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하나님의 것을 내 것인 양…. [왕상 20:35-43]
 – 2023년 10월 25일
– 2023년 10월 25일 –
하나님은 앞선 전쟁에서 아합에게 벤하닷을 진멸할 기회를 주셨지만, 아합은 마음대로 그와 조약을 맺고 풀어주고 만다. 이에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 아합의 생명으로 벤하닷의 생명을 맞바꿀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선지자는 이 예언을 선포하기 전, 두 사람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며 순종을 요구한다. 그 중 한 사람은 불순종하여, 사자에게 죽임을 당한다. 여호와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이처럼 반드시 심판이 뒤따른다. 아람의 재침략을 하나님의 도움으로 승리한 아합이 보인 행동은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여호와께서 주관하시고 참여하신 “여호와의 전쟁”이었음에도 아합은 자기 마음대로 결정을 내렸고 이에 대해 여호와께서는 분노하시며 아합에게 책임을 물으신다.
 
 
 
1. 선지자의 행동 예언(35~37절)
아합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벤하닷을 놓아준 후에 선지자의 무리 중에 한 선지자가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려고 보내셨다. 그런데 그 선지자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과 행동을 하게 된다. ‘여호와의 말씀을 그의 친구에게 이르되’라고 분명히 말하며 그의 친구 선지자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자기를 치라고 말씀하셨다고 말한 것이다. 여기에서 “치다(나카)”는 주로 전쟁에서 상대방을 죽이려고 공격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심각한 폭행을 하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선지자의 친구는 이 말을 이상하게 여겨 선지자의 말을 거절하고 그를 치지 않는다. 이에 선지자는 자기 동료에게 여호와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았으므로 자신을 떠나게 되면 사자가 너를 쳐서 죽일 것이라고 예고한다. 이런 여호와의 경고를 받고도 이 친구는 선지자의 곁을 떠났고, 정말 그에게 사자가 나타나서 그를 쳐서 죽였다.
 
이 죽음은 13장의 여로보암 제단을 비판하러 왔던 유다 선지자의 죽음과 유사하다. 둘 다 선지자이며 여호와의 말씀을 따르지 않아 사자에게 죽임을 당하고 있다. 죽은 사람은 선지자의 동료이기 때문에 그도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선지자에게 다른 선지자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때리라고 했을 때 그는 자기 생각과 상관없이 순종해야 했다. 그는 여호와의 선지자이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시키시는 일이나 전하라는 말씀은 합리적으로 생각되지 않거나, 자신에게 불이익이 되리라 생각되어도 따라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거절하였고 자신을 떠나면 사자가 공격하여 죽일 것이라는 여호와의 경고도 무시했다. 그의 죽음이 안타깝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여러 가지 일을 시키시고 명령하실 때가 있다. 그런데 나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에게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의 선지자나, 그의 말씀을 전달하며 사는 이들은 반드시 “말씀하신 대로” 순종해야 한다.
 
동료 선지자의 죽음 이후 그 선지자는 또 다른 선지자를 만났다. 그에게도 자신을 쳐달라는 같은 요청을 했고, 그는 선지자가 요청한 대로 심하게 쳐서 상처를 입혔다. 굳이 이렇게 비상식적으로 보이는 폭력을 사용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이해가 안 될지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는 사람들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듣지 않을 만큼 완악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벧엘의 선지자가 유다의 선지자를 죽이면서까지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확인한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하여 상식적인 말이나 행동에는 꿈쩍도 안 해서 극단적이고 이상한 방법을 사용하신 것이다.
 
 
 
2. 아합왕에게 비유로 말하는 선지자(38~40절)
얻어맞아 상처가 난 선지자는 자기 눈을 수건으로 가리고 변장하여 길가에서 왕을 기다린다. 이는 선지자가 상처가 나도록 맞은 이유를 설명해 준다. 아합왕을 만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또 그가 눈을 가린 이유는 자신이 선지자라는 사실을 왕에게 숨기기 위해서이다. 41절에 따르면 선지자와 아합은 서로 알고 있었던 사이였다. 왕이 지나갈 때 큰 소리로 불렀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야기인 것처럼 하소연했다.
 
자신이 전쟁에 나갔다가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포로 한 명을 데리고 와서 잘 지키라고 하였고, 만일 잃어버리면 네 생명으로 생명을 대신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은 한 달란트를 내야 한다고 했는데, 자신이 이런저런 일을 보는 동안 그가 사라졌다며, 이제 자신은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묻는다. 그의 말을 통해 그가 죽도록 얻어맞은 것은 선지자가 전쟁터에서 포로를 놓쳐버린 병사로 분장했고 전쟁터에서 막 돌아온 것을 좀 더 실감이 나게 표현하여 왕을 완벽하게 속이려고 선지자는 동료에게 자신을 때리라고 부탁한 것이다. 여기저기 얻어맞은 상처에 눈까지 가려져 있었기에 아합은 그대로 속을 수밖에 없었다.
 
아합은 네가 결정한 너의 판단대로 당해야 한다고 대답해 준다. 비록 전쟁으로 인해 상처를 입어 눈이 안 보이는 상황에서도 본인의 약속은 본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조언한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선지자는 계속 아합왕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부른다. 이는 왕의 대답은 단순한 의견이 아닌, 일종의 판결인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본인이 책임져야 한다”라는 말은 의견이 아닌 왕의 판결이 되는 것이다.
 
 
 
3. 아합에게 심판 선언을 하는 선지자(41~43절)
왕이 판결을 내리자, 선지자는 급히 자신의 을 가린 수건을 벗으며 정체를 드러낸다. 아합왕은 그제야 그가 전쟁터에서 돌아온 병사가 아니라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인 것을 알게 된다.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라는 전형적인 구문을 통해 여호와의 말씀을 그대로 전한다. 여호와께서는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네 손으로 놓아주었다”라고 질책하신다.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이쉬-헤르미)”의 의미는 아람 왕이 진멸의 대상이었다는 뜻이다. “멸하기로(헤르미)”는 “진멸(헤렘)”이라는 뜻이다.
 
2차 전쟁 전투가 시작되기 전 하나님의 사람으로부터 “여호와께서 모든 군대를 너의 손에 넘기겠다”라고 하신 말씀은 아람 군대와 아람 왕을 진멸하라는 뜻이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진멸 명령을 내리셨음에도 아합왕은 이를 무시하고 벤하닷의 항복과 뇌물과 상업적인 이권”에 대한 제안에 넘어가서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벤하닷과 그의 남은 군대를 “살려서” 돌려보냈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벤하닷의 목숨은 아합의 목숨으로 대신하고, 그의 백성은 네 백성의 목숨으로 대신 받겠다고 선언하신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멸망시키기로 작정한 사람을 네가 직접 놓아주었으니, 너는 그 목숨을 대신하여서 죽게 될 것이고, 네 백성은 그의 백성을 대신하여서 멸망할 것이다.'”(새번역_42절) 진멸(헤렘)이 선언되면 그것은 모두 여호와께 속한 것으로 간주되어 하나도 빼돌려서는 안 된다. 진멸은 하나님의 심판이다. 하나님께서 아람 군대와 벤하닷을 아합의 손을 통해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다. 한편 엘리야에게 벤하닷 이후에 아람의 왕이 될 하사엘에게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우라는 명령을 하신 것을 보면 벤하닷에 대한 심판을 미리 작정하고 계셨던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선지자의 선언은 승전으로 기뻐해야 할 아합의 마음을 순식간에 근심과 답답함으로 탈바꿈시킨다. 어떤 반박도 할 수 없었던 것은 선지자에게 이미 자신이 한 행동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말하였고 목숨이나 은으로 그에 대한 대가를 지급하라고 판결했기 때문이다. 자기 입으로 자신에 대한 판결을 한 셈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얻어맞은 선지자를 아합에게 보내 “놓친 포로 이야기”를 하게 만들고, 아합의 입에서 자기 행동에 대해서 책임지라는 말을 하게 만드신 것은 아합이 빠져나갈 수 없도록 덫을 놓으신 것이다. 이는 마치 나단이 부자와 가난한 자의 새끼 염소 비유를 통해 다윗이 자신이 범한 죄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신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위선적이고 뻔뻔한 모습을 통해 자신의 죄를 직면하게 만드신다. 이런 질책에 대해 회개로 응답한 다윗은 용서함을 받고 왕권이 이어졌지만, 아합은 회개하지 않았고, 그냥 근심하고 답답해하는 수준에서 머물렀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았다.
 
 
 
나는?
-신앙은 말씀 순종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선지자가 친구 선지자에게 그 말씀대로 자신을 치라고 하자 거절한다. 하지만 그는 말씀에 불순종하였기에 사자에게 물려 죽고 만다. 친구를 치는 것이 더 큰 죄처럼 보이고 치지 않는 것이 도리에 맞는 듯이 보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보다 더 큰 죄는 없음을 보여준다.
 
-선지자는 다른 친구에게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신을 치라고 요청하였고, 그는 선지자를 쳐서 상하게 했다. 선지자는 말뿐 아니라 행동과 삶 전체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대신 말하는 사람이다. 때로 그것을 다 이해할 수 없거나 인간적인 도리와 상식을 넘어서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면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선지자의 요구에 불응하는 친구 선지자는 선지자의 선포대로 사자에 물려 죽는다. 선지자 자신을 치라는 요구에 순종하여 크게 상해를 입힌 친구는 도리어 살아남는다. 때로 하나님의 요구는 상식과 이해를 뛰어넘는다. 친구를 치는 것이 안치는 것보다 더 큰 죄처럼 보인다. 하지만 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온정주의를 버리고 하나님 명령이 엄중함을 택해야 했다. 나의 감정과 기준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신앙은 자기 인식과 인정을 먼저 자신에게 용기를 내 정직하게 해야 한다. 선지자는 나단 선지자가 다윗의 죄를 드러낼 때처럼, 자기 이야기인 듯 꾸며서 왕에게 하소연했다. 자신이 포로를 감시하다 놓쳤는데, 그 대신 자기가 대신 죽든지, 은 한 달란트를 물어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고 묻는다. 아합왕은 스스로 결정한 대로 당해야 한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아합왕은 그것이 자기 이야기인 줄을 알지 못했다. 나도 더욱 날 선 분별에 대해 각성하게 된다. 다른 사람의 형편은 잘 보살펴 주거나 비판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남에게는 잘 적용하면서도 정작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에게 적용하는 일은 소홀하기 쉽지 않은가?
 
*남을 비판하거나 탓하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나에게 적용하면 더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은 누구나 해보았을 것이다. 이런 자기 성찰과 자기 인식이 참 신앙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다.
 
 
-신앙은 하나님의 주권과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아람 왕 벤하닷은 여호와의 말씀대로 치러진 전쟁에서 얻은 “헤렘”, 즉 하나님의 소유물이었다. 하지만 아합은 벤하닷이 마치 자기 소유인양 자기 맘대로 풀어주는 오만을 부렸다. 패자에 대한 멋진 관용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거드름을 피운 것일 뿐이다. 선지자는 결국 하나님께서 벤하닷의 목숨 대신에 아합의 목숨을 거둬가실 것이라고 선언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다. 내가 이룬 것 중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가 아닌 것이 없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있는가?
 
 
 
*주님, 하나님의 것이라고 선언된 것조차 나인 것인 양 오만하게 사용하는 아합과 같은 모습이 저에게도 있습니다. 늘 묻고 또 물으며 말씀하신 대로 순종하며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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