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끝까지 신뢰합니다. [렘 15:10-21]
 – 2023년 08월 06일
– 2023년 08월 06일 –
여호와를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18절)” 같다고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린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럴까? 모세나 사무엘이 기도해도 확정된 심판을 돌릴 수 없다는 절망스러운 현실에 괴로워 한다. 자신의 삶도 여기에 속해 있기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재앙이라며 괴로워 하는 상황을 하나님께 아뢴다.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괴로워 하는 예레미야를 더욱 강하게 하고 예언한 대로 심판이 진행 될 것임을 천명하신다. 그러자 예레미야가 여호와를 향해 “속이는 시내” 같은 분이라고 말한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의 회개를 촉구하시면서 끝까지 그를 도구로 사용하실 것을 말씀하신다.
 
 
 
1.낙심될수록 하나님께 호소해야 한다(10절)
변하지 않는 절망스러운 현실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탄식한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재앙을 선포한다. 자신은 여호와의 명령대로 이스라엘을 살리는 일을 감당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자신을 다 저주한다고(10절) 한숨쉰다.
 
말씀을 맡은 자로서 예레미야는 회개의 촉구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예언을 선언했었다. 이것은 예루살렘에 있는 많은 이들이 예레미야를 대적하고 다투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했다면 굳이 이런 결과를 낳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그들의 죄악을 폭로하고 부끄러운 자화상을 직면하게 했기 때문에 그들은 분노하고 대적하기에 충분했다. 회개하고 돌아오는 반응이어야 할 그들이 오히려 자신의 죄를 가리고 도리어 대적한 것이다. 자신이 돈을 빌리지도 않았고 꾸어 주어 이자를 받은 것도 아닌 어떤 피해도 주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예레미야의 진심이 오해받고 오히려 저주를 받는 상황이다.
 
*진심으로 행한 일이지만 사람들의 오해를 사는 경우가 있다. 또한 누군가의 잘못을 드러나게 했을 때 그것이 자신을 죽이려 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심하게 반항하거나 저주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거나 곡해 해서는 안될 것이다. 오해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변명도 소용이 없다. 주님께서 풀어 주시지 않으면 해결될 수 없다. 그러므로 억울한 일을 당하고 어처구니 없는 현실 속에서 예레미야처럼 주님께 호소하고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이 바람직한 자세라 할 수 있다.
 
 
 
2.하나님의 위로와 격려?(11-14절)
탄식하는 예레미야를 향하여 여호와께서 위로와 격려를 보내신다. 두려움과 낙심, 좌절의 상황 속에 있는 그를 여호와께서는 강하게 하고 복을 받게 하며 원수들이 재앙의 때에 오히려 예레미야에게 간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와함께 이제까지 예언한 말씀대로 분명한 심판이 이루어짐으로 원수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모두 약탈 당하고 대적들의 손에 이끌려 낯선 땅으로 끌려갈 것도 말씀하신다. 이 모든 것은 여호와의 분노 때문이었다.
 
두려움이 극할 수록 여호와께서 주시는 힘이 인내로 두려움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해주신다. 우리에게 진정한 복인 하나님 앞에 서서 주님의 자녀와 백성으로 주님의 인도함을 받는 복을 받게 하시는 약속이 가장 큰 것이다. 누구도 북방의 적을 꺾을 수 없음을 실감하게 될 때에야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선언한 말씀이 참되고 신실한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 말씀을 맡은 것으로 인해 충돌과 다툼만 낳는 자신의 삶에 지친다(10절). 하나님께 순종한 대가가 소외와 고립으로 돌아오니 힘겨웠다. 이런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서는 용기를 북돋아 주신다. “저주(칼랄_קָלַל)”로 번역된 단어는”하찮다, 시시하다, 보잘 것 없다, 가볍다”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의 말은 거짓 선지자들의 말에 비해 하찮은 것으로 취급을 받은 것이다.
 
왜 이런 취급을 받았을까? 10절 초반부에는 스스로를 “다투는 자(위쉬 리브), 싸우는 자(이위 마돈)”으로 표현한다. “싸움”을 뜻하는 단어 “마돈”은 “시비, 분쟁”등을 의미한다. 또 “다툼(리브)”는 법정 용어이다. 즉, 예레미야는 끊임없이 무언가에 대해 논쟁을 했다는 것이다. 이는 그의 소명과 연결된다. 여호와께서는 렘 1:7에서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고 했고 2:9에서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논쟁하는 분으로 등장한다.  여호와가 이스라엘과 논쟁한다는 것은 여호와의 말씀을 받은 예레미야가 이스라엘과 논쟁한다는 것과 동일하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면서 여호와의 심판이 정당함을 전하는 자였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말씀을 거부하며 동시에 여호와의 심판을 거부한다. 예레미야는 지칠 수 밖에 없었다. 11절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분명히 너를 강하게 해주고, 네가 복을 누리게 하겠다. 네 원수가 재앙을 당하여 궁지에 빠질 때에, 그가 너를  찾아와서 간청하게 하겠다.” (새번역_11절) 끝까지 견디도록 강하게 하실 것이고, 원수 앞에서 의로움을 증명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단지 기억의 대상이 아니라 반드시 사건으로 실현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위로와 격려는 말씀의 성취이다. 우리의 길도 동일하다. 기록된 말씀이 나의 삶속에서 성취될 때, 고난과 환난을 통과한 영적 보람을 누리며 진정한 위로를 깨닫게 된다.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끝까지 신뢰하며 인내 해야 한다.
 
 
 
3.하나님의 침묵은 부재가 아니다(15-21절)
여호와의 응답에 예레미야는 탄원을 쏟아 낸다. 자신을 기억해 주시고 돌봐 주시며 박해하는 자를 보복하시고 오래참으심으로 멸망치 않게 해달라고 탄원한다(15절). 한편으로는 자신은 여호와의 말씀을 기뻐하고 즐거워한 사람이라고 고백하면서 간구한다. 비록 지금은 그 어디에도 소속할 수 없이 여호와의 분노를 채우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고통과 상처가 더 중해지고 너무 고통스럽기에 여호와를 향하여 심각한 항변한다. 이렇게 된다면 결국 여호와께서는 물이 말라 속이는 시내처럼 신기루같고 자신을 속이는 것이 아니겠냐는(18절) 것이다.
 
*예레미야의 심정이 충분히 공감된다. 그는 40여년을 예언하면서도 단 한번도 기적 같은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외려 자신을 대적하고 심지어 죽이려고까지 한다. 그런 절망적 현실에서 예레미야는 자신이 여호와의 말씀을 기뻐하고 즐거워했는데 결국 생수의 강이 넘쳐 흐르는 여호와께서 오히려 신기루처럼 말라 속이는 시내같이 자신을 속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탄원의 끝에 여호와를 향해 원망을 쏟아 낸 것이다. 예레미야의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 짐작케 한다.
 
*탄식할 수 있다. 탄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원망으로 귀결되어서는 안된다. 고통이 가중되어지고 감당할 수 없는 상처가 너무 클 때 나도 모르게 여호와를 향하여 원망의 말이 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니다. 고립된 삶의 분노가 너무 커진 상황이다. 하지만 탄식과 탄원이 너무 과해서 그만 이스라엘이 범한 죄에 가까운 실수를 범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죄는 생수의 근원되시는 여호와를 버린 것이며 맘대로 웅덩이를 파서 다른 물을 두고 교만했던 죄이다(렘 2장). 예레미야가 여호와를 신기루같다고 표현하는 말은 결국 이스라엘의 죄를 보여주고 있다. 예레미야의 상황과 처지를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런 고통과 상처 속에서도 그래서 탄식하고 탄원하는 상황에서도 원망하는 데까지는 가지 않길 원한다.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의 고통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너무 멀리 가버린 것 같은 상황도 알고 계시기에 다시 돌아와서 여호와께서 주신 사명의 길을 잘 감당하길 원하신다. 그 길이 고난의 길이지만 그래도 이스라엘처럼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다시금 위로와 격려를 통해서 함께하심과 구원을 약속해 주신다(19-21절).
 
하나님께서는 예언자의 고통을 잘 알고 계신다. 그의 탄원에 대해서도 응답하신다. 하지만 여호와의 도구로 쓰임 받는 중에도 교만하여져서 해서는 안될 언행을 담지 않길 원하신다. 그래서 말씀을 전한 대로 변하지 않는 현실이 지속된다 하더라고 악인들에게 동화되어 그들처럼 행동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를 견고한 놋성벽이 되게 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해 주신다. 대적(악인)들의 영향을 받지 않게 해주실 것이라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처럼 붙잡아 주셔야 이 사역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시시때때로 탄식과 탄원을 통해 여호와께 간구하므로 여호와로부터 약속과 힘을 얻어 이 사역을 감당해 갈 수 있었다. 예언자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신뢰이지 이해가 아니다.
 
 
*말씀 사역을 감당하는 여정 속에서 인내가 필요하다. 자칫 욕심을 부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여호와께서 원하지 않는 일을 하게 되거나 여호와를 원망하여 가지 말아야 할 길과 하지 말아야 할 말과 품지 말아야 할 생각들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헛된 일을 버리라고 말씀하신다. 여호와의 말씀을 묵상하는 자는 그래서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에 동화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주의 말씀으로 견고하게 무장하여서 주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이 여정을 완주할 수 있다는 믿음의 인내로 경주해 가야 하리라!
 
 
 
나는?
*하나님 나라 백성, 주님의 제자된 삶은 세상 속에서 말씀을 보이며 사는 삶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이며 살기 때문에 구약의 선지자와 같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하지만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말씀을 보이는 삶은 반드시 세상의 반발이 따라올 수 밖에 없다.
 
*그 길은 예레미야가 경험한 외로운 길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말씀을 보이며 말씀대로 살아가는 선지자와 같은 삶의 길을 하나님께서 함께 하여 주신다. 세상의 대적이 매섭게 공격하여도 놋 성벽처럼 든든하게 감당하며 이겨낼 수 있도록 도우신다.
 
*약속의 말씀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침묵이 길어질 때 예레미야가 걸었던 이 길을 기억하고 담담히 견뎌내 보자.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 
 
 
 
*주님, 탄식과 탄원의 울음이 지나쳐도 사명의 길을 올곧게 가도록 도우시는 은혜가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의 길도 이렇게 이해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며 인도해 주심을 믿습니다.
*주님, 끝까지 신뢰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실수 하지 않으심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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