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속임이 넘쳐나는 세상, 속음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왕상 13:11-19]
 – 2023년 10월 07일
– 2023년 10월 07일 –
여로보암 통치(12:25~14:20)의 둘째 단락(13:1~34) 중 두 번째 에피소드인 13:11~32은 벧엘의 한 선지자와 하나님의 사람과의 만남을 배경으로 하나님의 사람의 불순종과 심판을 기술한다. 여로보암의 불순종(1~10, 33~34절)을 부각하며 선포된 여호와의 말씀 성취를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이 만들어 놓은 제단을 불쾌해하셨다. 이에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 심판 선언을 하고 징조도 보여주었지만, 여로보암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의 마음은 완고하여 회개하지 않았다. 대신 선지자를 대접하는 선에서 마무리하려고 했다. 그러나 선지자가 그의 제안을 거절하고 바로 유다로 돌아가며 마무리되나 싶었다. 하지만 벧엘의 선지자로 인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하나님에 대한 순종은 그와 그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할 때만 가능하다.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은 여로보암에게 불순종의 심판을 경고한 후 유다로 돌아간다. 이 소식을 들은 벧엘의 노인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고 그를 속여 집으로 데려가 떡을 먹으라고 청한다. 하나님의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다시 상기했지만, 선지자의 말과 호의에 방심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고 만다.
    
    
    
1. 벧엘의 늙은 선지자(11~12절)
벧엘에 거하는 한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 산당에서 행한 일과 그가 왕에게 선포한 여호와의 계시 등 모든 일을 아들들에게서 전해 듣는다. 그는 본문에서 선지자로(11절) 소개되고, 또 스스로도 선지자라 일컬으며(18절), 여호와의 계시를 받는다(21절). 이로 보건대 북이스라엘의 선지자가 분명하다. 또 후에는 “사마리아(북이스라엘을 지칭)에서 온 선지자”(왕하 23:18)로 불리기도 했다.
    
그런데 그가 참된 선지자인지는 불분명하다. 먼저 그는 아들들과 함께 우상숭배가 만연한 벧엘에 잔류하고 있다는 점이다. 역대하 11:13~16에 따르면 여로보암은 아무 백성이나 산당 제사장 자리에 앉혔고 북이스라엘에 상주하며 예루살렘의 성전 직무를 감당하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다 파면했다. 그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집과 산업을 버리고 남 유다로 돌아갔다. 이때 하나님을 찾는 북이스라엘의 백성들도 함께 이주했지만, 그들은 잔류해 있었다. 물론 참 선지자나 신앙인이 다 떠난 것은 아니었다(14:4).
    
또 그의 아들들이 벧엘의 산당 제사에 참여하여 이 모든 일을 보고 알려 주었다는 점이다(11절). 이 늙은 선지자와 아들들은 여로보암의 정책을 거부하지 않았거나 타협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아들들이 여로보암이 만든 절기와 제사에 참여하게 두었다. 이로써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모두 알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의 행방까지 목격한 것은(11~12절) 그 절기 행사에 참여하여 모두 보았다는 증거다. 엘리 제사장이 아들들의 범죄를 두고 보았듯이(2장) 이 늙은 선지자도 본인이나 아들들이 우상숭배의 영향권에 머물게 했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이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을 속이고 자신도 여호와의 계시를 받았다고 거짓으로 속이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중에는 자기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을 선언하기도 하고 그가 속인 하나님의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기도 한다(20~32절). 그럼에도 15~18에 기록된 그의 유혹과 거짓은 왜 그렇게 했는지 동기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죄임에는 틀림이 없다.
    
    
    
2. 벧엘의 선지자와 하나님의 사람의 만남, 속임과 속음(12~19절)
벧엘의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에 대하여 듣고 관심을 두고 아들들에게 그가 간 길의 정보를 들은 뒤 나귀에 안장을 묶고 하나님의 사람을 쫓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쉬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을 만난다(14절). 오랜 경험으로 그는 보자마자 하나님의 사람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여로보암의 제의를 거절한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나와 함께 집으로 가자! 그리고 떡을 먹으라(15절).”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여로보암에게 거절한 것과 동일한 말로 거절한다. 호의나 친절을 연거푸 거절하는 것은 자신의 거절이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에 따른 것임을 드러낸다.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의 늙은 선지자의 요청을 거절할 때 “이곳에서(16절)”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는데 벧엘 성소뿐만 아니라 벧엘 지역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벧엘에 있는 어느 누구와의 교제도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의미이다. 이는 여로보암과 벧엘 성소뿐 아니라 벧엘에 금송아지를 두는 것을 반발하지 않고 허락한 벧엘의 선지자들과 벧엘 사람들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여기셨다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벧엘 지역에서는 아무와도 교제 하지 말고 말만 전하고 바로 돌아오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그러나 벧엘의 늙은 선지자도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도 선지자라고 말하면서 천사가 자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했다고 거짓말을 한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을 완전히 뒤집는 말이었다. 자신과 함께 자신의 집으로 가서 떡을 먹고 물을 마시라는 것이다. 이는 9절과 16절에서 두 번이나 언급된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뒤집는 내용이었다.
    
늙은 선지자의 말에는 두 가지의 문제점이 있었다. 먼저, 자신도 당신과 같은 선지자라고 말한 것이다. 북이스라엘의 만연한 우상숭배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가 있었다면 과연 남유다의 하나님의 사람을 북이스라엘 벧엘로 보냈을까? 또한, 벧엘의 선지자는 여호와의 말씀을 “천사”에게 받았다고 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말씀을 환상이나 꿈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받는다. 그런데 벧엘의 선지자는 하나님의 천사에게 직접 받았다고 하면서 자신의 말이 더 권위가 있는 것으로 믿게 하려 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을 속였다고 분명하게 기록한다(18절 하). 이런 능수능란한 거짓말에 하나님의 사람은 그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가서 떡을 먹고 물을 마시고 만다.
    
    
이 이야기에서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먼저, 벧엘의 늙은 선지자의 의도이다. 그는 왜 벧엘의 제단에서 일어난 일을 듣고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을 집으로 초대하여 떡과 물을 먹이려고 했을까? 분문에는 구체적인 동기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유추해 보자면 먼저 그의 말이 참말인지 거짓인지 알아보고 싶은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가 북이스라엘에서는 더 이상 꿈이나 이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도 못하는 실정인데, 정말 하나님께서 벧엘을 싫어하시며 정말 망하게 될 것인지를 알고 싶었을 것이다.
    
유다에서 온 선지자가 아무것도 먹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를 속여 하나님의 말씀을 고의로 어기게 만들더라도 그가 정말로 하나님의 신탁을 받은 것 인지에 관해 확인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명령한 것의 정확히 반대되는 말로 거짓 예언을 하여 상황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하여 보려고 한 것이다.
    
    
확실한 것은 벧엘의 늙은 선지자는 그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과 욕심으로 이미 벧엘을 떠난 하나님의 사람을 뒤쫓았다. 그를 회유하고 속이는 데 단호했다. 여호와의 말씀과 천사를 운운하면서라도 자신의 뜻을 이루려고 했다. 그는 사람의 목숨을 시험의 도구로 삼은 자다. 선지자라면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어기면 죽음과 같은 큰 벌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징벌을 이용하여 과연 유다에서 올라온 하나님의 사람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려 한 것이다. 모든 행동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은 결여되어 있고 영적으로나 도덕적인 판단력이 마비되었고, 욕심과 집착이 서려 있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사람이 전적으로 피해자라고도 할 수 없다. 벧엘의 늙은 선지자에게 속임을 당한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분명한 말씀이 있는데 그것을 확신하지 못하고 다른 선지자의 말에 속아 넘어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약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아무리 천사를 들먹이며 설득하려고 해도 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의심스러우면 다시 하나님께 물어보고 결정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였고 하나님께 확인하는 지혜를 갖지 못했다.
    
    
    
나는?
-유혹은 집요하다. 더욱더 끈질기다. 벧엘의 늙은 선지자가 왜 이렇게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북이스라엘을 거룩한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세워야 할 선지자가 동료 선지자를 실족하게 했다는 점에서 변명의 여지는 없다.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 없도록 그의 노련함을 충분히 발휘하여 사탄의 앞잡이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유다에서 올라온 하나님의 사람은 여로보암의 제안을 거절하고 벧엘 선지자의 첫 번째 제안도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동료라고 밝히고 거짓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는 벧엘의 선지자의 속임에 속음을 당하여 넘어가고 만다. 하나님께서 직접 보여주시고 들려주신 말씀과 상충하였어도 다시 확인하지 않는다. 자신이 직접 들은 하나님 말씀보다 간접적으로 전해 들은 예언을 더 믿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분명히 충돌되는 것임에도 확인 과정 하나 없이 수용하고 만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리에서 “말”뿐 아니라 “행동”으로도 메시지의 진실성을 증명해야 한다. 젊을 때 잘하던 솔로몬이 늙어서 무너졌듯이 “끝까지 충성”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가!!
    
    
*늘 악은 선을 가장하여 다가온다. 힘들고 어려울 때 그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길이 보일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 내신 길이라고 주위에서 말하며 어서 그 길로 가라고 속삭임도 넘쳐난다. 이때 하나님의 말씀과 그 길이 충돌하지 않는지 꼭 점검해 보아야 한다. 그래야 산다.
    
*벧엘의 선지자는 거짓으로 자신의 속셈을 이루려 했다. 하나님의 이름마저 이용했다. 그리고 충성된 하나님의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나도 점검해 보아야 한다. 어떤 사역을 할 때 그 동기와 과정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가? 나의 속셈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지는 않고 있을까?
    
    
    
*주님, 속임이 넘쳐나는 세상, 쉽게 속음의 함정에 빠지지 않게 도와주십시오.
*주님, 아무리 술술 잘 풀리는 일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반드시 점검하고 확인하며 걷겠습니다. 말씀의 다리, 말씀으로 두드리며 건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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