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하나님의 불쾌함, 단호함…. 그러나 깨닫지 못하는 여로보암 [왕상 13:1-10]
 – 2023년 10월 06일
– 2023년 10월 06일 –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벧엘 제단을 향한 여호와의 심판 말씀이 예고된다. 하나님은 심판 예고를 통해 여로보암의 우상숭배를 비롯한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 큰 죄악임을 확실하게 밝히신다. 또한 여호와의 말씀이 성취될 것을 확증하는 징조도 보여 주신다. 하지만 여로보암은 경고받고, 징조를 목격하고, 손이 마비되었다가 나은 것을 경험하였어도 각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을 회유하려 든다. 반면 하나님의 사람은 여로보암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여호와의 명령을 따른다.
 
여로보암의 통치기록(12:25~14:20)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그의 배역 진행 과정(12:25~33), 그의 죄로 인한 왕조와 북이스라엘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 예언(13:1~34), 여로보암의 죄와 심판(14:1~20)이다. 특히 13장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이 여덟 번 등장하여(1, 2, 5, 9, 17, 18, 20, 32절) 여로보암의 죄를 고발하고 심판을 선언하는 통일성을 보여 준다. 또한 선포된 말씀이 성취됨을 보여 줌으로써 말씀의 진실함과 완전함을 증명한다.
 
 
 
1. 벧엘 제단에 대한 심판 선언(1~2절)
여로보암이 지은 죄는 심각했다. 자신의 정치적 유익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절기와 제사를 드리러 가는 것을 막았다. 금송아지를 만들어 벧엘과 단에 두고 이것들이 애굽에서 자신들을 끌어낸 여호와라고 기만하여 우상을 숭배하게 했다. 또 레위인이 아닌 사람을 제사장으로 세우고 절기도 마음대로 만들면서 율법을 어겼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유다에서 벧엘로 올려보내신다.
 
“하나님의 사람”은 “선지자”의 다른 호칭이다. 13장 11절부터 벧엘의 선지자가 새로 등장하기에 혼돈을 피하려고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호칭을 사용했을 것이다. 그가 벧엘로 올라온 것은 “여호와의 말씀”을 따른 것이다(1절). 남 유다의 선지자가 말씀을 전하러 북이스라엘로 온 것은 이곳에 말씀을 대언할 선지자가 없었음을 암시한다. 이와 관련하여 역대하 11:14에서는 여로보암에 파직당한 제사장과 레위인 들을 따라 북쪽의 신실한 백성들이 유다와 예루살렘으로 떠났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선지자 대부분이 남 유다로 내려왔을 것이다.
 
마침, 여로보암이 분향하기 위해 제단 위에 서 있었다. 하나님의 사람은 “제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한다. “제단아, 제단아, 나 주가 말한다. 다윗의 가문에서 한 아들이 태어난다. 그 이름은 요시야다. 그가 너의 위에 분향하는 산당의 제사장들을 너의 위에서 죽여서 제물로 바칠 것이며, 또 그가 너의 위에서 그 제사장들의 뼈를 태울 것이다.” (새번역_2절) 후에 다윗 가문에 요시야라는 후손이 태어나고 그가 제단 위에서 산당의 제사장들을 제물로 바치며, 사람의 뼈가 제단 위에서 태워질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산당의 제사장들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제물로 바치다(자바흐_2절)”는 기본적으로 ‘가축을 죽이다’라는 뜻이다. 이 말씀이 그대로 성취된 열왕기하 23:20에서 이 단어를 “죽이다”로 번역한다. 여로보암은 자신이 만든 절기에 자신이 세운 제사장들과 함께 분향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사람은 그들을 향해 벧엘 제단이 부정하게 될 것을 여호와의 말씀으로 선포한다. 그 제단을 향해 “제단아 제단아”라고 부르며 제단과 관련하여 일어날 일을 구체적으로 선포했다(2절).
 
이 예언은 300년 후에 남 유다 요시야 왕에 의해 성취된다. 그리고 32절에 따르면 이 일은 벧엘 제단에서만 일어나지 않고 북이스라엘 전역에서 일어날 것이다. 요시야는 종교개혁을 단행하면서 우상을 섬긴 제사장들 죽여 뼈를 불태웠고 이미 죽은 제사장들의 뼈를 무덤에서 빼내어 불태웠다(왕하 23:15~20). 이때는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한 지 약 100년이 지난 후였다. 요시야는 종교개혁을 추진하면서 벧엘과 단과 산당을 헐고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로 만들었다. 또한 산당 부근의 무덤에서 우상 숭배자들의 뼈들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 불살라 단을 더럽혀, 제단과 산당의 기능을 무력화하였다. 산당의 제사장들도 제단 위에서 죽인 후에 그들의 뼈를 단 위에 불살라 단을 훼손했다. 요시야는 벧엘뿐 아니라 북이스라엘 각 성읍에서도 여로보암이 만든 산당을 훼파하고 우상 제단들을 못 쓰게 만들었다. 불태운 뼈들의 주인들은 모두 우상을 섬기는 제사장들로 여로보암이나 유다 왕들이 세운 자들이었다(12:31~32; 왕하 23:5).
 
 
 
2. 여호와의 징조(3~7절)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에 의해 선포된 말씀이 반드시 성취될 것을 “징조”를 통해 확증해 주신다. “이것은 나 주가 말한 징표다. 이 제단이 갈라지고,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질 것이다.” (새번역_3절) 이것은 제단이 더럽혀지고 파괴되어 제단의 기능을 잃게 됨을 뜻한다. 여로보암이 만든 우상과 제단, 산당이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지를 드러내고 그의 죄악을 심판함과 동시에 우상 숭배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함을 상징한다.
 
갑자기 나타나 외치는 하나님의 사람의 예언으로 인해 여로보암이 분노한다. 그는 분향하던 손을 거두어 그를 가리키며 체포하라고 명령한다. 그러자 여로보암의 그 손이 “말라(마르다_야베쉬)”라는 뜻은 물, 땅, 식물 등의 수분이 마르다라는 뜻으로 손이 마비되었다는 의미다. 동시에 하나님의 사람이 선포한 대로 제단이 갈라지고 재가 쏟아졌다(4~5절). 이로써 하나님의 심판이 가시화되었다.
 
여로보암은 뜻하지 않은 상황에서 당황하지만 심판의 징조에 대한 반응보다는 자신의 마비된 손에 더 신경을 쓴다.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의 손을 마비시키신 것은 그가 선지자를 해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고, 이런 이적을 통해 그가 하나님의 사람임을 알리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크신 능력을 가지신 두려워해야 할 분이심을 알리기 위해서다. 제단이 갈라지고 재가 쏟아진 것은 하나님께서 벧엘의 제단을 불쾌하게 생각하신다는 것과 선지자의 입을 통해 전한 말씀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성취할 것임을 여로보암에게 알리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이 모든 것을 보고 여로보암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죄를 깨닫고 생각나게 하시는 것은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이다.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에 무수한 선지자들을 보내신 것은 심판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심판의 길로 가는 그들이 하나님께 다시 돌아와 복된 삶을 살기 원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여로보암과 북이스라엘은 이런 기회를 놓친다.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었다. 손이 굳어버린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자기 손이 다시 회복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요청한다. 안타까운 것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그대의 주 하나님)”라는 표현이다. 여로보암은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못할 만큼 하나님과 거리감이 상당했다. 하나님의 사람은 왕의 요청을 따라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했고 손은 다시 돌아왔다.
 
이로 보건대 여로보암의 손을 마비시킨 하나님께서는 그를 단지 징벌만 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의 손을 다시 회복 시켜 주신 것은 그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알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그의 손을 고쳐주신 하나님께 감사조차 하지 않는다. 다만 자기 손을 고쳐준 선지자를 집으로 초대하여 선물을 주려고 하였다. 여로보암은 이 일을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에 실패하고 만다.
 
 
 
3. 하나님의 사람의 거절(8~10절)
하나님의 사람은 여로보암의 제안을 거절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왕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비록 임금님께서 저에게 왕실 재산의 절반을 주신다고 하여도, 나는 임금님과 함께 갈 수 없습니다. 이곳에서는 밥도 먹지 않겠으며, 물도 마시지 않겠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명하시기를, 밥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고, 온 길로 되돌아가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새번역_8~9절)
 
이렇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정말 아무런 대접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벧엘로 온 길과 다른 길로 돌아간다. 음식을 먹는 것은 서로 교제를 나누고 친분을 쌓는 것이다. 선지자에게 이곳에서 어떤 교제나 친분을 쌓지 말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다른 제사를 드리는 여로보암을 기뻐하지 않으시며, 그와 교제를 나누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여로보암의 제사에 대한 전적인 부정이다. 아무리 벧엘과 단에서 여호와를 위한다며 수많은 제사를 드려도 그 제사를 일절 받지 않으시겠다는 의지였다.
 
그런 제사는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종교적인 행동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기도와 헌금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드릴 때 기뻐 받으신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드리는 예배와 기도와 헌신과 헌금은 하나님께서 일절 받지 않으신다.
 
 
 
나는?
-반드시 시행될 심판임을 드러내셨다. 여로보암의 불법적인 제사의 자리에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 심판을 선포하셨다. 심판을 받는 시대와 다스리고 있을 왕의 이름까지 거론함으로써 이 심판이 취소되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분명히 하셨다. 아무리 제단이 있고 제물이 넘친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불순종하며 드리는 예배는 받지 않으시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왜곡하여 자신의 영광을 빼앗아 가는 자들에 대해 멸망을 선언하신다.
 
-징조를 보이심으로 심판이 시작되었음을 확고히 하셨다. 하나님의 사람은 심판 선언의 확실성을 보여 주기 위해 징조를 선포하고 즉시 보여주었다(3~4절). 이로써 하나님의 심판 선언이 얼마나 진실한지 증명하신다. 제단이 갈라지고 그 위에 재가 쏟아지는 것은 벧엘의 단이 거룩하지 않고, 이곳에서 드려지는 제사는 부정하고 저주받은 것임을 보여 준다.
 
-창세기에서 야곱에게 “하나님의 집”으로 계시하신 벧엘이 “우상의 집”이 되었기에 결국 “심판받는 집, 멸망의 집”이 되어버렸다.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공동체인 우리 교회는 세상을 본받는 우상의 집이 아니라 성령과 진리의 말씀으로 예배하는 생명의 집이 되어야 하겠다.
 
 
-심판 선언, 확실하게 이루어질 징조의 선언, 즉시로 이루어진 징조의 성취, 손이 마비되었다가 다시 풀어지는 기적적인 치유 등을 한꺼번에 경험했지만, 충격적이게도 여로보암은 회개하지 않는다. 그저 손이 다시 정상적으로 회복되었다는 것에 만족하며 선지자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에만 신경을 쓴다.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사람을 강제적으로 잡으려고 했고, 한편으로 잠자리와 음식과 예물로 유혹하여 그와 교제하려고 하며 하나님의 사람이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에 저항하였다. 힘의 상징인 손이 말라버린 것처럼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약속도 그의 마음에서 말라버렸고(잊어버렸고(11:38) 경외하는 마음도 말라버린 인생이 되어버린 것이다. 자신의 힘과 권력으로 되지 않으니, 외식적인 환대로 선지자의 마음을 훔치려고만 했을 뿐이다.
 
-그의 마른 손이 회복된 것처럼, 마음을 돌이키지 않았다. 하나님의 사람은 왕의 식탁 교제를 거절하고 오던 길로 되돌아가지 말라는 말씀대로 순종함으로써 깨진 언약의 회복을 거부하고, 자신이 선포한 심판이 결코 돌이킬 수 없음을 보여 주었다.
 
-하나님의 사람은 “떡을 먹지 말라, 물을 마시지 말라,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말라”는 명령대로 순종한다. 왕의 선대를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기 위해 뿌리쳤다. 얼마나 대단한가! 선대를 가장한 유혹에 취약할 수 있는 것을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내는 것을 우선 순위로 순종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상숭배를 얼마나 싫어하시는 지를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우상 숭배자들과 자기 백성이 함께 먹고 마실 수 없음을 결연하게 보여 주시는 것이다. 우상 숭배자들과 하나님과의 완전한 단절을 의미한다.
 
 
 
*주님, 하나님의 불쾌함이 그대로 느껴집니다. 혹시 나는 주님의 말씀과 뜻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태연하게 종교 생활을 잘하고 있다며 단호한 심판을 부르는 착각에 빠져있지 않는지 돌아보겠습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의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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