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이스라엘의 갈림길, 어찌했어야 했나? [왕상 12:1-11]
 – 2023년 10월 03일
– 2023년 10월 03일 –
12~14장은 예고된 이스라엘의 분열 과정과 남북 이스라엘의 초대 왕들을 기술한다. 솔로몬의 뒤를 이은 르호보암이 12:1~24과 14:21~31에서 기술되고 사이에 여로보암 이야기가 배치되었다. 하나님께서 예고하신 이스라엘의 분열이 가까워져 오고 있다. 솔로몬의 죽음 이후 르호보암은 중대한 결정 앞에 놓인다. 북쪽 지파로부터 왕권을 인정받기 위해 세겜으로 간 르호보암은 여로보암과 북쪽 지파들을 만났다. 그들은 백성의 멍에를 가볍게 해주는 조건으로 그를 왕으로 삼겠다고 말한다. 이 요청 사항을 들은 르호보암은 원로들과 젊은 신하들과 의논하게 된다. 원로들은 백성을 섬기는 자가 되라고 조언하고 젊은 신하들은 그들을 징계하라고 부추긴다.
 
 
 
1. 르호보암과 여로보암의 만남(1~3절)
솔로몬이 죽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으로 세움을 받기 위해 세겜으로 간다(1절). 세겜은 므낫세 지파의 한 도시로 예루살렘 성전이 생기기 전부터 매우 중요한 종교적 중심지였다. 르호보암이 온 이스라엘이 그를 왕으로 삼고자 하여 세겜으로 간 것은 그만큼 다윗과 달리 정치적인 입지가 약했다는 방증이다. 사무엘하 5:1에서는 온 이스라엘이 다윗을 왕으로 삼기 위해 다윗의 수도인 헤브론으로 왔었다고 증언한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자신의 근거지 예루살렘을 떠나 “온 이스라엘”이 모여 있는 세겜으로 갔다.
 
*이는 솔로몬이 죽었을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솔로몬 정권에 대한 불만이 많았고 다윗 가문의 사람을 왕으로 섬기는 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이런 상황에서 르호보암은 ‘온 이스라엘’의 요청으로 왕으로 인정받기 위해 세겜에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또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북쪽 이스라엘과의 갈등이 솔로몬 때 거의 등장하지 않았지만, 르호보암이 등극할 때 남과 북의 갈등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일부 이스라엘 사람들이 솔로몬의 얼굴을 피하여 애굽으로 피신해 있던 여로보암을 부른다(2절). 그는 솔로몬이 죽은 후에도 여전히 애굽에 머물고 있었다. 그를 부른 이유는 여로보암은 애굽으로 도망가기 전, 사람들을 모아 솔로몬에게 반역했었고 이에 따라 애굽에 정치적인 망명을 한 상태였다. 이런 이유로 백성 중 일부는 르호보암에게 맞설 대항마로 여로보암을 불러온 것으로 추측된다. “여로보암과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와서”(3절) 라는 표현은 그가 이미 회중의 지도자로 서 있음을 암시하게 한다.
 
 
 
2. 협상(4~5절)
세겜에 모인 백성들은 르호보암을 왕으로 승인하기 전에 조건을 제시한다. 솔로몬이 자신들의 멍에를 무겁게 했으니 이제 노역과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해달라고 요청하며 만약 그렇게 하면 르호보암을 섬기겠다고 이야기한다. “무거운 노역과 무거운 멍에”를 반복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솔로몬이 지운 노역과 세금이 너무 무거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왕상 10:14에 따르면 솔로몬은 1년에 세금으로 금 666달란트를 거뒀고, 이것으로 금잔과 금방패를 만들고 레바논 궁의 모든 기물을 금으로 만드는 등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다. 여기에 천 명이나 되는 부인과 많은 병거와 말이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무역에 능하고 주변 나라들로부터 조공을 받아도 필요한 재물을 충당하려면 세금을 과중하게 부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한 솔로몬은 20년 이상 계속 건설 역사를 진행했고 이 일에 부역을 시켰다.
 
*백성들의 요청에 담긴 그들의 생활은 “왕은 부귀영화를 부렸지만, 자신들은 왕의 부귀영화를 위해 삶이 피폐했다”라는 것을 드러낸다. 솔로몬이 죽자 이런 백성들의 호소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솔로몬은 초기에는 선하고 지혜로운 왕이었으나 부유해지고 힘이 생긴 후에는 하나님을 떠나면서 탐욕스러운 폭군이 되었다는 뜻이다. 백성들은 이런 솔로몬의 폭정을 참고 견뎌 내다가 르호보암이 등극하자 새롭게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르호보암은 뜻밖의 제안을 듣고 3일 동안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요청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돌려보낸다.
 
 
 
3. 르호보암의 고뇌와 의논(6~11절)
르호보암은 백성들의 제안이 심각하다는 것을 인식했을 것이다. 먼저 솔로몬을 섬겼던 노인들에게 충고해달라고 겸손하게 요청한다. “노인들(자켄)”은 늙은 사람이라는 의미보다 솔로몬 왕궁의 원로 대신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임금님께서 이 백성의 종이 되셔서, 그들을 섬기려고 하시면, 또 그들이 요구한 것을 들어 주시겠다고 좋은 말로 대답해 주시면, 이 백성은 평생 임금님의 종이 될 것입니다.” (새번역_7절) 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이들의 자문을 “버린다(무시했다).”
 
대신 자기와 함께 자라난 어린 사람들과 의논한다. “어린 사람들”은 나이가 어리다는 의미가 아니다. 르호보암과 같이 솔로몬의 부유함으로 자란 젊은 귀족들, 왕족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르호보암이 41세에 왕이 올랐으니(14:21), 육체적으로 젊다는 것보다 원로들보다 정신적으로나 정치적인 면에서 미숙하다는 의미이다. 그럴 뿐만 아니라 이들은 늘 왕궁 중심으로 생활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왜 이런 요구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이들은 백성들이 바친 것을 갖고 부유하게만 자랐기에 백성들이 세금을 바치고 노역을 제공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더 나아가 백성들이 이것을 거부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백성들은 단지 왕의 통치 대상이며 억압의 대상으로만 이해한 듯하다. 그렇기에 르호보암의 “어린 친구들”은 철저하게 왕인 르호보암의 처지에서만 생각했다.
 
이들은 르호보암을 부추긴다. 르호보암이 솔로몬보다 더 위대한 왕이니 솔로몬의 멍에보다 더 무거운 멍에를 매게 하고, 만약 이에 응하지 않으면 솔로몬의 채찍보다 더 강력한 전갈로 징계하겠다고 선언하라고 조언한다. (10~11절).
 
*르호보암과 어린 친구들의 대화를 읽다 보면 솔로몬의 통치가 말기로 갈수록 강압적인 방법(채찍)으로 백성들을 착취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또 르호보암이 전갈(모양의) 채찍으로 다루겠다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는 솔로몬의 폭정보다 더 고통스럽게 다루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라는 것이다.
 
*놀랍게도 르호보암은 더 강압적으로 백성들을 다스리라는 어린 친구들의 말을 “좋게 생각”한다. 이는 르호보암이 하나님께서 왕을 세우신 이유에 대해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또 백성에 대한 공감과 애정이 전혀 없는 것도 드러낸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왕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전혀 다른 마음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늘 살피시고 짐을 덜어주시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
 
*르호보암은 자신의 이익과 권위만 생각하고 있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주변의 어린 친구들이 그에게 조언한 내용이 그 증거이다. 그의 성격을 너무도 잘 알고 있을 어릴 적부터 함께 지낸 친구들은 그가 무슨 말을 해야 기뻐할 것인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왕이 된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해 이런 조언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많은 성도가 르호보암보다 그의 어린 친구들의 “무지와 독선, 어리숙함”의 조언에 더 강조를 두고 르호보암의 진정한 성품 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지만, 생각해 보라. 그는 왕이다. 왕의 심기를 건드리면서 조언할 신하들은 의외로 흔치 않다. 또 “함께 자라난 소년들”에게 물어보았다면, 그들이 얼마나 르호보암을 잘 이해하고 있을지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함께 자란 소년들의 조언은 그들의 생각과 마음이 아니라 철저히 르호보암의 마음에 맞춰주는 조언이었을 가능성이 큰 이유다.
 
*르호보암의 이런 독선적인 성격은 이스라엘을 분열 왕국으로 만드는 원인이 되고, 하나님의 예언을 성취하는 원동력이 된다.
 
 
 
나는?
-12장부터는 다윗 왕권을 통해 나타내려 했던 하나님 나라의 공의와 정의가 그 왕권에 의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신명기 17장과 사무엘상 8장에 기록된 왕 제도에 대한 예언과 늘 비교하면서 열왕기를 읽고 묵상하면 그때의 역사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보일 것이다.
 
-솔로몬이 죽고 왕위를 계승하는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뉘게 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또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에게 약속하신 말씀이(11:31)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먼저 이스라엘 온 회중이 르호보암에게 자신들의 고역과 멍에를 가볍게 하면 왕으로 섬기겠다고 말했다(4절). 이 요구는 얼핏 아주 정상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매우 위험한 사상이 담겨 있다. 그들은 왕을 세우는 권한이 자신들에게 있는 것처럼 오해하고 행동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께서 친히 택하시고 세우신다. 백성들은 그 왕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단순한 진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의 만왕의 왕으로 보내셨는데, 우리가 과연 예수를 나의 왕으로 인정하며 그의 통치를 받고 있는가? 혹시 내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왕을 내가 뽑고 인정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가와 같은 교만한 마음을 돌아보게 한다.
 
*솔로몬을 섬겼던 늙은 신하들은 르호보암에게 백성들의 종이 되어 그들을 섬기라고 권면한다. 이것은 왕권을 강화하려는 시각으로 보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권면일 수 있다. 그러나 “종이 되어 백성들을 섬기라”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왕을 세우신 목적과 일치한다. 또 왕으로 이 땅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의 목적과도 같다. (막 10:45).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은 세상의 일반적인 방법과는 확연하게 다르다. 세상은 힘의 원리를 따라 강압하고 억압하며 나의 유익을 쟁취하라고 부추기나, 하나님 나라는 내가 가지고 있는 지위와 역할을 통해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다.
 
*지금 내가 결정하는 일들이 사람을 섬기는 일이 맞는가? 그렇다면 나는 지금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따라 순항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결정들이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 원리에 맞지 않는다면 과감하게 내려놓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멋진 삶이다.
 
*나는 나의 지위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교회 공동체를 섬기는 데 전력으로 사용하고 있을까?
 
 
*르호보암과 “함께 자란 소년들”은 백성들을 더 무거운 멍에와 전갈 채찍으로 다스리라고 권면한다. 폭정과 폭압으로 왕의 힘을 나타내고, 주어진 힘으로 백성들을 억누르라고 한다. 자신의 힘을 사용하여 상대방을 강압적으로 억눌러 자기 뜻을 관철하려는 것은 하나님 나라 원리가 아니다.
 
*나는 세상의 원리나, 그 원리에 적당히 타협하는 세상의 가르침을 따라가는가? 아니면, 섬기는 종의 모습을 끝까지 놓지 않으시려는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는가? 힘의 논리가 아니라 사랑과 섬김의 원리로 관계와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가?
 
 
*만약 나에게 어떤 조언을 해달라고 요청이 온다면 어떤 조언을 할 수 있을까? 아무쪼록 지혜로움이 삶에 깊이 들어와 지혜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뜻을 헤아리도록 조언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
 
*또 르호보암이 선대 왕이었던 솔로몬을 섬겼던 원로들에게 물었을 때 그들은 왕은 백성을 섬기는 자임을 상기시키고 좋은 말로 대답하라고 당부하는 것을 보면서 내가 듣고 싶은 말이 아니어도 지금 필요한 말, 정곡을 찌르는 조언을 겸손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영적 민감함이 무뎌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르호보암은 자기 새끼손가락이 아버지 솔로몬의 허리보다 굵다고 하며 자기 능력을 과신한다. 자기를 비워 섬김의 자리로 내려가는 대신에 당장 효과를 볼 수 있는 힘의 통치를 강행하였다. 그는 솔로몬의 통치 결과로 누리는 현재의 부요함과 번영과 강성함이 다윗을 생각해 주신 하나님의 긍휼인 것을 몰랐다.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알고 있더라도 이해조차 하지 못하는 이들의 역사의식 부재와 망각과 태만을 바라보며 결국 이것이 이스라엘을 분열하게 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르호보암은 결국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듣기 위해 “함께 자라온 소년들”에게 조언을 구한 것이다. 이런 낭패가 없다. 11장에서 아히야 선지자를 통해 여로보암에게 북이스라엘의 왕으로 삼겠다고 하셨으나, 르호보암에게 자신이 이스라엘의 분열 당사자가 되지 않을 기회를 주셨지만, 이를 깨닫지 못했다.
 
*선대 왕이었던 솔로몬의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는 것에만 온 마음이 가득 차 있던 것이 틀림없다. 자기가 듣고 싶은 말을 듣기 위해 하나님께서 온 이스라엘을 통해 들려주시는 기회의 말을 듣지 못했다. 아…. 어리석다. 나도 언제든 이럴 수 있겠다 싶다. 내가 듣고 싶은 말 때문에 하나님께서 상황과 여건, 사람들을 통해 들려주시는 말씀을 놓쳐버릴 수 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기회일 수도 있지만 듣지 못했다. 아니 듣지 않았다.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대로 듣기 원한다. 보여주시고 제공해 주시는 긍휼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
 
 
 
*주님, 지혜로운 이들의 조언을 분별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삶의 진정한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주님, 나는 언제나 틀릴 수도, 올바르지 못할 수도, 감당하지도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늘 나와 함께 하심은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주님, 제가 듣고 싶은 말에 집착하지 않겠습니다.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을 잘 듣도록 늘 마음과 귀를 열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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