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듣고 싶은 말씀이 아니라 들어야 할 말씀을 들어야 한다 [왕상 22:1-14]
 – 2023년 10월 28일
– 2023년 10월 28일 –
아합은 아람과의 2차 전쟁 이후 벤하닷이 돌려주기로 약속한 길르앗 라못 땅을 돌려주지 않자, 그 땅을 되찾기 위해 전쟁을 계획한다. 남 유다의 여호사밧 왕은 이 전쟁에 합류 의사를 밝히면서,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자고 아합에게 제안한다. 이에 아합은 선지자들을 소집했고, 그들 모두는 출정을 부추기며, 하나님이 승리를 주실 것이라고 예언했다. 하지만 여호사밧은 이들의 일치된 예언에 의구심을 품었고, 다른 선지자를 구하자 결국 아합은 여호와의 선지자 미가야를 불러오게 한다.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갖기 위해 나봇을 죽인 사건을 통해 아합의 집에 심판 선언을 하셨다. 하지만 아합의 회개로 아합과 그의 가문과 왕국에 내리시기로 했던 징벌을 아합 아들의 시대로 연기해 주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심판하기보다는 죄인이 회개하는 것을 더 원하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심을 알려주신 사건이다. 그러나 심판을 연기받은 아합은 이방신을 섬기던 이전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고 만다.
 
 
 
1. 아합과 여호사밧의 동맹(1~4절)
다시 이스라엘과 아람 간의 전쟁이 시작된다(1~40절). 앞선 두 번의 전쟁과 달리 이번에는 아합이 먼저 아람을 칠 준비를 한다. 길르앗 라못을 회복시키기 위한 전쟁은 아합의 죽음을 예고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전쟁이다. 흥미로운 것은 갈멜산에서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이 참 신을 가리는 경합을 했듯이(18:20~40) 미가야와 거짓 선지자들이 출정에 대한 하나님의 참뜻을 가리는 경합의 과정을 보여준다(1~28절).
 
이 전쟁이 일어나기 전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은 “카르 카르 전투(주전 853년)”가 있었다. 아합이 벤하닷과 열 왕과 연합하여 수리아 서북부 지역의 카르 카르에서 앗수르의 살만에셀 3세(주전 859-824)에 맞서 싸워 승리한 전쟁이다. 이 전투가 기록된 쿠르크 석비에는 다메섹 왕과 더불어 아합이 가장 막강한 왕으로 묘사되었다.
 
아합은 앞서 아람과의 두 전쟁에서도 크게 승리하였고 카르 카르 전투에서도 승리했으니 길르앗 라못을 탈환하는 일은 큰 자신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전쟁의 승리가 하나님 덕분이었음을 아합은 여태껏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이번 전쟁에는 남 유다의 왕 여호사밧도 합류한다. 남 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아합은 자녀의 정략결혼(대하 18:1)을 통해 적대관계에서 우호 관계로 전환했었다. 이렇게 하여 아합은 아람과 앗수르를 견제하고 각 나라의 입지를 공고히 하려고 했다.
 
이번 전쟁의 원인은 아벡 전투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패한 벤하닷은 ‘이스라엘에서 뺏은 모든 성읍’을 반환하기로 한(20:34) 약속을 어긴다. 이에 아합은 분개하였고 영토 탈환에 대하여 남 유다의 여호사밧에게 동참을 권유한다. 여호사밧은 자신이 아합과 같고 자기 백성과 말들도 마찬가지라며 기꺼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여호사밧은 이전의 왕들과 달리 친이스라엘 정책을 취한다. 이에 대해 역대하 18~20장에서는 군사, 건축, 무역 등에서 상승효과를 기대했고 오므리 왕조에 대한 호의적인 모습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기록한다. 그러나 이런 이유에도 불구하고 여호사밧이 바알을 섬기는 아합왕과 교류하고 그를 돕는 어리석음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대하 19:2).
 
 
 
2. 마치 짠 듯한 전쟁에 대한 사백 명의 선지자들의 승리 예언(5~6절)
아합에게 합류한 여호사밧은 그에게 여호와께 전쟁에 참여해도 좋을지를 묻자고 한다. 여호사밧은 여호와 보시기에 선한 왕이었다(왕상 22:43). 이런 그의 모습은 자기 마음대로 전쟁하려는 아합의 불신앙적인 모습과 선명하게 대조가 된다.
 
아합은 나봇 사건으로 인해 여호와의 심판 선언을 받은 후 죽음이 두려워 여호와께 회개하고 받을 벌이 연기되는 은혜를 입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다시 평안한 삶을 살게 되면서 여호와의 은혜와 권능과 두려움을 잊어버린다.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는 전쟁 여부를 여호와께 물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아합은 여호사밧의 요청에 따라 선지자 사백 명을 모았다. 그런데 이들이 여호와를 섬기는 선지자인지가 의심이 되었다. 또 북이스라엘의 상황에서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들이 핍박받고 있었던 것을 고려하면 여호와의 참 선지자를 사백 명이나 모으는 일은 쉽지 않다. 그렇기에 이들은 왕의 소리에 힘을 실어주는 어용 선지자 집단임이 틀림없다.
 
*이런 선지자들에게 물어서일까? 그들은 아합의 마음에 맞게 이구동성으로 모두 올라가라고 했다. 그리고 아람 군대를 ‘나의 주인께서 왕의 손에 주셨다’라고 응답해 주었다. 그런데 그들은 선지자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전할 때 사용하는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라는 예언 구문도 사용하지 않았다. 주어를 ‘여호와’라고 하지 않고 ‘나의 주’라는 애매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였다.
 
 
 
3. 미가야 선지자를 요청하는 여호사밧(7~9절)
이런 모습을 본 여호사밧은 이들의 예언이 미심쩍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다른 선지자는 없는지, 그에게 물어볼 수 없는지 재차 묻는다. 여호사밧은 여호와를 섬겼기에 이들의 모습과 말이 일반적인 선지자와 다르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안 것이다.
 
그러자 아합은 ‘미가야’라는 한 선지자가 아직 남아 있고 그에게 여호와의 뜻을 물어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아합은 미가야는 늘 자신에게 좋은 것은 예언하지 않고 항상 나쁜 것만 예언하기 때문에 그를 미워한다고 솔직하게 말한다.
 
자신이 매우 꺼리는 선지자이기에 부르지 않았고 불러와도 나쁜 이야기만 할 것이 뻔하기에 불러오기 싫다는 것이다. 이런 아합에게 여호사밧은 여호와의 말씀이면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다 들어야 한다는 의미로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고 충고한다.
 
*미가야라는 선지자는 본문에서 처음 등장하나 아마도 종종 아합에게 나타나 여호와 앞에서 죄를 범하거나 옳지 않은 결정을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악한 아합이라도 지속해서 선지자를 보내셨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신 여호와께서 아합의 악행을 막고 그와 이스라엘이 여호와 앞에서 더 큰 죄를 짓는 것을 막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와 경고가 여전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합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가로막는 인물이라고만 여겨 싫어한 것이다. 이를 통해 아합이 자신의 권위만 내세우려 하고, 자신을 비판하는 소리를 전혀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인물인 것으로 파악된다.
 
 
 
4. 승리의 예언을 하는 선지자들과 미가야 선지자의 등장(10~14절)
아합이 부른 사백 명의 선지자들이 사마리아 성문 광장에서 예언한다.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라는 선지자가 자신을 위하여 철로 만든 뿔을 가지고 와서 들고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것으로 아람 사람을 완전히 치라고 하셨다고 예언한다. 시드기야는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라는 예언자의 전형적인 문구와 도구까지 사용하면서 자신이 진정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는 것처럼 선포하였고 나머지 선지자들도 이에 동조했다.
 
시드기야의 이런 예언 행동은 5~6절에서 예언한 선지자들보다 형식적으로는 훨씬 여호와의 선지자와 같았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여호와의 전형적인 예언 문구를 사용하고, 자신들이 진정한 여호와의 선지자라고 주장까지 한다.
 
이러는 사이 아합이 보낸 사자는 미가야에 도착한다. 그는 미가야에게 선지자들이 하나같이 왕에게 좋은 말만 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제발 왕에게 좋은 예언을 해달라고 부탁한다. 이런 사자의 모습을 볼 때 사백 명의 선지자들도 이미 아합이 어떤 말을 하면 좋아할지 알고 온 사람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사백 명의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선지자라는 이름을 갖고 있으면서도 여호와의 뜻을 온전히 찾는 것보다 왕의 눈치를 보며 왕이 원하는 말만 하려는 어용 선지자들이다.
 
아합 왕조가 전체적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부패했는지 바로 보여주는 모습이다. 아합은 여호와를 왕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 생각대로 전쟁하려고 한 것이다. 신하들은 왕의 눈치만 보고 왕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움직였다. 결국 여호와의 말씀을 저대로 전해야 하는 선지자들도 왕의 눈치를 보면서 왕이 원하는 말만 하는 지경이 된 것이다.
 
그러나 미가야는 아합의 사자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는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면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것만 말하겠다고 단호하게 선언한다. 미가야는 아합을 위한 선지자가 아니라 오직 여호와의 말씀만 전하는 여호와를 위한 선지자인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낸 것이다.
 
이렇게 분명한 정체성은 아합왕이 싫어할 것과 자신의 삶이 고달프게 할 것도 알았지만 자신이 여호와의 말씀을 온전하게 전하는 것이 아합과 이스라엘에 더 유익할 것을 알았기에 여호와의 말씀만 전하는 본연의 사명에 충실하겠다고 한 것이다.
 
*미가야의 모습에서 오늘날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서 있을 때 사백 명의 선지자들과 같은 모습을 경계하고 미가야와 같은 여호와를 위한 선지자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며 서 있을 때 교회와 사회와 나라가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가 바로 설 수 있음을 다시 확신하게 된다.
 
 
 
나는?
-명분과 실리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묻자고 한 여호사밧의 모습을 기억해야 한다. 겉으로 보기에 길르앗 라못을 되찾는 전쟁은 명분이 확실하다. 벤하닷이 약속한 것을 이행하지 않은 것부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주신 땅을 회복하는 것이라는 목적도 타당했다. 그런데 아합과 함께 이 전쟁에 출정하기로 한 남 유다의 여호사밧 왕은 그럼에도 여호와의 뜻을 물어보자고 했다.
 
-훌륭한 명분, 분명한 실리의 전쟁이었음에도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인지를 되묻는 여호사밧의 태도는 나에게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모두가 동의하는 동기와 목적이 분명한 것이라도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묻고 또 물어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는 것인지 확인하는 신중함을 늘 유지해야 하겠다.
 
 
-아합은 여호사밧의 말을 받아들여 순식간에 사백 명의 선지자를 불러 모은다. 이들은 하나같이 한 입으로 이 전쟁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예언한다. 그중에 시드기야는 철뿔까지 만들어 전쟁의 승리를 확신시켰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간 왕의 결정을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야 하는 선지자의 사명을 포기한 채 왕의 입장을 종교적으로 정당화 시켜줌으로써 생계를 유지하는 거짓 선지자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시는지 모다 아합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고,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에 관심이 있었다.
 
*많은 사람이 좋아하고 감동하며 지지한다고 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다. 또 우리를 아프게 하고 불편하게 하며 나의 기대와 다르다고 다 잘못된 말씀인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주관적인 자기 확신보다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늘 더 깊이 상고하고 추구해야 할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압도적인 다수의 만장일치, 예언과 예언자적 상징까지 다 갖춘 그들의 예언은 의심의 여지 없이 하나님의 뜻으로 보였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들의 만장일치, 이구동성이 오히려 불편했다. 그 불편함을 감추지 않고 다른 하나님의 사람을 찾는 영적으로 기민함을 끝까지 유지했다.
 
 
-미가야 선지자는 왕이 듣고 싶은 것이 아닌 흉한 것만 예언하는 바람에 아합왕의 미움을 샀다. 긍정적인 예언을 하라는 왕의 사신 회유를 받았으나 단호하게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겠다고 대답한다.
 
-나의 사명도 미가야 선지자의 사명과 다르지 않다.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선명하게 오롯이 전하는 사명에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을 전하는 것과 타협하지 않겠다. 권력과 여론의 흐름에 나를 맡기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닌 들어야 할 말씀으로 전하겠다. 불편하고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오해를 받고 때로 질타를 받더라도 감수하겠다. 이 시대와 교회와 나라를 향한 하나님의 준엄한 말씀을 전해야 하겠다.
 
-미가야를 미워한 아합은 실상 하나님을 미워한 자이다. 자신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지 않는 그를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단지 나의 귀를 즐겁게 하지만 나를 죽이는 말씀이 아니라 나의 귀를 불편하게 하여도 나를 살리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지혜로움과 겸손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미가야는 아합이 눈치를 보고 신경을 곤두세우는 불편한 한 사람이었다. 사백 명의 선지자들에게 하나님은 죽고 아합왕만 살아있는데, 미가야만은 하나님은 살아계신 단 한 분의 주권자이셨다. 미가야가 눈치를 보고 그가 두려워하고 그가 마음을 다하여 신경을 쓰는 유일한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셨다.
 
 
 
*주님, 공동체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었다고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 있기에, 늘 주님의 마음과 뜻을 끝까지 찾는 것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성급한 만장일치보다 더디더라도 주님의 뜻을 기다리는 지혜로움과 겸손함을 주십시오.
*주님,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말씀이 아니라 내게 들려주시는 말씀을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겠습니다. 단지 귀가 즐거운 말씀이기보다 아프더라도 마음을 일으켜 세우는 말씀을 듣겠습니다.
*주님, 성도들의 마음보다 하나님의 마음에 더 신경을 곤두서겠습니다. 성도들의 마음은 주님께서 더 어루만져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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