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 2_비겁한 공범은 되지 말아야지… [왕상 21:11-29]
 – 2023년 10월 27일
– 2023년 10월 27일 –
이세벨은 거짓으로 모함하여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아 아합에게 준다. 나봇이 하나님을 저주한 것으로 꾸몄지만 사실 하나님의 법을 어긴 사람은 이세벨이었다. 하나님은 이런 악행에 대해 엘리야를 보내 아합에게 심판을 선고하신다. 하지만 아합의 회개를 들으시고 그 심판을 연기하신다.
 
하나님께서 아합에게 내리신 심판은 개들이 아합의 피를 핥을 것이며 이세벨의 시체를 먹을 것이라고 하면서 심판 속에 개들이 등장한다. 이스라엘에서 개들은 거리와 골목을 배회하면서 쓰레기를 뒤져서 먹고사는 지저분한 짐승이었다. 그러므로 개가 아합의 피를 핥고 이세벨의 시체를 먹는다는 것은 아합과 이세벨이 거리에서 죽거나 죽은 후에도 안장되지 못하고 시체가 길에 버려질 것이라는 의미다. 고대 사회에서는 죽은 후 묘실에 안장되는 것이 사후의 평안한 삶과 연결되어 있기에 제대로 안장되지 못하고 길거리에 버려지는 것은 매우 두려운 벌이었다.
 
 
1.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차지한 아합(11~16절)
나봇이 살던 성읍의 장로들과 귀족들은 이세벨이 보낸 편지대로 시행한다(11~13절). 여기에서 이세벨의 죄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녀의 죄는 권력남용이다. 왕권은 백성을 지키고 하나님의 율법을 수호하도록 위임해 주신 것이지만 사사로운 이익을 챙기는 데 사용했다. 또 이세벨의 죄는 여호와의 율법을 악용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무력화한 것이다. 십계명 중에 “거짓 증거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라는 계명을 정면으로 어긴다. 아합의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 버젓이 여호와의 율법을 악용한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세벨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계명을 들고나와 나봇을 죽였다. 이는 여호와의 율법을 철저하게 무력화시키는 짓이었다. 하나님의 공의로움을 비웃는 행동이었다. 정의를 훼손하는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질렀다. 이세벨은 여호와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빼앗아 자신의 왕국을 세운 셈이다. 장로들과 귀족들은 이세벨의 악행에 그대로 동조했다.
 
이세벨은 나봇이 죽었으니 그이 포도원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고 아합에게 알린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나봇이 죽으면 그의 자식들이 땅을 이어받아야 하지만, 당시에는 왕에게 죄를 지은 자의 땅은 왕이 몰수할 수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나봇의 죄목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라는 것이었다. 아합은 이 소식을 듣고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기 위해 이스르엘로 내려갔다.
 
근심하고 답답하여 식음을 전폐했던 왕이 활기를 되찾았다. 나봇의 죽음이나 그 과정은 관심조차 없다. 그저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활기를 되찾은 것이다. 얼핏 이 사건은 아합은 제외되고 이세벨만 죄를 지은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나쁜 사람은 아합이 틀림없다. 그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단념하지 못하고 속을 끓이고 있었고 이세벨이 그것을 가져다주겠다고 했을 때 그녀가 불법적인 방법과 여호와의 율법을 어기는 짓을 할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음에도 만류하지 않았다. 또 나봇이 죽었고 포도원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세벨이 나봇을 죽이고 그 밭은 차지한 것도 알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철저히 침묵하고 오직 포도원을 갖게 된 것만을 기뻐하였다.
 
*이 사건의 1차 범인은 아합이고 이세벨은 행동대원이었을 뿐이다. 여호와 보시기에 둘 다 악한 자들이다.
 
 
 
2. 엘리야를 통해 아합을 심판하시는 하나님(17~19절)
이세벨이 겉으로 보기에는 적합한 절차와 방법을 통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았으나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처음부터 보고 계셨다. 결국 엘리야를 불러 아합에게 심판 선언을 하기로 결심한다. 여호와께서 아합에게 두 가지를 말씀하신다.
 
먼저 아합의 죄목은 나봇을 죽이고 그의 소유를 빼앗은 것이다. 나봇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이세벨이 아니라 아합에게 물으신다. 이는 그가 직접 죽이지 않았지만, 원인을 제공하였고 이세벨이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알고도 묵인하고 방조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심판으로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을 것이라고 판결하신다. 이는 나봇이 길에서 살해당한 것처럼 아합도 길에서 살해당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이 심판의 정신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원리다. 이것은 구약 상해 보복법의 근간이며 하나님께서는 이에 따라 아합이 나봇의 죽음에 대해 죽음으로 갚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3. 엘리야가 아합에게 여호와의 판결을 전달함(20~26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엘리야는 아합을 만나러 갔다. 아합은 그를 보며 자기 원수라고 부르며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이에 엘리야도 아합이 스스로 악을 저지르는 일에 자신을 팔았다고 비난한다. 그리고 아합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다. 19절에 언급된 아합의 비참한 죽음 이외에도 그의 가문 모든 남자를 쓸어버리시겠다고 선언하신다. ‘이스라엘 가운데 매인 자나 놓인 자’라는 표현은 어떤 상황에 있든지 모두 죽이겠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아합의 집에 내린 벌이 어떤 종류인지 여로보암 왕가의 멸망과 아히야 왕가의 멸망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려 주신다. 이것은 오므리 왕가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 아합 왕가가 완전히 무너진다는 의미이다.
 
또 이세벨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는 개들이 이스라엘 성읍에서 이세벨의 시체를 먹게 될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것은 이세벨이 죽임을 당한 후에 길에 버려져 그의 시신을 개들이 먹게 될 것이라는 의미다. 그리고 아합에게 속한 자들, 즉 가족과 심복들과 그의 정권을 떠받치고 있는 귀족들을 모두 한통속으로 보고 이들도 이세벨과 같은 죄를 물어 같은 심판을 내리신다. *지도자의 잘못이 크지만, 지도자가 악한 일을 실행하는 것을 묵과하거나 동조하거나 적극 협조한 것도 모두 죄가 된다고 보신 것이다. 이들은 이세벨과 한 몸처럼 움직이며 누구도 나봇을 죽이면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다.
 
아합 왕가가 이런 심판을 받게 된 이유는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하기 위해 스스로를 팔았다. 또 아내 이세벨의 유혹을 받았는데, 아합의 의지와 이방 여자 이세벨의 유혹의 합작품이다. 또 아합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낸 아모리 사람들이 행하던 것처럼 우상을 섬기며 매우 가증하게 행동한 것 때문에 심판을 받은 것이다(25~26절).
 
 
 
4. 아합의 심판을 연기하시는 하나님(27~29절)
여호와의 심판을 들은 아합이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서 다닌다. 하나님의 심판 선언에 놀라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한 것이다. 그는 갈멜산에서 불이 내리신 하나님, 가뭄을 물러가게 하는 큰비를 내리신 하나님, 아람 왕 벤하닷을 이기게 하신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시는 것과 그가 큰 권능으로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다 이루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자신과 자신의 왕가를 다 멸하실 것을 믿었기에 죽음의 공포 앞에서 하나님 앞에 굴복한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굴복한 아합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나타나셔서 아합을 용서하시고 그에 대한 처벌을 다음 세대로 미루신다고 말씀하신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29절) 라고, 말씀하시며 마치 아기가 첫걸음마를 뗀 것을 보며 감격하며 자랑스러워하는 아버지의 모습처럼 좋아하신다.
 
*과연 여호와는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가 많으시다. 그러나 심판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 더 아합을 참아주시는 것뿐이다.
 
 
 
나는?
-비겁한 협력자, 장로들과 귀족들…. 이세벨의 음모가 거짓 증거와 살인을 금하는 율법을 명백하게 어기는 것임에도 성읍의 장로들과 귀족들은 그녀의 지시를 고스란히 따른다. 그리고 나봇과 그의 아들들까지(왕하 9:26) 죽인다. 갈멜산에서 여호와가 바알을 이긴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을 터이지만 당장 손에 쥔 권력과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모습 역력하다.
 
-율법을 앞세우고 오히려 율법을 무너뜨리는 이세벨의 간악함 앞에 어떤 저항도 하지 않고 그저 적극적으로 부역한다. 율법을 앞세우고 합법을 가장하여 하나님을 저주한 자를 돌로 치면서도(출 22:28), 정작 자신들은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을 능멸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내가 지금 누리는 세상이 주는 유익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과 가치를 저버리면 안 된다. 잠깐의 권력과 한 줌의 소유를 위해 하나님을 거역해서는 안 된다.
 
-지금 이 나라의 지도자들에게 특히나 통찰하게 하는 말씀이다. 교회 지도자들에게 보내시는 경고다. 잠깐의 권력자 앞에 하나님 말씀의 가치조차 헌신짝 버리듯 버리는 행태에 동조하면 안 된다. 말도 안 되는 억지 주장들과 우상을 숭배하게 하는 각종 행태 앞에 잠잠하면 안 된다. 하다못해 하나님 앞에서라도 울부짖고 가슴을 쳐야 한다. 그래야 산다.
 
 
-비겁하기만 한 공범자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아합은 나봇이 죽었다는 소식에 기다렸다는 듯이 포도원을 차지한다. 충분히 이세벨을 의심할 만한 상황이었으나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묻지 않는다. 나봇의 아들들까지 죽었으니, 자신이 포도원을 차지한들 율법에 비추어 문제없다면 정당화했을 것이다. 그러나 포도원에 집착한 아합이나, 사악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한 이세벨, 그것이 실현되도록 도운 장로들과 귀족들, 매수되어 거짓으로 증언한 건달들, 변호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처단해 버린 성읍의 백성 모두 나봇 살인의 공범자들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아합 시대의 총체적인 부패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오늘날 나 역시도 이 사회의 불의에 대해 최종적인 가해자가 아니라고 떳떳할 수 없다. 침묵하면 얻을 수 있는 이익과 발언하면 받을 수 있는 불이익 때문에 악을 방조하거나 묵인한 나도 공범이 될 수 있다. 특히 내가 사는 오늘의 시대는 더욱 그렇다. 악행의 공범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뜻을 오롯이 증언하는 삶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겠다.
 
 
-단호한 심판 선언 앞에 한 없이 두려워하며 회개하는 아합과 그런 아합을 용서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절묘하게 교차한다.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은 것에 분노하신 하나님의 단호한 멸문지화의 심판이 선언된다. 하나님께서는 충동질한 아합과 그 충동질을 실행한 이세벨에게 책임을 물으신다. 그리고 이스라엘 중에서 가장 비참한 죽음을 선언하신다.
 
-그런데 심판 선언을 들은 아합이 진심으로 회개하고 겸비해지자, 그 심판을 유예하신다. 담대하게 죄를 짓지도 못하고 담대하게 순종도 못하는 아합이 어쩌면 오늘의 나 자신과 많이 닮았는지 모른다. 환경을 탓하거나 자신의 마음에 변명을 합리화하여 악을 행하거나 동조하지 말아야 한다. 식음을 전폐하면서까지 추구하는 욕심, 그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미련, 율법을 악용하여 율법 안에서 사욕을 채우기 위해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탐욕, 악이 넘쳐나는 것을 보고도 지금 당장 누리는 작은 유익을 포기하지 못해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어리석음…. 이 모든 것은 넘어서라고 주신 것이지 이것 때문에 넘어지라고 주신 조건과 환경이 아니다.
 
 
*힘이 숭배되는 세상이다. 오늘날의 세상은 아합과 이세벨이 좋은 포도원 땅을 얻기 위해 나봇을 살해하는 세상과 다를 바 없다. 이런 세상에서 사람을 신뢰하기는 무척이나 어렵다. 사람을 자신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밖에 보지 않는 아합과 이세벨의 시각이 그 시대보다 더 치밀해진 세상이다.
 
*그런데 이런 사회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아 상심이 된다. 불의는 잘 참으면서 불편함은 참지 못한다. 불의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거짓말을 입에 담고 살고 남의 것을 훔쳐서라도 목적을 이루면 잘했다고 평가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하기야 가장 본이 되어야 할 지도자가 입으로는 공정, 정의, 준법을 남발하면서 실제 자기 삶에서는 불법과 탈법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니 이 땅에 무슨 정의로움을 기대할 수 있을까? 그런 지도자를 잘한다고 여전히 맹신하는 이들의 무뢰함과 무례함이 도를 넘었으니, 이들이 아합과 이세벨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부역한 장로들, 귀족들과 다를 바 하나 없다. 그래서 두렵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선언하셨다.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이런 악이 방치되는 것이 아니라 눈여겨 지켜보고 계시다가 반드시 그 악을 처리하신다.
 
*자기만족과 유익, 자신에게 조금의 불편함도 용납하지 않는 세상은 도가 넘은 민원 제기와 갑질을 당연한 시민 혹은 학부모의 권리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그렇게 날이 선 민원을 제기하며 피를 말리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조심해야 할 일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그렇게 대하지 않으시고 사랑과 은혜로 대하셨음을 잊으면 안 된다. 나도 철저하게 심판받고 정죄 받을 존재였지만,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악하디악한 아합도 잠시지만 진심으로 회개하니 하나님께서 기다리셨다는 듯이 심판을 다음 세대로 넘기신다. 그러나 없애지 않으셨다. 유보 혹은 연기하셨다. 죄의 문제는 반드시 처리하시는 단호함을 잃지 않으시되, 진심으로 회개하는 영혼을 보듬어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아합이나 이세벨과는 정반대의 삶을 산 동시대 인물이 있다. 그들에게는 나봇이 사는 성읍의 장로들이나 귀족들과 같은 부역자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오바댜와 같은 “지극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나님을 경외한 그는 아합이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는 그 시대 속에 오히려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죽을 상황에 있던 선지자 100명을 숨기고 먹을 것과 마실 것으로 책임져 주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하신 것처럼 먹이고 베풀고 살리는 사람이어야 한다. 감사하게도 아합과 이세벨의 시대에도 오바댜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이 있었다.
 
*오늘날에 그와 같은 그리스도인이 내가 되어야 하고 우리 더온누리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그들에게 베풀기 위해 존재하는 교회여야 한다. 드러나지 않지만, 사람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동굴을 마련하고 오만과 무뢰함, 죄악의 폭풍이 지나가기를 함께 마음을 졸이고 있어 주는 사람, 교회가 되어야 하겠다.
 
 
 
*주님, 저도 이 시대의 악함을 보고, 지도자들의 악행 속에 살며 비겁한 공범자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참담하고 부끄러움을 당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더욱 간절히 절규하겠습니다.
*주님, 살리고 베푸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끝까지 이 가치를 지켜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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