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예레미야의 다섯 번째 탄식 [렘 20:7-18]
 – 2023년 08월 15일
– 2023년 08월 15일 –
예레미야는 말씀을 선포할수록 종교 지도자들에게 고난을 겪는다. 힌놈의 골짜기와 성전 뜰에서 말씀을 선포한 것으로 인해 성전의 안전을 책임지는 제사장 바스훌에게 모진 고난을 겪은 후 그의 마음이 다시 흔들린다. 자신을 선지자로 부르신 하나님의 소명에 대한 갈등과 고뇌를 가득 담아 깊은 탄식을 내뱉는다.
 
 
 
1. 예레미야의 탄식(7~9절)
그의 다섯 번째 탄식이다. 여호와께 격렬하게 따지는 예레미야이다. 여호와께서 꾀셨기에(개역 개정은 권유하시므로) 그 꼬임에 넘어갔고, 여호와께서 너무 강하시기에 자신이 거부할 수 없었다고 불만을 토로한다(7절).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유다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고발하고 멸망의 심판을 선포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조롱뿐이었다. 백성들은 그를 예언자로 인정하지 않고 조롱하며 거절했다. 그의 탄식에는 자신을 예언자로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였던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가득하다.
 
그러나 원망으로만 읽으면 곤란하다. 예레미야의 원망 깊은 탄식은 한편으로 여호와의 긴급한 개입을 촉구하는 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즉, 예레미야에게 가해진 모욕과 조롱은 자신을 보낸 하나님에 대한 모욕과 조롱이기도 했기에 하나님께서는 어떤 식으로든지 속히 응답해야만 한다.
 
예레미야는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심판을 결정하신 여호와 하나님과 반역의 길로 내달리는 이스라엘 사이에서 예레미야 자신도 이 절망적인 현실에서 도피할 수 없었다. 모욕과 조롱이 난무하면 여호와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선포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를 선지자로 부르신 하나님의 감동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는 예언하지 않겠노라. 결심도 해보지만, 뼛속 깊이 새겨진 여호와의 말씀이 그의 심장 속에서 불이 되어 타오르며 가만두지 않았다.
 
*예언자의 사명을 포기하려 해도 강하신 하나님께서 강권하여 그의 마음에서 불이 타오르게 하시니 그는 이 불을 억누를 힘이 없었다. 동시에 온종일 자신을 향해 던져지는 치욕과 비웃음을 이겨낼 힘도 없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2. 그의 역경(10절)
“수많은 사람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나는 들었습니다. ‘예레미야가 겁에 질려 있다. 너희는 그를 고발하여라. 우리도 그를 고발하겠다.’ 합니다. 나와 친하던 사람들도 모두 내가 넘어지기만을 기다립니다. ‘혹시 그가 실수하기라도 하면, 우리가 그를 덮치고 그에게 보복하자’ 합니다.” (새번역_10절)
 
예레미야는 자신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는가를 하나님께 호소한다. 파멸과 멸망을 선포한 그에게 백성들은 똑같이 파멸(폭력)과 멸망으로 응수한다. 바스홀이 “마골밋사빕”이라고 불릴 것이라고 선언했지만, 정작 예레미야를 향해 “사방의 두려움(개역 개정_10절)”이라며 그의 심판 예언을 수군거렸다. 단지 수군거림에 그치지 않고 예레미야를 고발하려는 음모로 발전했다. 그들은 서로 격려하며 예레미야를 법정에 세울 고소거리를 찾았고, 더 나아가 음모를 꾸며 조작하려 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혹시”(10절) 라는 표현은 그런 시도를 했지만,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런 상황에서 더 절망적인 것은 예레미야의 친한 친구들마저 그를 제거하려는 음모에 가담했기 때문이다(cf. 11:20-23; 12:6). “내 친한 벗”은 문자적으로 “내 화평의 사람들”이다. 하지만 예레미야와 그 친구들의 화평(샬롬)은 겉모습에 불과했다. 친구들이어도 속으로는 예레미야가 낙담하고 실의에 빠지기만을 기다렸다. “우리 원수를 갚자”라는 표현도 예레미야의 심판 선언에 대한 깊은 적개감을 표출한 것이다. 자신들의 주관과 신념, 오랜 전통의 관점에서 예레미야의 심판 선언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예레미야를 헤치려고 했다. 하지만 “혹시 그가 실수하기라도 하면”이라는 표현은 그들의 시도가 실패로 끝났을 가능성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여호와의 꾐에 넘어간 예레미야는 사람의 꾐에 넘어가지 않는다. 여호와께서 이긴 자를 사람이 이길 수는 없다.
 
 
 
3. 신뢰의 고백과 찬양(11~13절)
가장 친한 친구들도 자신을 박해하려고 속였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홀로 남겨진 것이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그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떠나갔어도 여호와께서 두려운(힘센) 용사처럼 자신과 함께하심을 확신한다(11절). 자신을 박해하는 자들을 무찔러 주실 것을 확신한다. 그들은 지혜롭게 행하지 못하여 큰 치욕을 당한다. 왜냐하면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셔서 예레미야의 송사를 판결하셔서 보복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12절). 예레미야는 “보복해달라”고 간청한다. 보복 요청은 감정적인 한풀이라기보다 왜곡된 하나님 나라의 법질서를 바로잡아달라는 호소이다. 여호와께서 자신의 의로움을 인정해주실 것을 확신하며 부르짖는다. 그 강한 확신으로 “너희는” 여호와를 노래하고 찬양하라고 권면한다(13절).
 
*아직 고난 중에 있지만 그는 여호와께서 개입하셔서 악한 자들의 손에서 건져주실 것을 미리 경험하고 이를 공동체와 함께 나눈 것이다. 예레미야 개인의 탄식과 구원이 공동체가 경험해야 할 탄식과 구원으로 그 지평이 넓어진다.
 
 
 
4. 그러나 저주와 절망도 토해내는 예레미야(14~18절)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한 후 예레미야의 입술에서 상상하지 못할 저주가 터져 나온다. 충격적이다. 욥이 고백한 것과 유사하지만(욥 3:1-12), 예레미야는 예언자이며 선지자이다. 어떻게 예언자의 입에서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는 말이 나올 수 있을까? 어떻게 출생의 기쁜 소식을 자기 아버지에게 전한 사람을 저주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선명한 소명 체험을 한 예레미야였건만 자신은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라고 절망할 수 있을까? 바로 직전 공동체를 자신의 구원 경험에 동참하도록 초대한 그 입술로 어떻게 자신의 생일을 저주할 수 있을까?
 
혼란스럽다. 짙은 절망의 어둠에 잡혀있는 인간의 처절한 모습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그에게 여호와께서 어떻게 응답하셨는지에 대한 언급은 달리 없다. 그래서 당혹스러울 뿐이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이렇게 자신의 출생을 두고 저주했다 할지라도 그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불신한 것은 아니다. 단지 자신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솔직하게 피력했을 뿐이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그러므로 힘들고 괴로운 시기를 지나고 있는 이들의 불신앙적인 한탄을 믿음이라는 명목으로 쉽게 단정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나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솔직하게 피력하지 말란 법 없다. 예레미야처럼 말이다. 오죽 답답했으면 그럴까!
 
 
 
나는?
-예레미야가 극심한 고난과 수모를 당하는 이유는 극도로 타락한 유다 백성들을 고발하고 멸망을 외쳤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죄악된 상황 속에서 나는 과연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나? 사람들이 거북스러워하고 싫어한다는 그것만으로 거짓 선지자들처럼 평안과 축복의 메시지만 전하고 있지 않은가? 예레미야의 영성을 감히 되돌아보기를 결심해 본다.
 
-예레미야는 선지자로서의 소명과 현실 사이에서 오는 괴리에 갈등한다. 심리적으로 매우 요동한다. 나는 주님의 일을 감당하면서 이런 부딪힘이 일어날 때 주님의 때를 기다리며 인내해야 함을 다시 결심해 본다.
 
-백성들은 예레미야의 사역을 어떻게 해서든지 무력화시키려고 시도한다. 자신들의 죄를 고발하는 예레미야를 향해 뒷조사해서라도 맞고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또한 가까운 친구들은 예레미야를 유혹하여 자신들이 친 덫에 걸리기를 원한다. 예레미야는 이런 현실이 괴롭다. 나도 복음을 전하면서 일어나는 이런 영적 도전들 앞에서 마음이 흔들릴 때가 참 많았다. 나도 인식하지 못하는 중에 나를 넘어뜨리려고 준비하는 일이 왜 없었겠는가! 다만 하나님께서 그 모든 순간을 막아 주시고 지켜주셨음이 확실하다. 나는 비록 그 순간에 염려하고 근심하며, 더 나아가 절망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은 내 눈에 보이지 않은 사탄의 모든 계략을 막아내셨다. 이를 확신하며 담대하게 주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겠다.
 
 
*상황이 절망적이고 마음이 흔들릴 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깊은 갈등 속에서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시며(11절), 원수에게 보복하시며(11, 12절),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실 것(13절)을 확신하고 있다. 그렇다 어려운 시절을 지날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고 알아가면 더 굳건한 신뢰가 다져진다.
 
*힘들면 불신앙적인 말을 누구라도 할 수 있다. 예레미야조차도 했다. 그래서 위로받는다. 나도 힘들 때 내 입술에서 나오는 불신앙적인 말 한마디가 자연스러운 것임을 깨닫는다. 얼마나 힘들면 그럴까! 이해하고 기다려주면 믿음은 다시 돌아온다. 불신앙적인 말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께서 행하실 그 크신 구원의 능력이 사라지지 않기에, 죽을 만큼 힘들면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나간 정신 돌아올 때까지 넋두리라고 하고 있으면 회복된다. 하나님은 결코 좌절하고 절망하는 영혼을 정죄하지 않으신다. 기다려주시며 들어주신다. 예레미야의 불신앙의 넋두리를 들어주신 것처럼….
 
 
 
*주님, 예레미야의 넋두리에 오히려 힘을 얻습니다. 저도 주님께 이런 상황 일어나면 그저 들어주실 것을 확신하기에 위로가 됩니다.
*주님, 그래서 더욱더 주님 신뢰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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