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예루살렘과 고니야(여호야긴)를 향한 심판 선언 [렘 22:20-30]
 – 2023년 08월 19일
– 2023년 08월 19일 –
여호아하스와 여호야김에 대한 심판을 선언한 후 본문은 예루살렘과 고니야에 대한 심판을 선언한다. 고니야는 여호야긴을 가리킨다. 그는 여호야김의 뒤를 이어 왕이 되어 3개월만 통치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1차 침공할 때 포로로 잡혀간다.
 
이는 여호아하스가 애굽으로 끌려가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어야 하는 것처럼 여호야긴도 바벨론으로 끌려가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어야 한다. 다윗 왕조를 계승한 유다의 왕들이 포로 신세로 이방 땅에서 생을 마감한다.
 
 
 
1. 예루살렘의 탄식(20~23절)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레바논과 바산, 아바림에 올라가서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이 들을 수 있도록 소리높여 탄식할 것을 명령하신다(20절). 이는 “너를 사랑하는 자가 다 멸망하였기” 때문이다. “너”는 예루살렘을 가리키고,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은 우상이 아니라 정치적, 군사적 동맹국들을 가리킨다. 함께 연합한 주변국들은 바벨론에 모두 멸망하고 예루살렘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다. 그런데 어디에도 도움을 요청할 수 없다. 예레미야는 이 재앙의 원인을 분명하게 알려준다. 어느 날 갑자기 위기가 시작된 것은 아니다. “평안할 때” 곧 위기가 닥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해 경고하셨었다. 하지만 예루살렘은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며 단호하게 거절했었다. 예루살렘은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현실 속의 정치적이고 군사인 동맹들을 더 믿었다.
 
예루살렘의 불순종은 예레미야 시대의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예루살렘은 “어려서부터”, 곧 하나님과 처음 관계를 맺은 직후부터 완강하게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닫았다(cf. 렘 2:2; 3:24). 그들이 걸어온 길은 불순종과 반역으로 가득하였다. 여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들은 모두 심판의 바람에 내쫓겨 적들에 사로잡혀 유배를 떠난다. 그때 예루살렘은 자신이 저지른 온갖 죄악으로 인해 땅바닥에 떨어져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예루살렘이 외간 남자에게 강제로 능욕당하는 여자에 비유된다. 불순종의 필연적인 결과로 예루살렘은 바벨론에 의해 처참하게 유린당한다.
 
예루살렘이 겪게 될 고난은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23절)”이라는 표현으로 매우 극심할 것을 알려준다. 진통하는 여인이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것처럼 예루살렘은 파국적인 재난에 직면하여 앓는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한 채 멸망에 떨어진다.
 
 
 
2.고니냐에 대한 심판(24~30절)
인장 반지 비유를 통해 여호야김의 아들 고이냐(여호야긴)의 유배가 필연임을 보여주신다. 여호야긴이 하나님 오른손에 낀 인장 반지라도 글로 손가락에서 빼내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24~25절). 이를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라는 표현을 통해 그에게 내릴 재앙의 예언이 반드시 성취될 것을 확인해 준다. 왕을 버리시기로 결정한 하나님의 결정은 어떤 경우에도 취소되지 않는다.
 
“나의 오른손의 인장 반지”라는 표현이 상징하는 것은 여호와와 고니야의 특별한 관계를 암시해주는 말이다. 인장이 소유주의 가장 가깝고도 가장 고귀한 사적 용품인 것처럼 고니야도 전적으로 여호와께 속한, 그리고 하나님의 권위를 대표하는 유다의 왕이다. 하지만 이러한 특별한 관계가 구원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 하나님의 전적인 선택으로 다윗 왕조를 선택하셨으나 그 선택이 다윗 왕조에 주어진 영원한 면죄부는 될 수 없다.
 
바벨론의 예루살렘 정복과 고니야의 항복과 유배는 불순종한 다윗 왕조를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결정이다. 주전 598년부터 587년 겨울에 예루살렘 원정을 나선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이듬해 1월 중순부터 예루살렘을 포위하자 3월 중순에 유다 왕 고니야는 저항을 포기하고 성문을 열고 항복하고 만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항복은 시작에 불과했고 바벨론으로 끌려간 고니야와 그의 어머니 하무달은 다시 고향 땅에 돌아오지 못한다. 조상들과 함께 안식하지 못하고 이방 땅에서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나 주가 말한다. 너희는 이 사람을 두고 ‘그는 자녀도 없고, 한평생 낙을 누리지도 못할 사람’이라고 기록하여라. 다윗의 왕위에 앉아서 유다를 다스릴 자손이, 그에게서는 나지 않을 것이다.” (새번역_30절) 고니야는 실패한 왕으로 이미 그의 역할은 끝났다. 그에게서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 미래는 없다. 역대상 3:17-18에서는 고니야에게 적어도 7명의 아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아들 가운데 누구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되지 못하기에 아들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땅이 아닌 이방 땅에서의 죽음은 그 뿌리로부터 완전히 갈라지는 저주받은 죽음이다. 이는 고니야(여호야긴)을 여전히 유다의 합법적인 왕으로 인정하고 그가 다시 돌아와서 유다를 재건해 주기를 기대하는 자들에게 헛된 소망을 버리라는 경고의 말씀이다.
 
 
 
나는?
-레바논, 바산, 아바림으로 상징되는 예루살렘이 사랑하고 의지했던 열국들의 멸망 소식은 남유다에게 꽤 충격이었다. 바벨론에게 맞서기 위해 앗수르나 애굽과 동맹을 맺었던 유다에게는 더 이상 의지할 데가 사라진 것이다. 가장 믿을 만했던 나라와 지도자들이 심판의 때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날라간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했던 자들도 붙잡혀간다. 레바논 백향목으로 만든 집에서 호화를 누리던 자들도 해산하는 고통 같은 시련을 피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실제였다.
 
-요시야의 손자,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여호야긴)도 포로로 오래도록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그의 손에서 빼내 바벨론의 손에 넘겨진 인장 반지는 다시 그의 후손들의 손에 돌아가지 않는다. 그의 모친도 함께 포로로 잡혀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 그의 일곱 아들 중 아무도 왕위를 계승하지 못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기에 다윗 왕조 재건의 마지막 희망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인간적으로 기대할 만한 희미한 불씨 하나 남기지 않으신다.
 
-이처럼 가장 깊은 절망과 혼돈 속에서 다윗의 후손 메시아가 등장한다.
 
 
*평안할 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생명의 길에 청종하지 않는 삶에는 멸망이 기다린다. 하나님을 무시하고도 당연히 누릴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특권은 없다. 말씀을 가볍게 여기면서 언약 백성의 삶은 당연히 여기는 것이 문화로 자리를 잡아 불순종하는 이가 한두 사람이 아닌 유다 전체였다. 더 이상 말씀을 몰라도 불편해하지 않는 것이, 순종하지 않고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죄를 짓고도 별일 없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어려서부터 그들의 습관과 상식이 되기 전에 “부지런히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가르쳐야 한다. 힘써 가르쳐야 한다. 가장 확실한 가르침은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이 숱한 전지자들을 거절한 이스라엘처럼, 어려서부터 여호와의 음성을 거절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있다면 이것을 누구에게 배웠을까? 부모들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불순종의 모습이 아니라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면 자녀들은 따라온다.
 
 
*군 복무를 전경 부대에서 보냈다. 신병 시절 조계사 사태 진압을 간 적이 있었다. 시설보호 근무를 하는데 종일 염불 소리와 목탁 소리를 들었다. 일주일 정도 그 소리를 듣고 있으니 나로 모르게 반야심경 한 자락이 흉내내어지더라…. 목탁 소리 흉내 내는 것도 그냥 입에서 흘러나왔다. 지금도 가끔 그때의 기억이 소환된다. 환경과 습관이 이리 무서운 것이다.
 
*얼마나 말씀을 반복해서 들어야 막힘 없이 술술술 외워질까? 말씀이 머리에 각인되어 나도 모르게 순종이 자연스러워질까? 할 수만 있다면 늘 말씀을 듣고 찬양을 들으며 마음과 머리에 각인해야 하지 않을까? 30여 전에 겨우 일주일 내내 들었던 반야심경 가락이 이리도 쉽게 흥얼거려질 수 있는데…. 우리는 얼마나 말씀을 듣고, 각인되어야 술술술 나올까?
 
*모든 상황에서 말씀이 떠오르고 말씀을 따라 순종해 내는 습관이 얼마나 오랫동안 들어야 가능할까? 얼마나 힘을 쏟아야 할까! 말씀을 따라 사는 습관은 불순종하려는 마음을 알게 하고 순종하려고 싸우게 한다. 내 안에 더욱 말씀을 채워야 할 이유다.
 
 
*유다 왕들은 선대 왕들에게서 고약한 버릇을 보고 따라 했다. “네가 평안하였을 때는 내가 너에게 경고하여도 ‘나는 듣지 않겠다!’ 하고 거부하였다. 너는 어렸을 때부터 이런 버릇이 있어서, 언제나 나의 말을 듣지 않았다.” (새번역_21절) 언제나 말을 듣지 않으면서 한편으로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겠냐고 믿는다(?). 기믹힐 노릇이다. 그런데 이 모습이 오늘날 교회 가운데 이미 문화로 자리 잡혔다. 하나님의 말씀을 관심을 두지도 않고, 말씀이 주는 경고에 무감각하며,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기도, 사역, 헌신 등등)가 전혀 없으면서도 “교회”를 다니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믿는다. 참으로 놀라운 믿음이다. 이런 헛된 믿음의 결국은 비참한 심판이다.
 
*”.. 모두 바람에 휩쓸려 가고…. 수치와 멸시를 당할 것이다.” (새번역_22절) 지나친 헛된 믿음, 무턱대고 맹신하는 구원의 확신은 결코 하나님 백성 신앙의 모습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공동체에 이런 모습이 너무도 흔하지 않은가? 예수님을 믿었으니, 구원의 확신이 분명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반대로 어떤 일을 해도 그 구원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도 안 되는 믿음을 붙잡고 있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구원의 확신은 분명히 있어야 하나, 말씀에 반응하고 순종하는 행함은 없고 지나친 확신밖에 없는 신앙은 결국 멸망한다.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을 믿어 “이미” 얻은 구원에 감사하며, “아직” 임하지 않은 종말론적 구원을 사모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이미” 얻은 구원은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직” 완성되지 않은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정의와 공의”로운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것이 올바른 성도의 삶이다.
 
*”오늘”이라는 기회를 주신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최선을 다해 말씀을 살아내는 하루가 되기를 결심해 본다.
 
 
 
*주님, 말씀이 묻어나는 습관으로 삶을 채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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