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다윗이 나이가 많아 [왕상 1:1-10]
 – 2023년 09월 01일
– 2023년 09월 01일 –
왕상 1~2장은 사무엘상에서 시작된 왕위 계승사의 마지막 부분으로 어떻게 솔로몬이 아도니아 대신에 왕이 되었는지 말해주고 있다. 다윗이 나이 들어 쇠약해졌고, 그 틈을 타서 아도니야는 요압과 공모하여 왕위에 오를 계획을 세운다. 그는 자신을 지지할만한 인물들을 모두 모아서 잔치를 연다. 여기에 가담한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을 소개한다.
 
 
 
1. 다윗의 말년(1~4절)
다윗의 시대가 막바지에 이른다. 이스라엘은 다윗의 뒤를 이어갈 왕위 계승(1~2장)이라는 중대사를 앞두게 된다. 이새의 아들로 등장한 다윗은(삼상 16장) 목동에서 군사령관, 사울의 사위를 거쳐 30세에 마침내 왕좌에 오르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에 오른 그는 헤브론에서 7년 6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33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다(삼하 5:4~5). 용맹한 왕이자 전사였고 찬양과 믿음의 신앙인이었던 다윗이 어느덧 인생의 끝자락에 이르렀다. 몸이 노쇠하여 어떤 옷이나 덮개를 덮어줘도 몸의 온기를 보존하지 못한다(1절). 시종들은 왕을 위하여 아름다운 처녀를 찾아서 몸을 회복시키려 했으나 허사였다.
 
다윗의 건강은 시종들의 손에 달리지 않았다. 또 그의 몸 상태는 이스라엘의 현 상태를 반영하고 있었다. 이토록 몸이 노쇠하여졌지만, 그는 후계자를 세워놓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 알 수 없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 것인지, 왕위 세습에 대한 환경이나 권한이 자신에게 없다는 인식 때문인지 몰라도 그의 몸 상태가 매우 좋지 않은 상태에 이르렀어도 후계자를 세우지 않은 것이다.
 
시종들은 다윗의 회복을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을 것이다. 이들의 의도는 결국 다윗이 기력을 회복시키고 국력을 지키려는 충성심도 있었겠지만, 한편으로 다윗의 건재함이 결국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 허사로 돌아간다.
 
*사명을 다하는 순간까지 건강하면 오죽이나 좋을까…. 하지만 기력이 쇠하여지고 더는 스스로 무엇인가를 행할 수 없을 때까지라도 변함없이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인내할 줄 아는 믿음을 붙잡고 싶다.
 
*인간적인 방법과 수단으로 무엇인가를 지키려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수넴 여인 아비삭을 치료의 도구로 생각하는 일이 과연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까? 결국 자신들의 욕심을 지키고 이루기 위한 무리수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오히려 혼란만 가중할 뿐이다.
 
*다윗의 노쇠함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는 육신이 쇠하여 가는 그것만큼 이스라엘의 미래를 위한 정치적인 준비를 철저하게 해야 했다. 하지만 그의 쇠락함과 정치적인 무기력은 함께 일어나고 있었다. 더 이상 왕의 구실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기력해졌지만, 이 상황이 되도록 정치는 더욱 무기력해진 것이다. 그런데도 다윗은 왕위를 내려놓지 않았고 왕위 계승을 위한 어떤 조치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이스라엘 왕정에 위기와 불안이 엄습한다. 신하들도 왕이 후계 문제를 해결하도록 제안하기보다 그의 체력을 회복시키기 위한 젊은 처녀를 구하자는 방책만을 낼 뿐이었다. 이스라엘의 미래보다 지금 자신들의 안위를 더 추구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바람과 달리 다윗의 상태를 백약이 무효했다. 그만큼 위중한 상황이었다.
 
 
 
2. 스스로 왕이 되려는 아도니야(5~10절)
다윗의 기력이 쇠하여진 것을 ‘학깃’에게서 낳은 아들 아도니야가 알게 된다. 그는 다윗의 넷째 아들(삼하 3:4)이다. 첫째였던 암논은 다말을 강간하여 압살롬에게 죽임을 당했고, 셋째인 압살롬은 반란을 일으켜 요압에게 죽임을 당했었다. 둘째인 아비가일의 아들 길르압은 사무엘서에 언급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일찍 죽은 것으로 여긴다.
 
그렇다면 아도니야는 다윗의 아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고 장자로서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스스로 높여” 왕이 되려 했다. “스스로 높였다”라는 표현은 다윗의 허락 없이 왕이 되려고 했다는 의미이다. 그는 “내가 왕이 될 것이다” (5절) 라고 말하며 왕권에 대한 강한 열망을 드러내며 실행한다. 그는 병거와 기병과 호위병 50명으로 친위대를 구성하고 자신을 스스로 높인다. 이런 모습은 삼해 15:1에서 다윗에게 반란을 일으키기 전의 압살롬의 모습과 같다.
 
그는 매우 잘생겼다. 이것만으로도 반역자 압살롬을 연상시킬 만하다. 하지만 긍정적으로만 비치지 않는다. 또 매우 특이한 표현이 기록되어 있는데, “다윗은 아도니야를 기르면서 한 번도 야단을 치지 않았다(6절)”라는 것이다. 즉 외모는 준수했을지 몰라도 아버지가 그의 행실을 제대로 훈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영향 때문에 아도니야가 자고 하고 자만하며 교만하게 되지 않았는지 충분히 짐작하게 된다.
 
*자녀 양육에 대한 기본적인 애정과 질서, 목표와 방법은 문화마다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백성의 자녀 양육은 성경에 이른 바와 같이 “주의 교양과(말씀과) 훈계로 양육하고 주님의 방법으로” 길러야 한다. 문제는 다윗은 밧세바 사건 이후로 자녀들에게 떳떳하지 못함으로 아버지로서의 훈계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짐작이 간다. 자신의 도덕적인 부족함이 자녀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양육하는데 가시가 되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자기를 위해 살아온 아도니야는 아버지 다윗과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오직 자신을 위해 탐욕을 채우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서슴없이 반역을 도모하는 무뢰한이 되어 버린다.
 
 
*이런 아도니야를 지지하며 따른 이들과 다르지 않은 이들을 소개하며 왕위 계승 과정의 배경을 제공한다.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이 아도니야를 지지하며 따르고, 제사장 사독과 브나야, 선지자 나단과 시므이와 레이, 그리고 다윗의 용사들이 따르지 않는다.
 
아도니야를 지지하며 따른 요압과 아비아달은 다윗의 군대 장관과 제사장이었다. 다윗 정권의 실세였다. 다윗과는 생사고락을 함께했었다. 하지만 이들은 다윗이 늙고 힘이 없어지자 새로운 권력으로 눈을 돌리고 만다. 이를 통해 자신들의 권력을 이어가려 했다.
 
그러나 다윗의 신하들이 모두 이를 따르지 않았다. 제사장 사독, 군대 장관인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 선지자 나단과 시므이와 레이를 비롯한 다윗의 용사들은 아도니야의 편에 서지 않는다. 아도니야가 이들을 솔로몬과 함께 자신의 잔치에 초청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솔로몬을 지지하는 세력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미 왕궁에서는 아도니야와 솔로몬의 세력으로 나뉘어 서로 견제하며 왕이 계승을 위한 암투를 벌이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아도니야는 왕권을 잡기 위한 전초 작업으로 자신의 세를 과시하고 지지를 호소하며, 미래 왕으로서의 권위와 힘을 보여 주기 위해 이느로겔 근방 소헬렛 바위 곁에서 큰 잔치를 벌였다. 이렇게 왕권을 잡기 위해 세력을 구축하는 모습은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이 선택하신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히 무시하는 태도이다.
 
왕이 되고 싶으며 먼저 하나님께 물어야 했다. 첫 왕 사울이나, 그의 뒤를 이은 다윗도 하나님께서 왕으로 선택하시고 세우셨다. 그런데 아도니야는 하나님께 묻지 않고 고대 근동의 관습대로 현재 장자인 자신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고 그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뜻대로 잘 다스리는 존재라는 가장 기본적인 사상을 망각한 것이다.
 
 
 
나는?
-기력이 쇠하여진 다윗과 용모가 준수하고 세력을 강성하게 규합하는 아도니야의 모습이 선명하게 대조된다. 어떤 정치적인 결정조차 지혜롭게 내리지 못하는 다윗의 무기력과 제 생각과 계획대로 결정하고 나아가는 아도니야의 모습도 대비된다. 또, 늙은 왕을 위해 어떤 방법도 마다하지 않고 심지어 젊은 여인을 구하여 시중들도록 노력하는 신하들의 모습과 이렇게 무기력해진 왕보다 다음 왕이 될만한 젊은 아도니야에게 야합하는 요압과 아비 이달의 모습도 비교된다.
 
-우리 또한 이런 선택과 결정을 내려야 할 때를 직면할 때가 있을 것이다. 한없이 초라하지만 끝까지 충성해야 할 상황과 대상, 인간적으로 강력한 세력과 나름대로의 미래전략을 가진 상황과 대상 가운데 선택해야 할 상황 말이다.
 
-본문은 인간적인 조건(막강한 군사력과 준수한 용모, 충만한 자신감)을 따라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의 위험성을 “압살롬”을 연상시키는 표현을 통해 경고한다. 압살롬은 탁월한 능력과 빼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 뜻대로 왕이 되려 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압살롬처럼 부족한 것 없는 아도니야의 조건을 보고 선택하면 안 된다. 압살롬처럼 비참해질 것을 역사의 교훈에서 배워야 했다. 세속적인 조건의 완벽함 때문에 자만하고 우쭐해하는 그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 겉으로 보기에 “힘” 있는 것을 쫓는 어리석음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보이지 않지만 진정한 힘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살피는 것이 더디 가는 것 같지만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길이다.
 
-눈에 보이는 권력과 힘을 쫓아다니는 지도자들을 경계해야 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끝까지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인지를 판단하고 결정하는 신중함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뜻과 편에 서는 지혜로움을 늘 추구해야 한다.
 
-겉으로 보이는 다수를 손쉽게 선택하고 동참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뜻이 소수에게 있다면 고된 길이 뻔히 보이더라도 하나님의 편을 선택해야 한다. 다수가 항상 하나님의 뜻은 아니다. 소수라도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분명하게 보인다면 기꺼이 소수의 불편함을 받아들여야 한다. 진리를 따라 행하는 삶은 다수가 지지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복종하는 소수의 길을 걸어야 할 때가 더 많다.
 
 
-아도니야의 교만한 태도는 아버지 다윗의 양육에 원인이 있었음을 열왕기 저자는 지적한다. 압살롬처럼 자기가 왕이 될거라면서 후계자처럼 행세하고 다니는 그를 제대로 훈계 한 번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의 아버지 다윗은 아도니야를 꾸짖지도 않고, 어찌하여 그런 일을 하느냐고 한 번도 묻지도 않았다. 그는 압살롬 다음으로 태어난 아들로서, 용모가 뛰어났다.” (새번역_6절)
 
-인격적인 교육한다고 훈계를 아끼는 우리 자녀들이 버릇없고 권위를 우습게 아는 아이로 성장하는 것을 외면하고 있지 않은가? 잘못한 자녀를 섭섭하게 하지 않으면 아도니야처럼 그 자녀가 언젠가 부모를 섭섭하게 할 것이다.
 
 
-아도니야가 자신의 잔치에 초대하지 않은 무리들이 있었다. 이들은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준비되었을 반역의 도모에 동참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끝난 이들이다. 아도니야가 이들을 초청하지 않은 것은 이들이 협력의 대상이 아니라 숙청의 대상으로 결론 내린 인물들이었을 것이다. 이런 인물이 되는 것은 단기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래도록 꾸준하므로 살아내야 사람들이 인정할 만큼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마찬가지다. 특별한 행사 몇 번 했다고 우리의 삶이 세상과 다른 길을 걷는다고 인정받지 못한다. “오래도록 꾸준하게” 말씀을 따라 성실하게 살아낸 흔적들이 쌓여야 가능하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소중한 기회이다.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낼 기회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기회를 따라 세월을 아끼며 성실하게 살아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확연하게 구분될 것이다.
 
*나는 부디 오래도록 꾸준하게 주의 말씀을 따라 성실하게 살아내는 삶이기를 바란다. 오늘이라는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버리기보다 한 가지라도 주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살아내기를 포기하지 않는 삶이고 싶다.
 
 
 
*주님, 열왕기 묵상의 여정도 주님께서 “들려주시고, 깨닫게 해주시고, 순종하여 살아내도록”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주님, 다윗처럼 무기력하게 될 때까지가 아니라 언제라도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다음 세대가 이어받을 사역 철학과 자세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을 잊지 않겠습니다.
*주님, 겉으로 보이는 세력이 아니라 늘 하나님의 뜻이 있는 곳을 찾아 순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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