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예레미야의 네 번째 탄원_공의를 이루어 주시옵소서 [렘 18:13-23]
 – 2023년 08월 12일
– 2023년 08월 12일 –
토기장이의 비유를 선포했지만, 이스라엘은 예레미야의 선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배반하며 자기 길을 갈 뿐만 아니라 이제는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다. 이에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탄원한다.
 
 
 
1. 여호와를 떠난 배반과 그 결과(13~17절)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했다(13절). 곧바로 “너희는 모든 사람에게 물어보라”라고 명령하신다. 또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이러한 일을 들어본 적 있느냐?”고 질문하신다. 너무도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을 때를 보여준다. 이스라엘(종종 처녀로 비유된다)이 행한 “가증한(샤아루릿)” 행위 때문이었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예레미야와 호세아서에서만 사용되는데 “음행(제누트)”과 함께 언급된다. 그리고 이 가증한 일은 비밀스럽게 감춰진 것이 아니라 모두가 알고 있는 것임을 “레바논의 눈이 들판의 바위에서 사라지겠느냐?”, “이방에서 흐르는 차가운 물이 마르겠느냐?” (14절) 라는 질문 속에 녹아있다. “결코 발생해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여호와를 잊은 이스라엘에 대한 고발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2:32).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여호와를 망각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떠나 찾아간 것은 “허무한 것(15절)”일 뿐이었다. “허무한 것”인 우상을 찾아 다녔지만, 그것은 이스라엘을 넘어지게 하는 것일 뿐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을 기다리는 것은 황폐한 땅이다(16~17절).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이 귀신과 들짐승이나 사는 황무지로 변해, “두려움과 영원한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리로 지나는 자마다 놀라서 그의 머리를 흔들게 된다(16절).” 휘파람을 불고 머리를 흔드는 것은 일종의 제의적인 방어 의식이다. 당시 사람들은 폐허로 남겨진 지역에는 귀신들이 산다고 믿었다. 그렇기에 그 주변을 지나는 사람들은 이들의 갑작스러운 공격을 피하려고 휘파람을 불고 불길한 세력의 영향력을 떨쳐버리기 위해 머리를 흔들었다. 우상 숭배의 결과로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을 선포하신다(17절).
 
*심판을 선언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곁길로 행하면서 여호와께 등을 보인 것처럼, “재난의 날”에 여호와께서도 이스라엘에 등을 보이시고 얼굴을 보이지 아니하신다.
 
 
 
2. 예레미야의 네 번째 고백(탄원_18~23절)
예레미야의 네 번째 탄원은 대적들의 말을 인용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백성이 나를 두고 이르기를 “이제 예레미야를 죽일 계획을 세우자. 이 사람이 없어도 우리에게는 율법을 가르쳐 줄 제사장이 있고, 지혜를 가르쳐 줄 현자가 있으며, 말씀을 전하여 줄 예언자가 있다. 그러니 어서 우리의 혀로 그를 헐뜯자. 그가 하는 모든 말을 무시하여 버리자” 합니다.” – (새번역_18절) – 11절과 12절에서 공통으로 반복되고 있는 “계책, “계획”은 모두 명사 마하샤바인데 “자기 계획대로 살아가는 것과(계책) 여호와의 계획을 선포하는(계획) 의미로 받아들여도 무리가 없다.
 
-대적들은 이스라엘의 신학적 전통에 의지하여 그를 제거할 음모도 꾸민다. 예레미야는 자신을 죽이려는 그들의 시도에 대하여 고립된 상태에서 공의로우신 재판관 여호와를 찾아간다. 예레미야의 적들은 그가 선포한 말로 쟁론을 벌인다. 적들로 에워싸여 고립된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탄원한다. 적들의 고발을 듣고 판단해 주시기를 간구한다(19절).
 
 
예레미야의 적들은 그의 존재를 철저하게 무시하고 그를 하나님의 예언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아야 할 것을 공유한다. 예레미야를 대적하는 무리가 곧 여호와의 대적들임을 시사한다. 반면에 예레미야는 그들의 배은망덕을 먼저 고발한다(20절 상). 그들은 선을 악으로 갚는 자들이다. 사냥꾼이 구덩이를 파놓고 짐승이 빠지기를 기다리듯이 저들은 예레미야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음모를 꾸몄다. 어처구니가 없게도 그들은 ‘여호와를 증인으로 끌어들여 자신들의 무죄도 주장’한다(20절 하).
 
그러나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유다와 예루살렘에 심판을 선포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런데도 여호와의 분노를 돌리기 위해 중보의 기도를 포기하지 않았다(cf. 7:16; 11:14; 14:11; 1
 
예레미야를 고발한 자들은 그의 심판의 선언은 재앙을 바라는 그의 악한 마음을 반영한다고 보았다. 혹 여호와께서 심판을 결정하셨다고 하나 이를 연기 시키거나 취소하기 위해 노력해야 함에도 예레미야가 속으로 멸망을 원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판단에 고발한 것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죄를 변호한 후에 적들에게 철저하게 보복해주시기를 간구한다. “그들이 이렇게 배은망덕하니, 그들의 아들딸들이 굶어 죽거나 전쟁에서 죽게 하여 주십시오. 그들의 아내들이 아들딸들을 잃게 하시고, 남편들을 잃어 과부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장정들은 전쟁터에서 칼에 찔려 죽게 하여 주십시오.” (새번역_21절)
 
언뜻 보기에는 사적 복수를 간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예레미야가 선포한 심판 메시지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구한 것이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심판은 일차적으로 여호와를 배반한 자들을 징계한 사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한 참된 예언자임을 확인해 준다.
 
 
 
나는?
-이스라엘은 우상과 거짓 선지자를 따랐다. 신랑 하나님께 순결해야 할 처녀 이스라엘은 이방 신들을 섬기고 행음하여 스스로 더럽혔다. 자연 만물이 창조주 하나님께 충성하듯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도 창조주 하나님께 충성해야 하지만 그들은 “허무한 것”에 굴복했다. 그러면서도 심판을 선언하는 예레미야의 말을 청종하기 보다는 그를 제거하려고 한다. 그들은 항구적인 평안, 하나님의 끝없는 은혜, 무조건적 용서, 영원한 안전을 주장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따랐다. 예레미야가 없어도 율법과 지혜의 말씀을 들려줄 지도자들은 얼마든지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서 등을 돌리셨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등을 돌렸기에 하나님도 등을 돌리실 것이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깊이 뿌리 내리지 않은 자들을 사막의 동풍으로(17:6) 흩어버리실 때 그들은 열국 앞에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때 우상의 헛됨을 알고 하나님께 돌아서더라도 그들을 향해 얼굴을 돌리지 않으실 것이다. 잠시라도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위험천만한 도박을 해서는 안 된다. 내 마음과 의지로 얼마든지 잠깐 쉬었다가 언제든지 원하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복원될 수 있다고 장담해서는 안 된다.
 
 
-예레미야는 이 재앙에서 백성들을 구하려고 애를 썼다. 하나님에게서 이제 중보기도를 그만하라고 여러 번 들었다(7:16; 11:14; 14:11; 15:1). 그런데 백성들은 선지자를 생매장하려고 했다. 예레미야의 마음이 어땠을까?
 
-하나님이 아니면 아무도 몰라줄 만큼 아프고 아팠을 것이다. 예레미야는 이제 복수를 요청하는 무서운 기도를 드린다. 아내와 자녀들까지 형벌의 대상에 포함한 가장 강력한 간구였다.
 
-이 탄원의 기도는 예레미야 개인의 사적인 보복을 구하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신뢰성과 자기 사역의 정당성을 입증해 달라는 의미였다. 조건 없는 용서와 거짓 평화의 견고한 성을 허물어 달라는 간청이었다.
 
 
*어느 시대나 바른 말, 엄한 말, 각성의 말 하는 사람은 환영받기 참 힘들다. 예레미야가 계속해서 우다 백성들의 죄를 지적하고 경고하자, 그들은 마음을 돌이키기보다 오히려 반발심이 생겨서 마침내 예레미야를 살해할 음모를 꾸몄다. 그들은 예레미야가 없더라도 얼마든지 율법을 가르칠 제사장이 있고, 지혜를 가르친 현자가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전지자들이 있다고 말했다.
 
*우리 더온누리교회 성도들은 어떤 지도자를 원할까? 죄를 지적하고 고난을 말하는 지도자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복음을 복음답게 전하기 위해 주저하지 않고, 고난이 오더라도 무릅쓰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하는 지도자이기를 기도해 주시기를 바란다.
 
*예레미야는 참 억울했을 것이다. 그는 누구보다 더 유다 백성을 사랑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않게 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런데 백성들은 오히려 선을 악으로 갚으려고 한다. 예레미야는 이 억울함을 하나님께 맡겼다.
 
*나의 선한 의도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해와 미움과 반대에 부딪힐 때 예레미야의 하나님께 억울함을 호소하는 모습이 기억나게 하실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 토로하며 모든 사정을 아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리라.
 
*백성들의 중보자였던 예레미야가 백성에 대한 저주를 주저하지 않는다. 놀랍다. 이는 예레미야조차 어쩔 수 없이 백성들을 포기해야 할 상황에 이른 것을 암시한다.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그들에게서 더 이상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었다. 예레미야의 의분에 찬 기도가 서글프다. 개인의 보복보다 백성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공의를 구한다. 하나님의 공의가 결국 승리한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애쓰십시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그 일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십시오. 성경에도 기록하기를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하였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그렇게 하는 것은, 네가 그의 머리 위에다가 숯불을 쌓는 셈이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새번역_롬 12:17-21)
 
 
 
*주님, 유다 백성의 죄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완악함을 건강한 신앙으로 착각하며 심판의 대상이 되고 있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깨닫게 해 주십시오.
*주님, 바른말을 올바르게 전해야 할 사명을 잊지 않겠습니다. 소외될 각오로 말씀 앞에 늘 서겠습니다.
*주님, 말씀하신 대로 공의를 꼭 이루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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