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꾸준히, 끊임없이 … 그러나 스스로 [렘 25:1-14]
 – 2023년 08월 24일
– 2023년 08월 24일 –
예레미야는 요시야 왕 13년째부터 반복하여 여호와께 순종하라고 외쳤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유다는 “악한 길과 행위를 버리고 돌아오라”라는 예언자들의 선포를 거절했다. 여호와를 배반하고 우상을 섬긴 유다 백성을 여호와께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겨 징벌하신다.
    
    
1. 역사적 배경(1~2절)
25장은 24장 뒤에 배치되었지만, 시기적으로 약 7~8년 정도 앞선 여호야김 4년째 선포된 말씀이다. 왜 이렇게 연대 순서를 뒤집어서 기록했을까? 그것은 지금까지 선포된 하나님의 예언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인 듯하다. 본문의 주된 내용은 유다 백성들이 70년 동안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11~12절, 29:10에 따르면 “칠십 년”은 유다의 유배 기간이나 예루살렘이 폐허로 남겨지는 기간보다는 민족들이 패권을 장악한 바벨론에서 지배당하는 기간을 가리킨다. 바벨론의 역사 안에서 “칠십 년”은 다양하게 설명된다. 바벨론은 주전 539년에 메대-바사 왕 고레스에 의해 멸망하기에 종점은 분명하다. 그로부터 70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펼쳐진다. 주전 612년에 바벨론은 메대와 함께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웨를 점령한다(이 경우 73년). 주전 609년에는 하란을 점령하여 앗수르를 완전하게 멸망시킨다(이 경우 70년). 주전 605년에는 갈그미스에서 애굽과 싸워 승리한다(66년). 정확하지는 않지만, 예레미야서의 문맥은 세 번째 가능성을 지지한다.
    
“유다의 왕 요시아의 아들 여호야김 넷째 해”는 본문의 배경을 알려준다. 이 해는 주전 605년에서 604년으로 예레미야의 선포에 따르면 유다의 운명이 결정된 해이기도 하다(36:1; 45:1; 46:2). 선대 왕인 요시야가 주전 609년에 므깃도에서 전사하고 백성들은 급하게 여호아하스를 세워 왕으로 삼았지만, 3개월 동안 통치하다가 애굽으로 끌려갔다. 주전 608년 애굽은 대신 여호야김을 왕으로 세웠다. 그는 주전 598년까지 통치한다.
    
주전 605년 바벨론의 왕위 계승자였던 느부갓네살의 군대는 갈그미스에서 애굽을 대파하고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의 통치권을 손에 넣는다. 오래전부터 예레미야가 선포했던 북쪽에서 내려오는 재앙의 실체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느부갓네살의 아버지 나보폴라살이 갑작스럽게 죽고, 그는 애굽과의 갈그미스 대승 이후 급하게 바벨론으로 돌아가 주전 605년 7월 9일 왕위에 올랐다. 이 해가 바로 여호야김 통치 넷째 해되던 때였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 원년”이 말씀 선포의 역사적 배경으로 중요했음을 시사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근동 지역의 권력 지형이 요동치는 해에 주어졌다. 이를 통해 “유다의 모든 백성, 예루살렘의 모든 주님”이 들어야 할 말씀으로 강조된다.
    
*지금의 세계사적인 흐름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늘 나침판과 같이 우리의 걸어가야 할 방향을 가르쳐 준다. 코로나의 광풍이 지나가고, 전쟁의 여파는 전 세계 경제를 뒤흔들고 있다. 전통적인 강대국이라고 인식되었던 러시아와 중국이 흔들리고 있다. 이런 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깨닫게 하고 들려주는 것에 반응하고 들을 수 있는 민감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리라.
    
    
    
2. 예레미야의 고발(3~7절)
예레미야는 자신의 예언자적인 활동을 되돌아보면서 유다의 불순종을 포괄적으로 고발한다. “유다의 왕 아몬의 아들 요시야 왕 열셋째 해부터(주전 627년) 오늘까지(주전 605년) 이십삼 년 동안” 한결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으나 유다는 듣지 않았다(3절). 유다의 완고한 거절은 예레미야에게 국한된 반응이 아니었다. 이미 조상 때부터 유다는 예언자들의 선포에 귀를 닫았다. 하나님께서는 쉬지 않고 예언자들을 보내셨지만, 유다는 일관되게 거절하였다(4절).
    
이와 같은 유다의 모습을 “너희가 순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 3절), “너희가 순종하지 아니하였으며 귀를 기울여 듣지도 아니하였도다”(4절)로 표현하셨다. 유다의 불순종은 의지적이고 총체적이었다. 그들은 최소한의 존경심도 표하지 않았다. “그의 모든 종 선지자”(4절) 라는 표현을 통해 여호와와 예언자와의 관계를 주인과 종으로 표현하였는데, 이는 종(예언자)을 거절함으로써 유다는 주인(여호와)을 거절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예언자들을 보내 전하신 말씀은 한마디로 회개의 요청이었다. “주님께서는 예언자들을 시켜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각기 자신의 악한 삶과 온갖 악행을 그치고 어서 돌아오너라. 그러면, 나 주가 너희와 너희 조상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길이길이 살 것이다.” (새번역_5절) 6절은 이방 신들이나 우상을 섬기지 않는다면 여호와께서도 진노하지 않으시고 해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신다.
    
*회개 없이는 가나안도 없다. 가나안에서 살고 싶으면 우상을 떠나 가나안을 선물로 주신 여호와께로 동아와야 한다. 언약 백성의 터전으로 주신 땅이기에 언약을 파기했을 경우 가나안의 소유는 다시 원소유주인 여호와께로 돌아간다.
    
*그러나 유다는 이를 거절했다. 여호와의 명령을 어기고 우상을 숭배하여 화를 자초했다. 유다에 임하는 파국적인 재앙은 우상숭배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3. 심판 선언(8-14절)
유다는 멸망할 것이다. 하나님 심판의 도구는 주전 605년 갈그미스에서 애굽을 물리치고 근동의 패권을 차지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다. “내가 나의 종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을 시켜서 북녘의 모든 민족을 데려오겠다. 나 주의 말이다. 내가 이렇게 그들을 데려다가, 이 땅과 그  주민을 함께 치게 하며, 그 주위의 모든 민족을 치게 하겠다. 내가 그들을 완전히 진멸시켜, 영원히 놀라움과 빈정거림과 조롱거리가 되게 하고, 이 땅을 영원한 폐허 더미로 만들겠다.” (새번역_9절) 
    
느부갓네살이 지휘하는 군대는 “북녘의 모든 종족”을 포함하는 대규모 원정군이었다. 그의 군대는 자국 병사 외에 동맹국의 병사와 정복당한 민족이나 지역에서 징집한 병사들로 구성된 제국군이었다. 침략군의 규모가 이러하니 심판의 범위가 가나안 지역의 모든 나라로 확대된다.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종들(예언자들)의 말 듣기를 거절한 유다를 당신의 종(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보내 징벌하신다.
    
9-11절은 이 심판이 얼마나 혹독하게 집행될 것인지를 보여준다. 그의 군대가 침략한 나라는 모두 “놀램과 비웃음거리”(cf. 18:16; 19:8)와 “영원한 폐허”가 된다. 두려움을 야기할 정도로 귀신이나 살 정도로 폐허가 된다. 재건이나 회복을 기대할 수 없을 만큼 철저하게 파괴된다. 그 땅에서는 축제와 결혼은 물론 일상생활도 불가능해진다(10절).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아무리 척박한 곳이라도 있기 마련인 축제의 기쁨이나 신랑 신부의 환호가 사라져 버린다. 그뿐만 아니라 맷돌로 곡식을 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어두운 밤을 밝혔던 등잔 빛도 보이지 않게 된다. 주민들이 죽거나 다 떠났기에 온 땅이 사람이 살 수 없는 폐허와 황무지가 된다. 이 땅의 민족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겨야 한다(11절).
    
    
바벨론의 “칠십 년” 패권의 기한이 다 차면 여호와께서 “그들의 행위와 그들의 손이 행한 대로” 갚으신다(14절). 유다와 주변 나라들이 당한 대로 바벨론도 징벌받는다. 여호와께서 저들의 죄악을 물어 “바벨론의 왕과 그의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영원한 황무지로 만드신다(12절). 다른 나라들을 영원한 황무지로 만든 바벨론도 영원한 황무지가 된다.
    
칠십 년 동안 민족들의 섬김을 받았던 바벨론이 “여러 민족과 큰 왕들”을 섬기게 된다(14절). 민족들을 지배하던 바벨론은 민족들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다. 바벨론의 멸망은 칠십 년 후의 일이기는 하지만 예레미야가 선포한 대로 반드시 성취된다(13절).
    
    
    
나는?
-고집과 고집이 충돌했다. 하나님의 고집과 유다의 고집이다. 하나님의 고집은 살리기 위한 고집이고 유다의 고집은 죽기 위한 고집이다. 하나님은 무려 23년 동안 부지런히(꾸준하게) 말씀을 전하셨다. 끊임없이 선지자들을 보내셨다. 고집스럽게 그들을 향해 외치셨다. 호소하셨다. 때로는 달래기도 하셨다. 하지만 유다는 고집스럽게 그 종을 외면했고 말씀에 귀를 틀어막았다.
    
*하나님의 사랑의 고집도 대단하지만, 백성의 완악한 고집은 더욱 대단하다. 따라서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어떤 변명도 할 수 없다. 꾸준히 보냈으나 끊임없이 불순종하는 유다를 어찌할까…. 그들의 죄악된 습성이 고스란히 우리 안에 남아 있기에 우리도 아차 하는 순간에 그들과 다를 바 없이 끊임없이 불순종하면서 순종하고 있으므로 착각하지는 않을까? 두려운 일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데도 자유의지를 지우지 않는 인격적인 사랑이시다. 그러므로 심판의 책임은 하나님의 사랑과 이해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죄악을 고집하는 유다에게 있다. 죄성과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가는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유다를 황무지로 폐허로 만드실 것이다. 그 도구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다. 무려 70년 동안 기쁨과 즐거움의 소리, 혼인 잔치의 소리가 사라진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긴 그들이 원하는 대로 바벨론 왕을 마음대로 섬기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우상의 종이 되는 삶이 어떤 삶인지를 처절하게 겪어보게 하실 것이다.
    
*느부갓네살을 통해 가나안 땅을 짓밟게 하신다.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 선물로 주신 땅을 폐허가 되게 하신다. 하나님 나라 백성 되어 하나님의 은혜의 터 안에 살고 있는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끊임없이 불순종하는 삶을 반드시 심판하신다. 삶이 폐허가 되게 할 경고에 귀를 기울이고 폐허와 황무함으로 가는 길에서 벗어나야 한다.
    
    
-열방과 통치자를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시지만, 그들의 불순종과 악행에 대하여도 눈감지 않으신다. 근동의 절대 지배자일 것 같았던 바벨론도 하나님의 때가 되면 다 멸망할 것이다. 다른 열방들도 예언하신 대로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심판은 영원한 심판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를 따라 이루어지는 섭리이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세상 힘의 논리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대로 이루어지는 섭리를 알게 할 것이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역사에 등장시키셨다. 유다를 심판하시기 위함이었다. 심판의 대리자로 세우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세상 모든 통치자를 세우셔서 당신의 뜻 안에서 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하나님께서 폐하신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앞에 겸손하게 그의 통치를 받아들이며 나아가야 한다.
    
*오래도록 참으시며 자기 백성을 돌이키려고 하셨다. 예레미야를 통해 23년 동안이나 예언하게 하셨고, 다른 많은 선지자를 계속 보내 죄악에서 돌이키도록 요청하셨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나의 문제를 지적하시고 바른 신앙의 결단을 촉구하실 때 나의 반응은 어떠한가? 듣고 받아들여 돌이키는가? 듣기를 거부하고 완강히 고집을 피우는가?
    
*꾸준히, 끊임없이 일렀으나…. 그러나 스스로 해친 유다의 길을 따르지 않겠다. 꾸준히, 끊임없이 일러주신 말씀 따라 살겠다!
    
 
**지난 2개월동안 예레미야를 꾸준히 묵상했다. 유다의 강팍하고 패역하며 오래도록 귀 기울여 듣지 않고 끝까지 불순종하는 모습이 우리와 우리의 교회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음에 낙담이 된다. 지금이 그때보다 훨씬 더 나은 순종의 환경속에 있음이 분명한데, 우리는(나는) 왜 끈질기게 불순종과 연합할까? 하려고 할까? 주여….
 
**하나님의 심판은 일상의 기쁨과 즐거움이 끊어지게 되리라는 것이다. 비웃음과 놀림거리가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아! 그런데 이건 지금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코로나와 코로나 이후 일상의 즐거움보다 고민거리가 더 늘었다. 교회를 향한 비웃음과 놀림거리는 이제 당연한듯하다. 세상의 놀림이 더 이상 충격적이지 않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어쩌면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너희 손으로 만든 것”, “내 것”에 얼마나 집착하는 세대인지 모른다. 공동체보다는 자기 이익이 먼저다. 그래서일까? 지금 이 땅의 지도자들은 자기 욕심 채우기 위해 지도력을 헛되게 낭비하고 있다. 들려오는 소식들은 하나같이 분노가 차오르게 한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지금 우리가 이런 지배를 받는 것은 지금까지의 행위와 그의 손이 행한대로 갚으시는 것이란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지도자들을 선출할 때 늘 기준이 “경제”였다. 최근에는 “공정”이라는 포장지에 휘둘린 “이기심”이었다. 결국 자기 욕심대로 선출했다. 그토록 공정을 부르짖지만 너무도 황망하게도 가장 불공정한 시간속에 우리는 신음하고 있다.
 
**일상의 웃음소리가 옅어지고, 세상에 대한 낙심과 포기가 짙어질 수록 황폐해지는 삶을 선명하게 보여진다. 그런데 이 모든 상황은 결국 이 땅의 하나님 백성들이 “꾸준히, 끊임없이” 말씀해주시고 요청하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올바른 삶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핑계할수 없다. 본문은 23년동안 꾸준히 외쳤으나 외면하고 불순종했다고 했다. 우리는 어쩌면 어느때부터인지 모르지만 이미 “그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제대로 듣지도 제대로 순종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길은 단 하나다! “다시 돌아가면 된다!”
 
 
    
    
*주님, 지독스럽게 듣지 않는 완고함이 나에게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황무지가 될 것을 알기에, 푸른 초장일 때 더욱 민감히 듣고 순종하며 살겠습니다.
*주님, 반드시 성취될 말씀을 보게 됩니다. 말씀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려 할 때 더욱 선명하게 말씀을 깨닫게 도와주십시오. 말씀만 굳게 붙잡겠습니다. 말씀을 살아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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