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살룸(여호아하스), 여호야김… [렘 22:10-19]
 – 2023년 08월 18일
– 2023년 08월 18일 –
정의와 공의에 근거하여 유다의 왕권을 고발했다(21:11-22:9). 그리고 이어서 유다 왕 살룸과 여호야김의 운명을 선포한다. “살룸”은 여호아하스를 가리킨다. 그는 요시야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지만 3개월 만에 애굽으로 끌려갔고, 그의 뒤를 이어 여호야김이 왕이 되었다. 요시야의 죽음 이후에 남유다의 정세는 불안해져만 갔다. 특히 본문은 여호야김의 불의한 통치와 그의 아버지 요시야의 의로운 통치를 대비한다.
 
유다의 마지막 사십 년 동안 예언자로 활동한 예레미야는 모두 다섯 명의 왕(요시야, 여호아하스(살룸), 여호야김, 여호야긴(고니야), 시드기야)을 경험했는데, 특히 여호야김 왕이 그에게 심히 적대적이었다. 여호야김은 여호와의 예언자들에게 폭력을 사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26:20-23에 따르면, 예레미야와 같은 메시지를 전하던 예언자 우리야가 왕이 자신을 죽이려는 것을 알고 애굽으로 도망간다. 이에 여호야김은 고위 사절을 파견하여 우리야를 연행하여 처형하고 그의 시체를 공동묘지에 던져버린다. 또한 36장에서 예레미야가 바룩에게 불러주어 두루마리에 기록하게 한 그간의 예언을 조각조각 잘라 화로에 던져 태워버리고 예레미야의 체포를 명령했다.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에 대한 폭력은 곧 그 예언자들을 보내신 여호와에 대한 폭력이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절대 왕권화에 따른 남용은 결국 유다 멸망의 확정으로 이어진다(렘 25장).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1.본문의 배경(cf. 왕하 23:29-35; 대하 35:20-36:4)
주전 7세기 말 고대 근동은 요동친다. 주전 612년 바벨론이 메대와 연합하여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함락한다. 그리고 주전 610년 앗수르의 마지막 왕 앗수르-우발리트 2세를 하란에서 쫓아낸다. 이때 메소포타미아의 새로운 강자의 출현을 저지하기 위해 애굽이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주전 609년 애굽의 바로 느고는 바벨론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직접 원정군을 이끌고 유브라데로 올라갔고 유다 왕 요시야는 므깃도로 내려가서 애굽의 진군을 막아선다(대하 35:20-24). 이때 요시야 왕이 애굽의 바로 느고에게 패하여 죽임을 당한다(왕하 23:29).
 
요시야 왕이 느고에게 죽임을 당하자, 백성들은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추대했다. 하지만 이러한 백성들의 시도는 가나안과 시리아의 통치권을 주장하는 애굽의 바로 느고의 간섭으로 수포로 돌아간다. 느고는 여호아하스를 포로의 몸으로 애굽으로 끌고가고 대신에 그의 형 엘리야김을 왕으로 앉히면서 그의 이름을 “여호야김”으로 바꾸었다.
 
 
 
2.살룸(여호아하스)의 운명(10-12절)
다윗 왕에 필적할 만한 평가를 받는 요시야의 죽음은 유다와 예루살렘에 큰 슬픔을 가져왔다. 백성들은 울면서 요시야의 죽음을 애통해하지만, 이는 재앙의 서막에 불과했다. 더 큰 상실과 슬픔이 유다를 기다리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불행한 죽음이었지만 고향 땅에 묻힐 수 있었던 요시야의 운명이 살았지만, 이집트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어 이방 땅에 묻히게 될 살룸(여호아하스)의 운명보다 낫다. 이방 왕에 의해 폐위되고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 땅에서 삶을 마감해야 하는 “다윗의 왕위에 앉은 유다 왕” (2절)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다가 경험하게 될 비극의 전조에 해당한다. 동시에 유다는 자기 왕마저 지킬 수 없는 초라한 신세가 되어 버렸다.
 
살룸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행여 그의 귀환을 고대하던 자들에게 헛된 꿈을 버리라고 주는 권면으로 읽을 수 있다. 특히 애굽의 바로에 의해 왕이 된 “여호야김”에 대해 부정적인 백성들은 “땅의 백성들”은 유배당한 왕이 돌아와서 요시야의 왕의 질서를 다시 회복해주리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살룸이 이방 땅에서 죽을 것을 선언하면서 백성들이 헛된 소망에서 깨어날 것을 촉구했다.
 
 
 
3.여호야김의 운명(13-19절)
여호야김(주전 608~598년)은 자기의 왕궁을 증축하고 화려하게 꾸미기 위해 불의를 일삼았다. 이에 예레미야는 화를 선언한다. 바로 느고의 선택에 따라 왕위에 오른 여호야김은 애굽에 조공을 바치기 위해 백성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였고(왕하 23:35), 자기의 왕궁을 확장하고 치장하기 위해 노동력을 부당하게 착취하였다(13-14절). 그는 품삯을 지급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백성들을 노역장으로 끌어냈다. 이것은 명백한 왕권의 남용이었다.
 
13절은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부정하게 그 다락방을 지으며”라고 고발한다. 이를 원문 직역하면 “정의가 아닌 것으로 제 집을, 공의가 아닌 것으로 누각을 세우는”이 된다. 정의와 공의로 집을 세워야 할 왕이 불의와 부정으로 왕궁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세운 것이다.
 
*여호야김은 정의 대신 ‘정의가 아닌 것’으로, 공의 대신 ‘공의가 아닌 것으로’ 통치한 것이다. 건축에 동원된 백성은 서로에게 이웃이 되어야 하지만, 여호야김은 사유물처럼 백성을 착취하였다.
 
 
여호와께서 여호야김을 그의 아버지 요시야와 비교하여 엄중하게 책망하신다. 가난한 자들과 궁핍한(억눌린) 자들의 법적 권리를 보호해주며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며 산 아버지와 달리 아들은 값비싼 레바논 백향목으로 크고 웅장한 건물을 지어 자신의 왕권을 과시했다. 아들은 아버지의 의로운 통치를 본받지 않고 통치자의 권위와 권력을 건물의 웅장함과 화려함에서 찾았다.
 
요시야는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면서도 왕으로서 누릴 것을 모두 누렸다.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며 의롭게 통치했기 때문에 그는 모든 일에 형통할 수 있었다. “네가 남보다 백향목을 더 많이 써서, 집 짓기를 경쟁한다고 해서, 네가 더 좋은 왕이 될 수 있겠느냐? 네 아버지가 먹고 마시지 않았느냐? 법과 정의를 실천하지 않았느냐? 그 때에 그가 형통하였다….” (새번역_15절)
 
요시야 왕은 여호와를 아는 삶을 살았다. 그것은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사회 경제적 약자의 권리를 보호해주는 것이다. 그는 이런 왕의 통치를 순종하며 실천하였다. 요시야는 여호와를 아는 통치자의 삶이 어떤 삶인지를 본보기로 보여주었다. 하지만 아들 여호야김은 제 마음의 결정을 따라 제 눈에 좋을 대로 행동할 뿐이었다.
 
여호야김은 정의와 공의를 존중하는 대신 폭력적이며 탐욕적인 공권력을 무기로 부정한 이익을 추구하며 비판자들을 억눌렀다(17절).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면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이라도 짓밟거나 목숨을 빼앗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cf. 렘 26:3).
 
 
“그러므로” (18절) 여호와의 정의와 공의를 무시하고 제 이익을 위해 왕권을 사유화한 여호야김에게 심판을 선포한다. 심판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이다. 먼저, 누구도 불의한 왕의 죽음을 슬퍼하며 애곡하지 않을 것이다(18절). 아버지 요시야가 죽었을 때 많은 사람이 슬퍼하며 그를 위해 애도하였지만(10절), 그 아들의 죽음은 아무도 슬퍼하며 통곡하지 않을 것이다. 둘째, 여호야김에게는 합당한 장례가 없을 것이다(19절). 그의 시신은 가족 묘지에 안장되지 못하고 나귀와 같은 짐승들의 주검처럼 예루살렘 성문 밖에 아무렇게나 버려질 것이다. 고대 세계에서 정상적인 정례 절차에 따라 묘지에 묻히지 못한 죽음을 저주받은 자의 치욕적인 죽음으로 간주했다.
 
 
 
나는?
-유다는 요시야 왕의 이른 죽음을 애통하기보다 그의 아들 살룸(여호아하스)을 위해 울어야 했다. 요시야를 위해서는 왕의 장례를 치렀지만 살룸은 애굽으로 잡혀가서 다시 고국을 보지 못하고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백성들의 지지로 왕에 올랐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악한 왕이었다. 그는 애굽에서 “나가게” 하신 하나님께서 충성하지 않았기에 가나안 땅에서 “나가” 애굽에서 생을 마감한다.
 
*이미 빠져나온 애굽의 가치관을 청산하고 은혜로 들어온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내야만 영원한 땅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애굽의 바로 느고에 의해 왕위에 오른 여호야김이기었기에 막대한 조공을 바쳐야 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도 여호와김은 자신의 왕궁을 짓는 일에 임금도 주지 않고 백성을 노역자로 동원하였다. 하나님의 통치 원리인 “정의와 공의를 무시한 것이다. 백성들의 삶은 곤궁하기 짝이 없는데 애굽의 건축 양식을 따른 왕궁은 사치스럽고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여호와김에게 백성은 형제와 이웃이 아니라 노예일 뿐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왕 되심을 부정하고, 언약을 멸시하며, 애굽의 심기만 불편하게 하지 않으면 자기 나라와 권좌는 안전하다고 착각했다. 왕의 참된 권위는 웅장하고 화려한 백향목 궁궐과 강압적인 철권통치에서 나오지 않는다. 요시야처럼 언약의 요구대로 약자를 보호하고 부당한 힘을 진압하며 정의와 공의를 실현할 때 나온다.
 
*기고만장한 여호야김도 죽는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누구도 슬퍼하지 않는다. 영예롭게 매장되지도 못한다. 하나님을 버린 그의 말로는 동물과 비슷해서 예루살렘 문밖에 던져져 나처럼 매장될 것이다.
 
 
*왕들을 세우기도 하시고 폐하기도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선정을 베풀다가 전장에서 죽은 요시야를 그리워하며 애통해하지 말고, 악한 통치를 하다가 애굽에 잡혀간 여호아하스를 위해 슬피 울라고 하신다. 이는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현재의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를 깨달아 알라는 말씀이다. 과거에 아무리 개혁적이었어도 현재 죄악된 삶을 살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하나님 앞에서는 지금, 현재가 중요하다.
 
 
 
*주님, 정의와 공의로 통치하는 지도자가 그립습니다. 지금 이 시대 여호야김과 같은 지도자들만 보입니다. 그래서 슬픕니다. 요시야와 같은 지도자는 정녕 없다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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