분도 가뭄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종은 물을 길어오지 못하고, 농부는 물이 없어 농사를 짓지 못하니 부끄러워한다. 절망을 감추지 않는다. 성의 귀족부터 지방의 농부까지 모든 사람을 절망에 빠뜨린다. 극심한 가뭄은 들짐승에게도 예외는 없다. 암사슴은 갓 낳은 새끼를 버리고, 가뭄에 비교적 잘 견디는 들나귀도 풀과 쉴 곳을 찾지 못해 절망한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니 자연이 신음한다. 만물이 고통스러워한다.
 
 
 
2.선지자의 호소와 하나님의 단호한 거절(7-12절)
예레미야는 이 가뭄을 신학적 재앙으로 해석하며 자신과 백성을 동일시 하며 하나님께 나아갔다. 직면한 가뭄이 “우리”들의 죄 때문임을 전적으로 인정한다. “주님, 비록 우리의 죄악이 우리를 고발하더라도, 주님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선처해 주십시오. 우리는 수없이 반역해서, 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새번역_7절) 어떤 변명도 하지 않는다. 여호와를 수없이 배반한 삶 자체인 백성의 죄를 인정한다. 그런데도 “주님의 이름을 생각하셔서(위하여)”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구한다.
 
왜 “주님의 이름을 생각하셔서(위하여)”라고 간구할까? 그것은 하나님 백성의 고난과 재앙은 이방인들의 눈에는 자기 백성도 지키지 못하는 하나님의 무능력으로 보여지는 그분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반면, 재앙을 겪고 있는 하나님 백성의 구원은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이방인들 가운데 드러내는 사건이다. 이런 인식에서 에스겔은 바벨론 포로의 구원은 여호와의 이름을 위한 사건으로 선포한다(겔 36:22). 또 이스라엘이 죄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위하여)” 도와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 까닭은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소망과 구원자이시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절망하고 있는 이스라엘에 소망이시고, 고난 중에 있는 이스라엘의 구원이시다. 출애굽부터 쭉 이스라엘은 역사와 자연 안에서 여호와를 구원자로 거듭 경험했다. 그렇기에 극심한 가뭄 가운데 있는 “우리” 공동체가 구원의 하나님께 소망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개입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호소한다. “주님은 이스라엘의 희망이십니다. 이스라엘이 환난을 당할 때 구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땅에서 나그네처럼 행하시고, 하룻밤을 묵으러 들른 행인처럼 행하십니까? 어찌하여,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르는 사람처럼 되시고, 구해 줄 힘을 잃은 용사처럼 되셨습니까? 주님, 그래도 주님은 우리 한가운데에 계시고,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백성이 아닙니까? 우리를 그냥 버려두지 마십시오.” (새번역_8~9절)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소망이자 구원자이신 여호와께서 어떻게 그렇게 남이 되셨냐고, 적들의 위력 앞에 용기를 잃고 두려워 떠는 용사가 되셨냐고 탄식한다.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이 아니라 절박하게 부르짖는 문학적인 표현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잠시 유숙하는 나그네와 달리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이시고, 이스라엘은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이다.
 
가장 눈에 띠는 것은 백성들의 죄악인 인정하며 마땅히 심판 받아야 할 것도 받아들이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기억하고 구하는 예레미야의 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래도” 기도하는 것이 가장 든든한 해결책이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의 간구에 응답하신다. 절망스럽게도 예레미야의 간구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 이유를 직접 밝히신다.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들의 발을 멈추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를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 하시고” (10절) 특히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들의 발을 멈추지 아니하므로” 기도를 받지 않으시겠다고 하신다.
 
이스라엘의 죄 고백과 간구는 피상적이고 위선적이어서 진정성이 없다. 죄를 인정하지만, 죄에서 완전히 떠나지 않았다. 단지 입술의 고백에 불과했다. 너무 늦게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한 것이다. 심판이 확정되고 구원의 문은 이미 닫혀 버린 후의 고백과 간구였기에 받아들여질 수 없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기억하시기에 죗값을 치르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 의지는 확고하고 단호하다. 이어 자신과 이스라엘 사이를 이어주는 모든 통로를 폐쇄하신다. 종교적인 제도를 무용지물로 만드신 것이다. 먼저 예레미야에게 중보기도 금지를 명령하신다(11절). 예레미야는 백성들을 위해 ‘복’을 구해서는 안 된다.
 
이어서 “금식”을 금지하신다(12절 상). 금식은 전쟁의 위기, 전염병,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로 공동체가 위험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긍정적 간섭을 구하려고 행하는 제의적 의식이다. 또, 여호와의 제사 효력을 무효화 하신다(12절 하).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여호와께서 받지 않으신다. 이는 충격적이지만 여호와께서 이미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셨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예언자의 중보기도와 금식과 제사가 여호와께서 인정하신 것들이기는 하나 그 자체에 효력과 목적이 있는 절대적인 제도는 아니다. 중보기도와 금식과 제사는 받으시는 하나님의 결정에 따른다. 그렇기에 여호와의 거절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려는 결정이 최종적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징벌을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칼과 기근과 전염병은 재앙 선포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나 실제로 혼합주의에 빠진 이스라엘을 전쟁(칼)으로 심판하신다. 많은 사람이 적의 칼에 죽고, 칼을 피해 살아남은 자들은 기근과 전염병으로 죽게 될 것이다. 누구도 여호와의 심판에서 안전하게 목숨을 구하지 못한다.
 
 
 
나는?
-유다가 하나님을 떠나자 가뭄이 찾아왔다. 인간의 죄가 자신만 아니라 피조물 전체에 고통과 죽음을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어떤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상기후도 이에 해당하지 않을까? 인간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저지른 자연훼손의 죄가 불러온 참상 아닌가? 전 지구촌이 이상기후에 몸살을 앓고 있다. 이제 지구 온난화가 아니라 열대화라는 말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이런 자연의 신음소리는 왜 들려와야만 할까? 자연의 신음 소리가 커질수록 자연의 역습으로 인해 인간의 통곡 소리는 커지고 끊이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이스라엘과 어색한 관계로 돌아서셨다. 하나님이 주인 되시는 땅 가나안에서 마치 나그네처럼 행하신다. 유다 백성이 하나님보다 바알을 주인으로 모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침묵이 시작되었다. 예레미야의 간곡한 간구도 하나님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일말의 소망마저 거두신다. 중보기도, 금식, 제사를 금하라고 명령하신다. 유다 백성들의 “어그러진 길” 위에서 드리는 기도나 금식, 제사가 너무도 역겨우셨기 때문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어떤 중보기도나 금식이나 제사가 하나님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다.
 
-하나님의 구원 의지만큼이나 심판 의지도 단호하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하나님의 의지를 잘 알고 있어야 지킬 수 있다.
 
 
*예레미야는 동족들에게 살해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렇게 동족들은 자신을 죽이려는데, 예레미야는 동족들을 위해 자신의 문제를 다루듯이 하나님의 성품을 의지하여 긍휼과 구원을 호소한다.
 
*하나님의 확정하신 심판이 정당하다고 고백하면서도, 그래도 하나님만이 그 심판 중에서 소망이시고 구원자이신 것도 믿는다. 완전하게 버리신 상황에서도 여전히 백성 중에 거하시고 자기 백성이라는 소유권을 포기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헛된 기대”를 포기하지 않았다. 삶이 막히고 좌절될 때 모든 희망이 끊어졌다고 느낄 때, 희망의 근원,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래도” 기도해야 한다. 심판을 확정하실 만큼 기도조차 들어주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셔도, “그래도”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께 구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섣불리 내가 내 자신을 포기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 심판이 확정되었더라도 구원의 은혜를 준비하고 계시는 분이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주님, 지구가 아픕니다. 지금 열이 많이 납니다. 해열제 좀 안될까요?
*주님, 이미 확정하신 심판이지만, 그래도 구원하실 영혼들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붙잡습니다. 그 “그래도”의 사랑 안에 늘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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