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돌이키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마 [렘 14:13-22]
 – 2023년 08월 04일
– 2023년 08월 04일 –

예레미야는 중보기도를 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체념하지 않았다. 그는 백성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호도 되어 죄를 범했다고 변호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의 변호를 단호히 거절하신다. 구원을 예언한 자나 예언을 받은 자 모두 칼과 기근에 넘겨진다. 심판 계획은 철회하지 않으셨다. 이스라엘의 죄는 그만큼 깊고 견고했다.

 

 

 

1.거짓 예언에 대한 심판(13~16절)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 의지를 알리시고 백성을 위하여 중보 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으나 예레미야는 체념하지 않았다. 그는 백성의 무죄를 주장하거나 일방적인 용서는 구하지 않는다. 대신 백성들이 그처럼 잘못된 길을 가게 된 배경에 초점을 맞춰 용서를 구한다. 백성들은 “확실한 평안”을 선포한 거짓 예언자들에 의해 오도되어 ‘발을 멈추지’ 못한 것이라고 호소한다. 거짓으로 백성들을 선동한 예언자들과 이에 동조한 백성을 죄의 경중에 따라 구분해주실 것을 호소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 의지는 단호하셨다. 거짓 예언자들뿐 아니라 이들의 예언을 추종하는 자들에게도 “칼과 기근”의 심판을 선포하신다(15~16절). 거짓 예언자들을 자기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한 자들로 정죄하신다.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그 예언자들은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고 있다. 나는 그들을 예언자로 보내지도 않았고, 그들에게 명하지도 않았고, 그들에게 말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이 백성에게 예언하는 것은, 거짓된 환상과 허황한 점괘와 그들의 마음에서 꾸며낸 거짓말이다.” (새번역_14절)

 

거짓 예언자들의 거짓 예언은 이들만의 문제가 될 수 없었다. 유다 백성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쳤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펑강을 주셨다면 자신의 행실을 비판적으로 되돌아보고 돌아서야 할 이유가 없어진다. 거짓 예언에 길든 백성들의 귀에 예레미야의 심판 예언이 들릴 리 없다. 백성들은 거짓 예언자들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상황에 절망적으로 탄식하신다. 반역이 심각할수록 심판 또한 철저하게 집행된다. 여호와께서 백성의 악을 심판하시려고 악이 맺은 열매인 “재앙”을 그들 위에 부으시기에 멸망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2.예레미야의 탄식(17~18절)

어떻게 해서든지 파국을 피해 보려고 여호와의 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중재를 시도한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을 덮칠 칼과 기근의 심판에 할 말을 잃고 밤낮 눈물만 흘린다. 하나님께서 단호하게 심판을 결정한 민족이지만, 예레미야의 마음에는 여전히 “내 백성”이었다.

 

전쟁의 참상은 절망적이다. 성 밖의 들에는 적의 칼에 맞아 죽은 자들의 시체가 뒹굴고 양식이 떨어진 세상은 기근으로 병든 자들만 가득할 뿐이다. “성 밖이나 성안이나” 죽음뿐이었다. 개역 개정은 “백성을 잘못된 길로 인도한 예언자와 제사장은 알지 못하는 땅으로 끌려간다. 거짓 구원을 선포한 자들이나 이들의 선포를 따른 자들이나 모두 멸망한다.

 

그러나 아직 여호와가 오직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알고 있는 자들에게 이들의 구원신학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헛된 구원신학이 이스라엘의 패배를 막지 못했다. 이스라엘의 패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더 강한 신에게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예레미야의 깊은 탄식의 한숨이 느껴진다.

 

 

 

3.”우리” 공동체의 간구(19-22절)

칼과 기근에 노출된 ‘우리’ 공동체의 반응은 극심한 가뭄을 겪을 때와 대체로 유사하다. “우리”로 표현되는 유다 백성들은 다시금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개입과 도우심을 간구한다. “주께서 유다를 온전히 버리시나이까 주의 심령이 시온을 싫어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우리를 치시고 치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가 평강을 바라도 좋은 것이 없고 치료받기를 기다리나 두려움만 보나이다.” (새번역_19)

 

 

예레미야의 침묵의 탄식이 이어진다. 하지만 침묵의 탄식만을 채우지 않는다. 다시 여호와께 호소한다. “그러나 주님의 이름을 생각하셔서라도 우리를 박대하지 마시고, 주님의 영광스러운 보좌가 욕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와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언약을 깨뜨리지 말아 주십시오. (행 14:21)” 9절에서 이미 밝힌 것처럼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이오니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와 비슷하다.

 

한편, 백성들은 언약의 의무를 저버리면서도 여호와는 언약의 의무에 신실하실 것을 요구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려 하시는데(10절), ‘우리’는 여호와께서 언약을 기억하시고 구원해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우리’의 탄식과 간구는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고백으로 끝을 맺는다(22절). “이방 사람이 섬기는 허황한 우상들 가운데 비를 내리는 신들이 있습니까? 하늘인들 스스로 소나기를 내려 줄 수가 있습니까? 주 우리의 하나님, 그런 분은 바로 주님이 아니십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주님께만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헛것에 불과한 민족들의 우상이나 하나님의 피조물인 하늘은 능히 비를 내릴 수 없다. 오직 “우리 하나님 여호와”만이 땅에 비를 내려 과실에 열매를 맺게 하신다. 여호와는 비를 내리게 하시는 분이기에 우리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큰 파멸과 중한 상처로 말미암아 망하지 않을 수 있다는 확신하게 된다(17절). 비록 지금의 상처가 치명적이기는 하지만 또한 치료해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결국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시기를 바라며 하나님의 개입을 바라고 있다. 먼저 비와 소나기이겠지만, 궁극적으로 ‘칼과 기근의 재앙에 속히 개입하셔서 해결하여 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나는?

-참 예언과 거짓 예언의 문제는 특히 유다 멸망 직전에 심각했다. 대다수의 거짓 예언자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구원과 평강을 선포하였지만,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유다의 멸망을 선포하였다. 같은 주제에 전혀 반대되는 여호와의 말씀이 선포되었기에 둘 중 하나는 여호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안타깝게도 거짓 예언자들의 예언이 백성들의 선택을 받았고 그 결과 유다는 멸망에 이른다.

 

-여호와께서 거짓 예언자들의 예언이 거짓임을 말씀하시고 그들의 예언을 받은 백성도 같은 운명임을 말씀하셨다. 결국 심판으로 인해 망해가는 유다의 참상을 슬퍼하면서 유다의 죄악을 인정하면서도 주의 이름과 언약에 호소하며 긍휼을 구한다.

 

-더는 가망이 없는 영적 기갈의 시대에도 심판은 없고 확실한 평강만 있을 것이라고 거짓말하는 선지자들을 보면서 슬픔을 가누지 못하는 예레미야다. 죄에 무감각해진 백성들은 그런 말씀을 듣고 위로받고 기쁨과 평안을 누리고 있는 것을 보고 더욱더 슬펐을 것이다.

 

-거짓 선지자가 어찌 그 시대에만 있었겠는가? 오늘 우리의 시대에도 거짓을 말하는 선지자는 넘쳐난다. 죄악이 관영한 시대, 죄의 문제를 선포하여 경각심을 일깨우는 것보다, 여전히 잘되고 있음을 선포하는 감언이설 하는 목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런 목사들의 외침을 분별하지 못하고 받아 누리는 성도들도 마찬가지이다.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을 받은 백성들에게도 칼과 기근이 임한다. “속았다고 핑계할 수 없다”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악을 행하고 있었고 그것을 별것 아닌 것으로 만들어준 선지자들을 환영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하는 말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닐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만큼이나 분별함도 있어야 한다. 순종도 분별도 우리의 책임이다.

 

*”죄”를 죄라고 말하지 않고 용서와 평안만을 전하여 사람들의 마음에 무책임만 조장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그냥 두지시 않으신다. 나는 이 심판에서 자유로울까?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지도 않았는데 간 사람들이다. 명하지도 않았는데 말을 전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절대 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던 “칼과 기근”을 그들에게 보내실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하여 거짓 계시와 점술과 헛된 것과 거짓으로 예언한 이들을 심판하신다.

 

*내가 말하고 전하는 말이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지어낸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인지 늘 주의하여 돌아보아야 하겠다.

 

 

*예레미야는 심판당할 민족의 문제를 “자신(우리)의 무제”로 여겼다. 그래서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비를 요청한다. 지금 이 시대의 죄악뿐 아니라 조상들의 죄악까지 열거하고 심판의 정당성을 인정한다. 그런데도 “주의 이름”과 “주의 영광의 위”와 “주의 언약”을 위하여 진노를 거두어 달라고 간청한다.

 

*심판을 내리신 분이 중단시킬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혹시 삶 속에서 하나님의 징계 손길이 느껴지고 있는가? 이때 다른 사람의 허물만을 탓하기보다는 나를 포함한 “우리”의 잘못으로 생각하여 하나님께 솔직하게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어떨까?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과 주의 언약을 근거로 용서를 구했다. 또, 하나님 한 분만이 비를 내려 기근을 종결하실 수 있음을 믿음으로 구한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간절히 구했다. 하지만 응답받지는 못한다.

 

*”내가 하는 기도”가 응답의 근거가 아니다. “하나님의 행하심, 이루심, 결정하심.” 을 인정하는 것부터가 기도 응답의 출발이다.

 

 

 

 

*주님, 중보하지 말라는 명령에도 민족의 멸망을 바라보는 안타까움에서 기도를 멈추지 않은 예레미야의 모습을 본받겠습니다.

*주님, 문제해결의 근원은 역시 하나님밖에 없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문제해결이 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결정과 인도하심을 변함없이 신뢰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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