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여로보암의 죽음 [왕상 14:1-20]
 – 2023년 10월 09일
– 2023년 10월 09일 –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으면 심판의 길을 피할 길이 없다. 여로보암은 아들이 병들자, 아내를 통해 아히야 선지자와 면담을 갖도록 계획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히야를 통해 여로보암의 죄 때문에 그의 아들이 죽을 것을 알린다. 또한 여로보암의 왕조와 그의 죄에 동참한 이스라엘도 포로로 흩으실 것을 예고 하셨다. 한편 병든 아들 아비야는 여로보암 집안에서 유일하게 하나님 앞에서 선한 자였다. 재난 전에 그를 죽게 하신 것은 그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호의였다.
 
 
 
1. 여로보암의 아들이 병듦, 선지자 아히야를 찾아가는 여로보암의 아내(1~6절)
여로보암의 집을 향한 첫째 심판이 시작되었다.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가 병이 났다. 특히 “그때에”라는 시간은 여로보암이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도 회개하지 않은 때임과 동시에 심판의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여로보암은 아내에게 예전에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고 알려준 아히야가 있는 실로로 가서 아비야가 어떻게 될 것인지 알아보고 오라고 요청한다.
 
여로보암의 아내는 아히야 선지자를 찾아간다. 아히야는 나이가 많아 눈이 멀어 있었다. 하지만 눈이 멀어 상황을 볼 수 없는 아히야에게 현재 일어나는 상황을 알려주신다. 여로보암과 그의 아내가 눈이 잘 안 보이는 아히야를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하나님께 모든 말씀을 들은 아히야는 여로보암의 아내에게 왜 다른 사람인 체하느냐며 질책하며 자신이 심각한 일을 전달하도록 부름을 받았다고 전달한다.
 
 
 
2. 여로보암의 집에 대한 심판 선언(7~16절)
아히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적인 화법으로 전달한다. 먼저 여로보암을 많은 사람 중에서 선택하셔서 다윗의 집에서 나라를 찢어 그의 손에 주신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분명하게 밝힌다(7~8절). 여로보암이 현재의 자리에 있게 된 것을 확실하게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그런데 여로보암이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였다. 우상을 만들고 이것을 숭배하였다. 이런 행위를 “하나님을 등 뒤로 휙 집어 던져 버린 것”으로 평가한다(9절).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에 제사를 드린 행위는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배신으로 보고 분노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다. 백성들이 예루살렘을 드나들 것도 알고 계셨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백성을 지키고 보호할 힘이 충분하시다. 하지만 여로보암은 이를 믿지 못했다.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을 버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잡으려고만 했다.
 
 
이에 여로보암의 집에 심판이 선언된다. 먼저 그 집에 재앙을 내려 여로보암에게 속한 남자는 모두 끊어버리겠다는 것이다. 너무도 지독한 표현이 사용된다. “거름 더미를 쓸어버림 같이 여로보암의 집을 말갛게 쓸어 버릴지라”(10절). 이어지는 11절에서 여로보암의 사람들은 죽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평안히 장사 되어 안식을 누리는 복도 누리지 못하고 철저한 저주 아래 놓인다고 설명된다. “여로보암에게 속한 사람으로서, 성읍 안에서 죽은 사람들은 개들이 먹어 치울 것이고, 성읍 바깥의 들에서 죽은 사람들은 하늘의 새들이 와서 쪼아 먹을 것이다. 이것은 나 주가 하는 말이다.” (새번역_11절)
 
또 아픈 아들 아비야는 여로보암의 아내가 성에 들어갈 때쯤 죽을 것이라고 선언하셨다(12절). 그러면서 13절은 아비야의 죽음은 그에 대한 심판이 아닌 것을 분명하게 선언하신다. 하나님께서 아비야가 하나님을 향한 선한 일들을 한 것을 발견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사람이 애도하는 가운데 가족 묘실에 평안히 안장될 것이다.
 
또 다른 심판은 여로보암 가문을 대신하여 이스라엘 왕을 세우신다는 것이다(14절). 그가 여로보암의 집을 완전히 파괴할 것이다(15절). 그는 훗날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에게서 반란을 일으킨 ‘바아사’였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심판으로 이어진다. 백성은 가나안 땅에서 뽑아서 강 너머 지역, 즉 유브라데 지역으로 흩으신다는 것이다. 바벨론 포로로 갈 것을 경고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흔들리는 갈대라고 표현되는데, 굳건한 왕조를 세우지 않고 반란이 일어나는 허약하고 불안정한 왕조를 세우시고 결국 뽑아버리시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 이유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질적으로 섬겼던 우상 숭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후 계속해서 바알과 아세라를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섬겼다. 여기에 여로보암은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 제단까지 만들어서 이교적으로 변질되었다.
여로보암의 죄는 당연히 묻겠지만 여기에 아무런 저항 없이 따라간 백성들의 죄도 간과하지 않으실 것이다.
 
 
 
3. 아비야의 죽음과 여로보암의 죽음(17~20절)
아히야의 말대로 여로보암의 아내가 집 문지방에 이르렀을 때 아비야가 죽는다. 온 이스라엘이 그를 장사하고 슬퍼했다. 아이의 죽음은 아히야를 통해 하신 심판의 말씀이 온전히 성취될 것을 보여주는 징조이다. 아이의 죽음처럼 여로보암의 집의 심판도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러한 심각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은 회개의 반응은 보이지 않는다. 그의 죽음이 이어질 뿐이다. 그는 회개하지 않았고 금송아지를 없애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이미 굳어져 돌이킬 수 없었다.
 
여로보암의 다른 행적들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었다고 소개한다. 이는 다른 업적들도 있고 다른 민족들과 싸우며 나라를 강하게 한 부분도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열왕기 저자의 관점은 분명하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살았는지이다. 경제적 부흥과 왕권 강화보다는 종교적으로 여호와만을 섬겼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백성들을 공의와 자비로 다스렸는지로 평가한다.
 
이와 같은 관점의 평가는 오늘날 교회와 국가 지도자들, 그리고 우리를 평가하는 관점일 것이다.
 
 
 
나는?
-영적 눈이 어두워진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 아들 아비야가 병에 걸려 죽을 위기에 닥치자, 몸은 늙고 눈까지 어두워졌으나 하나님과 신실하게 동행하는 아히야 선지자에게 아내를 보내 아들의 미래에 관해 물어보게 한다. 아내마저 변장시키고 선지자를 찾게 하는 모습에서 여로보암의 종교정책은 변함이 없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히야 선지자에게 그녀의 방문을 미리 알려 주셔서 그의 집에 임할 하나님이 심판을 알리게 하신다. 한 번은 선지자의 죽음을 통해, 이번에는 선지자의 호통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신 것이다. 죄악된 삶을 사람들에게는 속이고 감출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눈은 속일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늘 진실하게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을 버리니 하나님께서도 버리셨다. 갖은 우상 숭배로 하나님을 노엽게 하고 하나님을 등 뒤로 버린 여로보암의 집은 더럽고 역겨운 거름더미를 쓸어버리듯이 심판하신다. 그의 집 남자들의 시신을 개가 먹고 새가 먹게 함으로써 여로보암에 이어 왕위를 이을 사람이 없게 하시고 또 죽은 후까지 수치를 당하게 하실 것이다. 먼저 죽은 아들 아비야가 여로보암의 집에서 가장 축복된 사람이 될 정도로 혹독한 심판이 가문에 임할 것이다.
 
-여로보암의 우상 숭배에 저항하지 않고 참여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예외는 없다. 그들은 강 넘어 나라 앗수르에게 멸망하여 붙잡혀 가게 될 것이다.
 
-이 모든 심판의 시작은 아들 아비야의 죽음을 통해 시작된다. 여로보암의 죄악이 극에 달하고 하나님의 선지자의 죽음을 통해 심판의 확실성이 증명된 바로 그때 아비야가 낫지 못할 병에 걸려 죽은 것이다. 이는 여로보암의 집이나 이스라엘의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징조였다. 그들은 앗지 못할 병에 걸려 결국 죽게 될 것이다. 그 병은 다름 아닌 우상숭배였다.
 
 
*작은 불순종들이 모여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불러온다. 지금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는 불순종이 감당할 수 없는 파국을 불러온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여로보암은 자신의 죄를 뻔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 낫지 않는 병에 걸린 아들의 상태를 물어보기 위해 아히야 선지자를 찾을 때 아내를 변장시켜 보낸 것이다. 죄라는 것을 뻔히 알고 여전히 돌이키지 않는 완악함이 불러오는 심판을 두려워해야 한다.
 
*여로보암의 죄로 인해 이스라엘도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다. 지도자의 타락은 개인에만 그치지 않고 그가 속한 공동체를 타락시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런 측면에서 지금 우리의 지도자들 행태를 간과하면 안 된다. 그들이 나라와 민족에게 끼치는 악영향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르면 함께 심판받는다. 두려운 마음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따라 맞서야 할 때 맞서야 한다. 특히 우상 숭배에 동조하거나 묵인하면 안 된다. 이런 측면에서 버젓이 무당에 의지하고 사술에 의존하는 지도자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분명한 경고가 되는 말씀이다.
 
 
*13절의 기록이 의미심장하다. “그런데 온 이스라엘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장사를 지낼 것입니다. 여로보암 가문에서는 그 아이만이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착하게 살았으므로, 여로보암의 가문에 속한 사람 가운데서, 그 아이만 제대로 무덤에 묻힐 수 있을 것입니다.” (새번역)
 
*”여로보암 가문에서 그 아이만이….” 하나님 보시기에 착하게 살았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만 제대로 무덤에 묻힐 수 있도록 해주셨다. 하나님 보시기에 착하게 살았다는 것은 아버지를 따라 우상을 숭배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실로 놀라운 일이다. 그 아이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기 전에 참 안식을 주신 것이다.
 
*북 왕국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사람이 아예 없지 않았다는 것이다. 강도 높은 우상 숭배 정책을 취하면서 제사장 대부분과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남 유다로 피난을 가버렸다. 영적인 공동화 현상이 일어나 버린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단정할 수 없었다. 벧엘에는 확실하지 않지만, 늙은 선지자가 있었고, 실로에는 여전히 아히야 선지자가 생존해 있었다. 그리고 등잔 밑이 어둡다고 여로보암의 집안에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게 살았던 “아이”가 있었다.
 
*하나님은 자기를 선대라는 자를 선으로 갚아주신다. 자기를 등 뒤로 던져 버린 여로보암의 가문과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등 뒤로 그들을 던져 버리셨다.
 
 
*나는 어떠한가? 우리는 어떠할까? 여로보암은 그토록 하나님을 멀리했지만 풀리지 않는 아들의 불치병의 문제를 가지고 아히야 선지자를 찾았다. 이런 모습이 오늘날 교회 공동체에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영적으로 어두워져만 가는 세상 속에서 그렇게 자신만만해하는 세상도 풀지 못하는 문제를 하나님께 물어보기 위해 교회를 찾는 모습 말이다.
 
*그런데 딱한 것은 요즘 교회들은 그들의 문제를 세상에 가서 풀어달라고 한다. 딱하고 딱하다.
 
 
 
*주님, 여로보암의 집과 이스라엘의 어두운 미래가 답답합니다. 혹시 우리의 미래가 이리되지 않을까 염려도 됩니다.
*주님, 그렇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게 산 아비야에게 심판을 하시기 전에 안식의 은혜를 주셨음을 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게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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