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대답할 수 없는 바알, 그것을 향한 고집스러운 부르짖음 [왕상 18:16-29]
 – 2023년 10월 19일
– 2023년 10월 19일 –
가뭄을 시작한 하나님께서 이제 비를 내리려 하신다. 3년 동안 비를 내리지 않게 하셔서 바알이 얼마나 헛된 대지와 구름의 신인지를 드러내셨다. 기근으로 이어진 탓에 모두가 생명의 위협을 받았지만, 바알은 묵묵부답이었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생명의 주인 되심을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심으로 증명하셨다. 이제 엘리야를 당당하게 하나님의 전사로 바알과 싸우게 하려고 아합 앞에 세우신다. 오바댜와 같은 신실한 “숨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돕고 근근이 신앙의 명맥을 유지하는 가운데 여호와가 참 하나님 되심을 갈멜산에서 증명하셨다.
    
갈멜산에 바알 선지자들이 모였고, 온 이스라엘도 증인으로 소집되었다. 엘리야의 제안을 따라 바알 선지자들이 먼저 제물을 바쳤다. 그리고 아침부터 저녁 소제 때까지 열성으로 기도하며 바알로부터 불의 응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바알은 도무지 응답하지 않았다. 갈멜산은 이스라엘과 페니키아(두로와 시돈)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그 지역에서는 신성한 산으로 일컬어졌다. 갈멜은 산꼭대기부터 지중해 남동쪽 므깃도까지 뻗어있고(약38km) 이스르엘 골짜기 북서쪽 끝에 있는 산맥이다. 대결은 산꼭대기가 아니라 산기슭에서 펼쳐졌다. 신성한 산들은 보통 꼭대기를 신성한 곳으로 구별하여 들어갈 수 없는 땅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엘리야는 바알과의 대결 이후 비를 달라고 기도하기 위해 산꼭대기에 오른다. 이로 보건대 산기슭에서 대결을 펼친 것은 모든 백성에게 이를 보여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1. 엘리야와 아합의 논쟁(16~18절)
엘리야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듯이 오바댜도 엘리야의 말에 순종하여 아합을 만나러 갔다. 둘 다 목숨을 건 순종이다. 오바댜는 엘리야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 안에 무사히 소식을 전달하고 드디어 엘리야와 아합이 만난다. 아합은 엘리야를 향해 “이스라엘에 문제를 일으킨 자”라고 하고 엘리야는 아합을 향해 문제를 일으킨 것은 “아합과 오므리 집안”이라고 반격한다. 오랜 가뭄은 그 집안의 악행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엘리야는 이 가뭄을 끝낼 해결책으로 온 이스라엘과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갈멜산으로 소집해 달라고 요구한다.
    
그간 아합은 가뭄과 기근의 원인으로 엘리야를 지목하고 백성의 원망을 잠재우기 위해 엘리야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엘리야는 아합이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긴 죄가 재앙의 원인임을 분명하게 밝힌 것이다. 이런 엘리야의 반박에 아합은 어떤 변명도 하지 못했다.
    
*아합의 가치관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는 안하무인, 작반하장의 사람이다. 이스라엘을 고통에 빠지게 한 자가 엘리야라고 확신한다. 그만 제거하면 이 나라는 태평성대를 이룰 것이라고 여겼다. 모든 문제가 엘리야 때문으로만 몰았다. 이런 아합의 가치관에 엘리야가 정면에서 반박하고 교정해준다. 여호와의 계명을 어기고 바알을 따르게한 아합이 문제라고 말하는것에 주저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의 현실과 왜 이렇게 판박이일까? “남탓”이 당연하다. 자신은 늘 공정하다. 남의 죄는 발본색원하려고 몸부림을 치지만 정작 자신과 자신의 측근들의 죄들에 대해서는 “그 정도쯤야”라고 여긴다. 이런 지도자들이라니… 참으로 참담하다. 사돈남말만 하고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부끄러움을 모르고 유체이탈 화법을 자연스럽게 시전하는 지도자를 둔 우리는 이 댓가를 톡톡히 치뤄야 한다.
 
*참으로 통탄스럽다. 도둑이 매를 들고 있고, 방귀 뀐 이가 도리어 성을 내는 이 때가 소망이 없다. 특히나 보수라고 자처하는 교회들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온 나라를 무속의 영향력에 빠지게 하고 지도자조차 무속을 의지하는 한심함과, 거짓을 일삼고 사치를 즐기는 일에 대하여 침묵하는 것이 교회의 본분인가? 적어도 하나님 앞에 울부짖어야 할 것 아닌가! 이 땅의 교회의 일원이라는 사실이 부끄럽기 그지없다.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 앞에서 부르짖기라도 한다. 말씀앞에서, 말씀으로, 분명하게 전하고 살아낼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말이다.
 
    
    
2.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의 대결 제안과 준비(19~24절)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과 여호와의 선지자인 자신의 대결을 제안한다. 아합에게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갈멜산으로 모아달라고 요청한다. 그곳에서 이방신을 섬기는 선지자 850명과 자신이 대결하여 누가 참 신인지 백성들 앞에서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이라는 뜻은 이세벨이 그들의 후견인이라는 의미다. 이세벨은 북이스라엘에서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제거하고 많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로 대체하여 이스라엘을 우상의 나라로 대체해 버렸다. 엘리야의 요청에 아합은 사람을 보내어 모든 이스라엘 자손과 선지자들을 갈멜산으로 모았다.
    
엘리야는 갈멜산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언제까지 절뚝거리며 걷는 것처럼 이리저리 왔다 갔다가 하면서 양쪽 신을 섬길 것이냐고 질타한다. 그러면서 여호와와 바알 중에 참 신이라고 생각하는 쪽을 따르라고 요구한다. 여호와와 바알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경고한 것이다. 엘리야의 말에 백성들은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한다(21절).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이제부터 누가 참 신인지 알아보는 제사를 드리자고 제안한다.
    
엘리야와 바알의 선지자 450명이 각기 송아지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을 붙이지 않은 상태로 둔 후 각 선지자가 자기 신의 이름을 부른 후 불을 내려 응답하는 신을 참 신으로 인정하자고 제안한다. 백성 모두는 그의 제안이 좋다고 찬성한다(24절). 백성도 참 하나님의 권능과 기적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고픈 마음이 있었다.
 
*한편으로 “머뭇머뭇(파싸흐_절뚝거리다)”,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는”(21절) 백성들의 모습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인 듯하여 괴롭다.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머뭇거리고, 세상의 방법에 대하여 하나님 나라의 길은 이런 것이라고 말 한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모습이 아닐까하여 괴롭다. 머뭇거리지 않겠다. 하나님의 말씀을 꿋꿋하게 붙잡고 서 있으리라.
    
    
    
3. 바알 선지자들의 실패(25~29절)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에게 그쪽이 인원수가 많으니, 송아지를 택한 다음 먼저 제사 준비를 하고 그들 신의 이름을 부르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절대 불을 붙이지 말라고 한다(25절). 바알 선지자들은 엘리야의 말을 따라 송아지를 잡고 아침부터 한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응답은 없었다.
    
그러자 바알의 선지자들은 제단 주위를 절뚝거리며 뛰기 시작한다. 26절에서 “….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라고 번역된 “뛰놀더라(파싸흐)”라는 동사는 “절뚝거리다, 다리를 절다”라는 뜻으로 21절의 “머뭇머뭇”과 같은 단어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둘 사이에서 절뚝거리는 모습이 바알 선지자의 모습을 닮은 것임을 시사한다. 이렇게 제단 주위를 돌며 춤을 추며 뛰노는 것은 자기 신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정오까지 이렇게 하여 응답이 없었다. 엘리야가 이 모습을 지켜보면서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더 큰 소리로 신을 부르라고 조롱한다.
    
“한낮이 되니,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면서 말하였다. “더 큰 소리로 불러보시오. 바알은 신이니까, 다른 볼일을 보고 있을지, 아니면 용변을 보고 있을지, 아니면 멀리 여행을 떠났을지, 그것도 아니면 자고 있으므로 깨워야 할지, 모르지 않소!” (새번역_27절)
    
긴 시간을 기도해도 아무 소리도 없고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는 자도 없었다. 이렇게 조롱받은 바알 선지자들은 소리를 지르고 춤추고 몸에서 피까지 내면서 저녁 소제 드리는 시간이 될 때까지 미친 듯이 떠들었지만 역시 아무 응답이 없었다. 아침부터 저녁이 다 될 때까지 신의 이름을 부르고 모든 수단을 생각하며 광란의 시간을 보냈으나 바알은 응답 없었다. 바알은 가짜 신으로 판명되는 순간이다. 아침부터 이를 지켜본 이스라엘 모든 백성은 바알이 가짜 신인 것을 똑똑하게 본다.
    
*참 하나님이신지 거짓 우상인지를 구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우리의 음성에 응답하는지를 보면 안다. 하나님은 작은 소리에도 응답하시고 부르짖음에도 응답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러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 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이시다.
    
    
    
나는?
-본문에서 선택 앞에서 주저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엘리야는 백성들에게 바알과 하나님 사이에서 오가지 말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촉구하였으나 백성은 말이 없었다. 그런데 “불”로 바알과 여호와 사이에 참 신을 선택하자는 제안에는 “옳다”고 반응한다. 왜 그랬을까? 아합처럼 그들도 여호와나 바알 중 어느 것 하나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대결로 불과 번개의 신 바알이 참 신임을 입증되면 선지자도 더 이상 선택을 강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자기 입맛대로 바알도 여호와 하나님도 만들어 믿은 사람들이다. 여로보암의 길이 바로 그런 길이었다. 하나님과 겸하여 섬길 수 있는 신은 존재하지 않기에 자신들의 입맛대로 만들어 낸 하나님을 섬긴 것이다. 그러니 여호와와 바알 사이에서 택하라는 엘리야의 외침에 주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 것은 홀로 있는 하나님의 선지자인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 총 800명의 선지자였다. 더구나 바알을 지지하는 아합왕과 이세벨의 권력은 막강하기만 했다. 그 속에 홀로 엘리야 선지자가 서 있는 것이다. 여호와를 믿는 이는 엘리야 한 명 뿐이었다.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 현실이 너무도 큰 틈을 보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깨달아야 했다. 빛과 어둠은 공존할 수 없다. 하나님과 바알을 둘 다 섬길 수 있는 공간은 없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알을 믿는다는 것을 머뭇거림으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었다. 눈에 보이는 규모에 압도당하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어서는 안 된다. 눈에 안 보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온 땅에 가득하다. 하나님은 아니 계신 곳이 없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었다. 그래서 바엘에게 매우 유리한 게임 규칙을 제시했다.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에게 먼저 제물을 선택하게 하고 대결 장소도 바알의 주요 성지로 정하고, 압도적으로 많은 선지자를 동원하게 하였으며, 불의 신 바알에게 유리한 대결 조건도 제시했다. 게다가 무려 6시간여 동안 먼저 기도하도록 해주었다. 또한 그들은 왕과 백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도 받았다.
    
-세상은 여러 면에서 하나님의 백성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늘 세상이 교회를 이길 것 같고 이미 이긴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니 죽은 뒤에는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더라도 살아서는 세상에 더 기대고 싶은지 모른다. 그러나 매우 심각한 오판이다.
    
    
-아무리 불러도 응답하지 않았다. 아니 응답할 수 없는 바알이다. 오전부터 정오까지 아우성쳐도, 정오부터 저녁 소제 드리는 시간까지 자해하면서 울부짖었음에도 대답하지 않는 야속하고 비정한 바알이었다. 대답할 수 없는 신, 원래 살아있는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나무토막, 나무 기둥, 돌덩이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살아계신 인격자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열심이나 물량 공세나 감정적인 흥분에 움직이지 않으신다. 하나님을 경외하여 하나님께 자신을 위하여 복종을 요구하지 않고 더욱 하나님께 복종하는 자를 찾으신다. 그런 이에게 반응하신다.
 
 
*대답없는 바알을 향하여 고집스럽게 르짖는 그들의 모습이 안타깝고 불쌍하다. 그들은 알았어야 했다. 나무기둥은 아무리 불러도 대답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대답이 없는 것이 아니라, 대답을 할 수 없는 존재였다는 것을…
    
    
 
    
*주님, 450:1의 무모한 대결 제안은 엘리야가 그만큼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음을 보이는 증거임을 깨닫습니다. 나도 세상 속에서 홀로 믿음으로 서 있는 순간을 맞이해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꿋꿋하게 서 보겠습니다.
*주님, 불러도 대답 없는 바알을 끊임없이 찾는 어리석음의 인생들에게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보이며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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