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바알의 중심지에서 여호와의 이름이 찬란하게 빛나다 [왕상 17:8-24]
 – 2023년 10월 17일
– 2023년 10월 17일 –
아합은 바알을 섬기는 시돈의 공주 이세벨을 왕비로 맞이하면서 바알을 이스라엘의 국교로 삼는다. 여호와께서는 선지자 엘리야를 아합에게 보내 가뭄을 선언하시며 바알 신을 섬긴 벌을 내리셨다. 동시에 바알과의 전쟁을 선포하셨다. 여호와의 선언대로 이스라엘에는 비와 이슬이 그쳤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자기 종과 자기 백성을 살리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서든 이방 땅에서든 그에게 순종하는 자들을 돌보신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에 따라 바알의 성읍인 시돈의 사르밧으로 갔다. 하나님이 그곳에서 엘리야를 공궤할 자로 지목한 이는 몹시 가난한 과부였다. 매우 난감한 상황이었으나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 말씀에 순종한 엘리야와 사르밧의 과붓집에 양식을 공급하셨다. 그 후 그녀의 아들이 병들어 죽었을 때도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기도를 듣고 아이를 다시 살려주셨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순종하는 자를 책임지신다.
    
사르밧은 지중해 연안의 두로와 시돈 사이에 있는 성읍이다. 이세벨의 고향이다. 이 성읍은 주전 13세기 이집트 문헌에 항구 도시로 나와 있으며, 주전 1,000년대부터 로마 시대에 이르기까지 제조업의 중심지로 번성하였다. 종교적으로는 바알 신앙의 중심지였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뿐 아니라 바알 신앙의 중심지인 시돈까지 기근이 일어나게 하신 것이다. 이곳에 거하는 사르밧의 과부는 사회적으로 가장 취약한 계층으로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살기 어렵다.
    
고대의 우르-남무 법전 서문과 함무라비 법전 서문에 근거하면 왕은 가난한 자, 과부, 고아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 중요한 임무라고 했다. 그러므로 어떤 신이 왕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보여주려고 한다면 지극히 궁핍한 과부의 필요를 채워줌으로써 약자를 돌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은 여호와께서는 진정한 왕은 바알이 아니라 자신이 시돈을 포함한 모든 세계의 왕인 것을 알리기 위해 사르밧 과부를 돌보아 주신 것임을 알 수 있다.
    
    
    
1. 사르밧으로 가라(8~12절)
그릿 시내가 말라 더는 그곳에서 살 수 없게 되었다.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이번에는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하면,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음식을 주겠다고 말씀하셨다(8~9절). 9절의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겠다”라는 문장은 4절의 “까마귀들에게 내가 그곳에서 너에게 양식을 공급하라고 명령하였다”와 거의 비슷하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상이 까마귀에서 과부로 바뀐 것뿐이다. 까마귀를 통해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서 과부를 통해 주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이 약속 역시 매우 초자연적인 간섭이다. 과부는 당시 사회에서 돌봄을 받는 대상이지 누군가를 돌볼 수 없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회 최약자가 과부이다.
    
이 약속은 까마귀가 양식을 공급해 준 것만큼 비이성적이고 비상식적인 약속이었다. 하지만 모든 지역이 기근에 시달리고 있을 때 다시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능을 보여주시려는 것이다. 또 시돈은 이세벨의 고향이자 바알 신앙의 중심부이다. 바알이 책임지지 못하고 있는 그 땅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주시려고 작정하신 것이다.
    
    
엘리야는 이해하기 어려운 명령을 받았지만 순종하여 요단강을 건너 시돈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른다. 그때 마침 한 과부가 나무를 모으고 있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곧장 과부를 만나도록 인도해 주신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녀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과부인지를 확인한다. 처음에는 물을 달라고 하고 그녀가 물을 가져다주 려고 하자, 정중하게 불러 떡 한 조각을 달라고 부탁한다. 이 요청에 과부는 놀라운 대답을 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12절)”라고 한 것이다. 엘리야가 이스라엘 사람인 것을 알아보고 “당신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바알 숭배의 중심지인 시돈 지역에 거하기에 바알의 이름으로 맹세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한 점이다. 자신에게는 떡은 없고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이 조금 있을 뿐이라고 했다. 자신은 나뭇가지를 주워 마지막으로 자신과 아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어 먹고 죽을 작정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나뭇가지를 두 개를 주웠는데 그만큼 만들 수 있는 음식의 양이 적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 말은 형편이 이런데도 자신에게 음식을 얻어먹으려고 하느냐는 의미이다. 사실상의 거절을 엘리야에게 하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마지막 양식을 달라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2. 사르밧 과부의 집에 기적을 베푼 엘리야(13~16절)
엘리야는 과부의 말을 듣고 일단 ‘두려워하지 말라’고 안심을 시킨다. 이는 과부와 아들이 절대로 굶어 죽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가뭄과 기근으로 날마다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살아왔고 이제 막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인데 그런데도 엘리야는 죽을 걱정은 하지 말고 가서 음식을 만들어 우선 엘리야 자신을 위해 작은 빵을 만들고 그 후에 그녀와 아들을 위해서 음식을 만들라고 부탁한다. 매우 억지스럽고 비정하며 일방적이고 이기적인 요청 같지만, 이어지는 엘리야의 말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비를 내려 주실 때까지, 그 뒤주의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을 것이며, 병의 기름이 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새번역_14절)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양식을 공급해 주실 것이니 걱정하지 말고 자신과 과부와 그녀의 아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라고 말한 것이다.
    
생각해 보면 시돈 사람인 과부가 이런 여호와의 말씀을 믿을 수 있었을까? 매우 믿기 어려운 상황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과부는 엘리야의 말을 믿었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하였다. 여호와의 권능을 믿은 것이다. 그 결과 여호와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않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았다. 가뭄 내내 엘리야와 과부의 가족은 양식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극심한 가뭄과 기근으로 이스라엘과 시돈이 굶주리고 있을 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의 가정에 먹을 것을 주시는 은혜를 베푸신 것이다. 시돈의 신 바알도 하지 못한 권능을 바알의 본거지에서 여호와께서 행하심으로 자신이 참 신임을 드러내신 것이다.
    
    
    
3.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린 엘리야(17~24절)
이 일 후에 과부의 아들이 심한 병이 들어 죽는다. 그런데 과부는 그녀 아들의 죽음의 원인을 엘리야에게 돌린다. “그러자 그 여인은 엘리야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하나님의 사람이신 어른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이렇게 저에게 오셔서, 저의 죄를 기억나게 하시고, 제 아들을 죽게 하십니까?” (새번역_18절) 그녀는 엘리야가 하나님의 선지자임을 분명하게 알았다. 또 여호와께서 참 신이시기에 선한 자에게는 상을 베풀고 죄를 지은 자에게는 벌을 내리신다고 생각했다. 이런 인과응보의 신앙은 고대 신앙의 기본 체계였다. 그래서 과부는 갑작스러운 아들의 죽음을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고백한 것이다.
    
엘리야는 이런 과부의 처절한 소리에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고 아이를 안고 2층으로 올라가 침상에 누이고 여호와께 간절히 부르짖었다. 과부가 아들의 죽음을 엘리야의 방문 때문이라고 했듯, 엘리야는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며 왜 과부의 아들을 죽게 하셨냐고 부르짖는다. 그리고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며 여호와께 아이의 혼이 그의 몸으로 돌아오게 해달라고 간절히 부르짖는다. 여호와께서 생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은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와 살아나게 하신다. 구약에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 최초의 사건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간 보여주신 어떤 기적보다 가장 큰 기적이었다.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은 어떤 신도 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바알 숭배의 중심지에서 자신이 온 세상의 주인이며, 생명의 주관자임을 드러내신 것이다. 엘리야는 살아난 아이를 안고 내려가 과부에게 안겨준다. 과부는 살아난 아이를 품에 안고 여호와께 신앙고백을 올린다.
    
“이제야 저는, 어른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이시라는 것과, 어른이 하시는 말씀은 참으로 주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새번역_24절))
 
이제야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이요 엘리야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알았다고 고백했다. 이 고백은 아합과 이스라엘 백성과 선명하게 대조된다. 아합과 이스라엘은 참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에게 돌아섰다. 엘리야의 말은 믿지 않았다. 하지만 여호와께서 진정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정작 시돈 사람이 고백한 것이다. 과부의 이와 같은 고백으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해 선언하신 기근과 기근 해제의 선언은 지속되리라는 것을 확증하고 있다.
    
    
    
나는?
-순종하는 엘리야의 모습이 돋보인다. 터무니없어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엘리야의 모습이 선명하다. 아브라함에게 고향이나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도록 요구하셨듯이, 이세벨의 고향이며 열렬한 바알 숭배의 중심지인 시돈의 사르밧으로 엘리야를 옮기신다.
    
-바알 숭배자(아합과 이세벨)에게 쫓기는 자신에게 바알 숭배지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도, 아들과 나눌 한 끼 양식밖에 없는 과부에게 의탁하라는 말씀에도 순종한다. 납득할 만한 명령 때문에 순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순종한 것이다. 순종은 이해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까마귀를 통해 먹을 것을 공급하시더니 이번에는 매우 극빈한 과부에게 선지자를 대접하게 하신다. 이런 터무니없는 명령에 순종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의 생이 바알이 거짓으로 약속하는 풍요로움에 달린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오직 창조주 하나님께만 달려있음을 깨닫게 된다.
    
-엘리야의 순종은 이 시대가 살아날 수 있는 길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길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한편 과부의 순종도 대단하다. 마지막 남은 양식을 다 먹으면 죽는 길밖에 다른 대책이 없다며 탄식했지만, 엘리야의 “작은 떡”을 자기 양식으로 달라는 야박하고 매정한 것 같은 요구에 응답한다. 살고 죽는 것이 떡에 달린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인정하라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근의 때를 책임져 주실 것을 선언한 것이다.
    
-사람이 양식이 없으므로 죽을 뿐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때 죽는 것임을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릿 시냇가에서 날마다 까마귀를 보내 먹을 것을 책임져 주신 것처럼 기근으로 죽어가는 바알의 땅 사르밧 과부의 집에 곡식 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공급하셨다. 자식과 자신의 목숨을 걸고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한 과부의 믿음을 보시고 그가 내어준 “작은 떠”에 비할 수 없이 크게 갚아 주셨다.
    
-또한 씨를 심을 수도 없고, 거둘 수도 없는 죽은 땅, 광야와 같은 과부의 집에 넉넉한 양식을 주셨을 뿐 아니라 그의 아들을 죽음에서 건져 주셨다. 과부에게 아들의 죽음은 미래와 소망이 없는 죽음과 같았다. 그녀의 삶이 철저히 혼자였기 때문이다. ‘씨’를 잉태할 수도, 낳을 수도 없는 광야였기에 아들의 죽음은 자기 죽음과 다를 바 없었다.
    
-이런 바알의 숭배지에서 죽은 아들은 바알 숭배에 빠져있는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황과 같았다. 이스라엘이 바알에게 빠져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의 은혜가 거두어진 광야와 다를 바 없었고 그것은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 아들을 엘리야의 하나님의 긍휼과 생명의 주권자에 대한 신뢰의 기도에 응답하심으로 살려주셨다. 이스라엘의 미래와 소망도 이처럼 하나님의 긍휼과 그에 대한 신뢰가 아니면 살아날 수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닌가?
    
    
-절망적인 영적 기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엘리야의 순종과 사르밧 과부의 믿음의 반응은 다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 안에 살아갈 수 있음을 꿈꾸게 하는 소망이 되기에 충분하다.
    
-가장 절망적인 순간, 탄식만 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삶이 회생의 희망을 꿈꾸게 한다.
    
-사르밧 과부는 자기 아들을 살려주신 하나님을 향하여 진심으로 “참 하나님”이심을 고백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허탄하고 망령된 바알의 신화를 쫓고 있다. 혹시 이 시대 우리의 모습이 되지 않을까 분별하며 서 있어야 하겠다.
    
    
    
*주님,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그 말씀에 순종하겠습니다. 이해를 전제하고 타협을 시도하는 껍데기뿐인 순종을 거부하겠습니다.
*주님, 모든 풍요가 우상 숭배의 힘에서 나온다고 맹신하는 이 시대의 우상들(과학, 물질, 무속, 사주 등)의 헛됨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 만연하나 주님의 말씀 능력을 신뢰합니다. 사람이 떡이 아니라 말씀으로 살아냄을 믿음으로 실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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