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나답_말씀하신 대로 성취되다 [왕상 15:25-32]
 – 2023년 10월 13일
– 2023년 10월 13일 –
여로보암과 그의 왕조에 선포된 여호와의 말씀이나 답에 의해 성취된다. 이로써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다시 증명된다.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은 부친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다. 하지만 그도 부친처럼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왕이었다. 자신뿐 아니라 백성을 죄로 이끌었다. 결국 잇사갈 족속의 바아사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바아사가 나답만 아니라 여로보암과 관련된 모두를 죽임으로 여로보암에게 예고된 여호와의 말씀이 그대로 이뤄진다.
 
 
 
1. 나답의 등극 공식과 평가(25~26절)
유다 아사 왕 2년에 이스라엘에서는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이 왕위에 오른다. 2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다고(25절) 하지만 실제로는 1년이 조금 넘는 기간이다. 나답에 대한 평가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로 부정적이다. 저자는 그의 아버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26절).
 
여로보암의 죄는 단과 벧엘에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서 여호와 제의를 대신하였고 일반인을 제사장으로 세우고 산당 제사를 성행하게 하였다. 절기도 마음대로 만들어 예루살렘에서 절기 제사를 드리지 않게 하였다. 나답은 유다 선지자의 경고와 늙은 선지자의 확인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여로보암의 정책을 그대로 따른다. 이로써 백성들이 죄를 짓게 만드는 죄를 지었다고 평가한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 왕의 역할은 종교적인 부분에서 매우 중요한데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백성들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도록 가르치고 다스릴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여로보암과 나답은, 이 역할을 내버렸다. 저자는 전체적으로 남 유다와 북이스라엘이 망한 이유를 왕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데서 찾고 있다. 여로보암과 나답은이 의무를 저버렸고 백성들을 죄의 길로 가도록 인도하는 무서운 죄를 저지른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지도자가 새겨들어야 할 부분이다. 교회의 지도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의무를 성실하게 가장 먼저 수행해야 할 사람이다. 그런데 만약 불순종하여 교인들을 실족하게 하고 잘못된 길로 인도한다면 여로보암과 나답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
 
*나답의 이런 모습은 동시대 유다 왕 아사가 르호보암과 아비얌의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고 우상을 제거하는 종교 개혁을 단행하면서 왕권과 나라를 튼튼하게 세운 것과 대조된다.
 
 
 
2. 바아사의 반란(27~30절)
잇사갈 지파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는 나답에게 반역할 세력을 모으고 나답이 군사들과 함께 깁브돈을 점령하기 위해 에워싸고 있는 상황에서 반역을 일으킨다. 블레셋 족속이 지배하고 있는 깁브돈을 회복하기 위해 전쟁을 하는 틈에 나답을 공격하여 죽인 것이다(27~28절). 이렇게 해서 유다 아사 왕 제3년에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왕이 된 바아사는 자신의 세력을 모아 여로보암의 세력과 무력 충돌하였고 그 결과 바아사는 여로보암 집에 속한 숨 쉬는 모든 것, 사람이나 가축 할 것 없이 모든 것을 완전히 진멸될 때까지 죽이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29절).
 
여로보암의 집이 진멸을 당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여로보암이 자기만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까지도 죄를 짓게 하였으므로,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렇게 진노하셨다.” (새번역_30절) 여로보암의 죄는 명확하다. 먼저 여로보암 자신의 죄와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짓게 했다는 것이다. 또, 여호와를 노엽게 한 것이다. 자신뿐 아니라 백성들도 죄를 짓게 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유다에서 올라온 한 선지자를 통해 이미 경고가 되었다. 또한 벧엘의 늙은 선지자를 통해 이 경고가 확실하다는 것도 분명한 징조를 통해 확증하셨다. 여호와를 노엽게 한 것은 아히야 선지자를 통해 여로보암을 노여워하시는 것을 알려 주셨다. 그는 늙은 선지자가 목숨을 잃어가면서 알려준 하나님의 경고를 완전히 무시했다. 이런 처사에 하나님께서는 등 뒤로 자신을 버렸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노여움을 알려주시는 것은 “회개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아쉽게도 여로보암과 나답은, 이 기회를 잡지 못한다. 바아사는 하나님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그 역시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사람이었다(33절). 그의 반역을 막지 않고 내버려 두심으로 여로보암 가문을 심판 하신 것이다. “악으로 악을 제거하신 것”이다.
 
*이는 앗수르와 바벨론을 일으켜 이스라엘과 남 유다를 심판하신 것과 같다.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이스라엘에서 왕권을 유지하고 나라의 평안과 보호의 은혜는 하나님의 힘과 언약 의지에 달린 일이지, 인간의 손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3. 나답의 죽음 공식(31~33절)
나답의 죽음 공식은 다른 이스라엘의 왕들과 비교가 된다. 특히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잔다”라는 표현이나 “어디에 장사 되었다”라는 식의 표현은 없었다. 이는 나답이 여로보암의 가문 묘지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이다. 나답은 여로보암의 가문 묘지에 안장되지 못했다.
 
나답이 묘실에 들어갔다는 말이 없다는 것은 여로보암 가문의 묘지에 안장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이는 나답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철저하게 이루어졌음을 방증한다. 이미 14:13을 통해 아히야 선지자를 통해 여로보암에 속한 자 중에 오직 아비야만 여로보암의 집의 묘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외에는 아무도 집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처럼 철저했다.
 
 
 
나는?
-과거와 단절하지 못한다. 나답과 함께 북이스라엘은 심기일전하여 새로운 출발의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나답은 그것을 영적 갱신과 회생의 띠로 삼지 않고 여로보암이 종교 정책을 완전히 무릎 꿇게 될 터이다.
 
-남 유다의 아사가 자기 조상 솔로몬, 르호보암, 아비얌의 길을 단호하게 떠난 것과는 다르게, 나답은 다윗의 길이 아니라 아버지, 여로보암의 이름을 걸었다. 왕이 앞장선 우상숭배를 백성들도 쉽게 따라나선다. 말씀과 상관없는 교회 안의 전통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은 늘 좋은 것이 아니다. 지금껏 해 와서 편안하고 익숙하다고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신앙의 전통을 계승하고 또 어떤 것을 단절해야 하는지 잘 분별해야 할 시대에 살고 있다.
 
 
-선지자 아히야를 통해 여로보암에게 내리신 심판(14:10-11)을 성취하신다. 바아사는 나답만 죽이는 데 그치지 않고 후환을 없애기 위해 여로보암의 온 집을 쳐서 단 한 명의 생명도 남기지 않고 멸했다. 너무도 잔혹한 반역이었지만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철저하게 성취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이 가야 할 길에는 두 길밖에 없었다.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여 하나님 앞에 살았던 “다윗의 길”을 걷든지, 아니면 말씀을 떠나서 “여로보암의 길”을 걸으며 가나안의 우상숭배 문화에 동화되는 길을 걷든지 말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세상 속에 살아갈 때 분명한 결정을 내리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온전히 순종하며 살 것인가? 세상 방법과 문화에 적당히 섞이며 동화될 것인가?
 
 
-자기의 불신앙이 아닌 블레셋과 싸우다가 죽은 나답이다.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고 백성을 죄악으로 몰아갔지만, 블레셋이 자기 땅을 침범하는 것에 대응하여 싸운 나답이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아주 당연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을 통치할 때는 “그의 마라와 그의 의”를 먼저 돌아보고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죄악과 싸우는 것이 먼저였다.
 
-나답은 먼저 싸워야 할 대상이 블레셋이 아니라 우상숭배를 하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기 안에 있는 불신앙임을 간과하고 있었다. 이는 오늘날 하나님과의 관계는 뒷전으로 미루고 분주한 세상의 삶에 치여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헛수고한 삶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이제라도 하나님과의 교제를 삶의 최우선 순위로 두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아버지의 악행을 이어받은 나답에게 심판의 말씀이 성취되었다. 선지자 아히야가 솔로몬에게 전한 말씀대로 이스라엘은 둘로 쪼개졌다. 또 여로보암에게 전한 말씀대로 아들이 죽었다.
 
*개혁은 단지 입고 있는 옷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삶의 자세를 기본으로 다시 돌리는 것이다. 아무리 편하고 익숙한 것이라도 본질과 기본을 왜곡하는 것이라고 깨닫게 된다면 어색하더라도 다시 기본과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삶이 헛수고가 되지 않는다.
 
*그는 먼저 블레셋이 아니라 자신의 불신앙과 철저하게 싸워야 했다. 우상숭배를 하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기 안의 불신앙, 하나님과 관계는 뒷전인 채 분주하게만 살고 있다면 헛되고 헛된 인생임을 토로하는 시간이 임할 것이다.
 
*하나님과 관계, 동행하는 삶이 최우선이며 반드시 지켜야 할 성경의 가르침이다.
 
 
 
*주님, 반드시 성취되는 하나님 말씀의 무거움을 느낍니다. 말씀의 가치가 제 삶 속에서 가장 중심이 되게 살겠습니다.
*주님, 나답이 악행을 이어받듯, 교회 안의 당연하게 여기는 전통에서 말씀과 충돌하는 것을 깨닫게 하실 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겠습니다. 지혜와 용기를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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