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거짓 예언자가 되지 않겠습니다 [렘 23:23-40]
 – 2023년 08월 22일
– 2023년 08월 22일 –
하나님은 “가까운 곳에 있는 분인 동시에 먼 데에 있는 분”이시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악한 행위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가 자신들과 함께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의 오판이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
    
고대로부터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는 방식은 여러 가지였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요셉의 경우처럼 꿈은 하나님이 자신의 계획을 알리는 중요한 방식으로 인식되었다. 사무엘도 여호와의 의지를 묻는 합법적인 수단으로 “꿈과 우림과 예언자”를 전제했다. 꿈은 성경의 기록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뜻을 보여주시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꿈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거짓 예언자들이 이구동성으로 꿈을 통해 하나님께 말씀을 받았노라고 주장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본문은 꿈을 수단화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오도한 거짓 선지자들에게 전하는 준엄한 경고이다.
    
    
    
1. 가까운 곳이나, 먼 곳이나 어디에든 계시는 하나님(23~24절)
하나님은 온 천지에 충만히 거하신다. 하나님을 피하여 숨을 곳은 어디에도 없다. 당시 거짓 선지자들은 사방에 돌아다니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침없이 거짓 예언을 서슴치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이 멀리 계셔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줄로 생각했다. 그러나 어떤 죄라도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없다. 언제 어디서나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
    
“사람이 제아무리 은밀한 곳에 숨는다고 하여도, 그는 내 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 주의 말이다. 내가 하늘과 땅 어디에나 있는 줄을 모르느냐?” (새번역_24절)
    
    
    
2. 거짓 예언자들_말씀 도둑(25~32절)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한다고 모두가 참 선지자는 아니다. 당시 거짓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팔면서 꿈에서 계시받았다고(25절) 백성들을 속였다. 백성들은 그 신비한 말에 속아 하나님을 잊어 버렸다. “그들은, 조상이 바알을 섬기며 내 이름을 잊었듯이, 서로 꿈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내 백성이 내 이름을 잊어버리도록 계략을 꾸미고 있다.” (새번역_27절) 예전에는 바알이 하나님이 이름을 잊어버리게 했던 것처럼, 지금은 꿈이 이스라엘 백성을 미혹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잊게 한다.
    
거짓 예언자들은 꿈을 계시의 수단으로 이용하여 거짓을 예언하였다. 그들은 “내가 꿈을 꾸었다. 내가 꿈을 꾸었다(새번역은 내가 꿈에 보았다. 내가 꿈에 계시받았다_25절)”고 반복하여 말할 정도로 확신이 있는 자들이었다. 자기 생각을 여호와의 계시로 포장해 버렸다. 해석이 모호하고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꿈을 여호와께서 주신 계시적 꿈으로 주장한다. 그런데 그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의 평가는 냉정하다.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언제까지 이 마음을 품겠느냐? 그들은 그 마음의 간교한 것을 예언하느니라(26절)”
    
거짓 예언자들이 꿈 이야기를 하나님의 계시로 선전하고 백성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여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가게 한다. 예레미야도 이들의 거짓 예언으로 인해 어려움에 부닥친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참된 선지자만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시며 격려하신다.
    
“꿈을 꾼 예언자가 꿈 이야기를 하더라도, 내 말을 받은 예언자는 충실하게 내 말만 전하여라. 알곡과 쭉정이가 서로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나 주의 말이다.” (새번역_28절) 꿈을 꾸는 자는 꿈을 이야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는 그 받은 말씀을 전할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알곡이라면 꿈은 쭉정이(겨)에 불과하다. 쭉정이와 알곡이 질적으로 다른 것처럼 꿈과 말씀은 차원이 다른 것으로 서로 아무 관련이 없다. 쭉정이에 불과한 꿈은 알곡에 해당하는 말씀에 어떤 식으로도 비교가 될 수 없다.
    
    
예레미야는 계시의 수단으로서 꿈을 근본적으로 부정한다. 실체가 없는 꿈과 달리 하나님의 말씀은 (겨를) 태워버리는 불과 같고(cf. 5:24; 15:14; 20:9)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와 같다(29절). 예레미야를 통해 선포된 말씀은 거짓 예언자들을 따르는 유다 백성에게 불과 방망이가 되었다.
    
꿈을 말하는 거짓 예언자들에게 징계의 심판이 선언된다. 말씀이 주어지지 않았음에도 마치 계시를 받은 것처럼 누군가가 떠들면, 이것을 들은 다른 예언자들이 다시 그 거짓 계시를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며 떠벌린다. 이런 거짓 예언자들에게 “보라…. 내가 치리라”는 표현이 연속 반복된다(30, 31, 32절). “내가 너희를 버리리라(33절)”, “내가 벌하리라(34절)”라고 강하게 선언하신다.
    
    
    
3.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33~40절)
언어유희를 활용하여 거짓 예언자들을 고발한다. “엄중한 말씀”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맛싸(מַשָּׂא)는 “짐(부담) 혹은 신탁”의 이중 의미가 있다. 심판을 선고하는 예레미야의 “신탁”을 부담스러운 “짐(부담)”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신탁)”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의 신탁을 짐(부담)스럽게 생각하는 자들에게 그들이 바로 여호와께 짐(부담)이 되기에 그들을 던져버리겠다고 말씀하신다. “이 백성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나 예언자나 제사장이 너에게 와서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이 있느냐고 묻거든, 너는 그들에게 대답하여라.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이라고 하였느냐? 나 주가 말한다. 너희가 바로 나에게 부담이 된다. 그래서 내가 이제 너희를 버리겠다고 말하였다고 하여라.” (새번역_33절)
    
또 예레미야의 심판 예언을 거절하는 자들이 정작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처럼 포장하여 선포하는 것에 대해 선포하는 자뿐 아니라 그 집안이 함께 징계받을 것이다(34절).
    
35~37절은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신탁)”과 관련하여 바른 태도가 무엇인지 가르친다. 제사장과 예언자들은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 안 된다. 이들은 단지 “여호와께서 무엇이라고 응답하셨으며, 여호와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셨느냐?”고 서로 물어볼 수 있다(35절).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 특정 인물에게 한정되고, 다른 사람들은 단지 여호와의 말씀(신탁)에 관하여 물어볼 수 있을 뿐이다.
    
여호와께서 특별히 택한 자 외에 “여호와의 신탁”을 주장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는 자들이다(36절 하). 다른 예언자들과 제사장들은 여호와의 신탁을 직접 선포할 수 없고 하나님의 신탁이 독점적으로 주어진 예레미야에게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을 물어볼 수 있을 뿐이다(37절).
    
38~40절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가르침에 따르지 않는 자들에게 주시는 심판의 말씀이다. “내가 사람을 보내서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이라는 말을 쓰지 말라고 했는데도 내 명령을 어기고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이라는 말을 써서 말한다면,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반드시 내가 그들을 뽑아서, 멀리 던져 버리겠다 하더라고 전하여라. 그들뿐만 아니라 그들과 그들의 조상에게 준 이 도성도 함께 뽑아서, 멀리 던져 버리겠다가 하더라고 전하여라.” (새번역_38~39절)
    
결국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은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을 직접 받은 것처럼 오도하여 백성을 왜곡된 길로 가게 한 거짓 예언자들의 죄도 한몫한 것이다. 또, 이를 분별하지 못하고 거짓 예언자들의 선포를 따르는 백성들의 죄도 함께 물으신 것이다.
    
*여호와께서 말씀을 도둑질한 거짓 선지자들과 이를 분별하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따른 백성들에게 잊지 못할 영원한 수치와 영원한 치욕을 가져다주셨다(40절).
    
    
    
나는?
-거짓 예언자들의 특징 중의 하나는 하나님을 제한하거나 제약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은 그분의 절대주권에 있다. 이는 곧 “자유”라고도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통제를 받지 않으신다. 인간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그 어느 것도 예측할 수 없다. 하나님은 오직 자기 뜻대로 자신의 품대로, 자신의 크기와 능력대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마음대로 구원하실 수도, 심판하실 수도 있다. 하나님에게서 숨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은 천지에 가득 차 계신다. 충만하시다.
    
-그러니 특정 교리나 신학의 틀로 다 담을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분이시다. 종교적 의식이나 열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조정할 수도 없다. 엄밀하게 믿음은 하나님이 하나님답게 역사하시도록 그 결정하심과 행하심에 자유를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결정에 나의 모든 결정권을 양도하고 하나님의 자유로운 처분을 기뻐하며 수용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속한 삶은 기꺼이 이런 삶을 산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노릇을 하실 수 있도록 겸손하게 그 결정과 인도하심을 지지하고 순종하는 것이 곧 참믿음의 출발이다. 유다의 멸망은 하나님을 다른 우상처럼 자신들이 통제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들어 버린 것에 있다.
    
    
*거짓 선지자들은 간교한 자기 마음에서 나온 꿈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처럼 떠벌렸고, 다른 거짓 선지자들의 꿈까지 사용하였다. 말씀의 계시를 들을 귀를 잃었고, 백성이 여호와의 이름을 잊게 했다. 하나님은 “꿈”을 받은 자는 “꿈”을 말하고 말씀을 받은 자는 “성실”로 말하라고 명령하신다.
    
*신비로운 꿈이 말씀보다 더 권위 있게 다가올 수 있지만, 둘은 쭉정이와 알곡이 다른 만큼 다르다. 꿈은 실효가 없으나 말씀은 불과 같고 반석을 무너뜨리는 방망이 같다.
    
*말씀 문맹이 급증하여 넘쳐나고 신비적인 은사에 몰두하는 경향이 강한 이 시대에 하시는 경고의 말씀 아닌가? 분별이 더욱 필요하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성경에 꿈은 구약이든 신약이든 하나님께서 그 뜻을 알려 주시는데 사용된 비중 있는 통로였다. 다만 거짓 선지자들이 자신들이 꿈도 꾸지 않았으면서 “내가 꿈을 꾸었다 내가 꿈을 꾸었다”라고 거짓으로 외친 것이다. 또, 꿈만 강조하여 기록된 말씀이나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와 같은 참 선지자를 통해 들려주시는 말씀을 거역하게 했다는데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거짓 예언자들을 “말씀을 훔치는 도둑으로 그들의 행위를 “절도죄”로, 또 자기가 받은 말씀도 아니면서 마치 자기가 받은 말씀처럼 “자기 말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 “도용죄”로, 거짓 꿈과 거짓 말씀으로 백성을 허황되게 속인 “사기죄”로 거짓 예언자들을 고발하신다.
    
*그들은 보내지 않았는데, 갔고, 명령하지 않은 것을 자기 맘대로 전했다. 그들이 하나님 노릇을 하였고, 하나님을 자기들이 믿던 우상 수준으로 전락시켜 버리고 말았다. 백해무익한 그들을 하나님은 반드시 치실 것이다. “하나님의 엄중한 말씀”이라는 말을 함부로 오용하는 그들이 도리어 “하나님의 엄중한 짐”이 되고 되었다. 그들은 이 엄중한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영원한 치욕과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주님, 제가 거짓 예언자일까 두렵습니다. 말씀만, 오직 말씀대로만 전하고 살아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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