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까닭 없는 신앙, 욥을 보면 증명된다 [욥 1:1-12]
 – 2023년 11월 03일
– 2023년 11월 03일 –
우스 땅에 욥이라고 하는 의로운 사람이 있었다. 그는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이다. 그는 매일 아침 상번제를 드리며 자신과 자기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라도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 않으려는 삶을 살았다. 그런데 천상에서 사탄과 하나님 사이에 욥의 의로움의 동기에 관한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사탄은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할 리 없으며 만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면 하나님을 욕할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욥처럼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는 없다고 말씀하시며 사탄에게 욥의 소유물을 맡기고 그이 몸은 손대지 말라고 명령하신다.
 
“뿌린 대로 거둔다”라는 인과응보의 원리가 잠언을 비롯한 규범적 지혜의 근간이다. 욥기 1장은 이 지혜의 약한 고리를 파고들며 “그렇다면 무죄한 자의 고난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본문은 욥이 의로운 자이며 잘못한 일이 없지만, 그가 받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하늘의 천상 회의에서 벌어진 사탄과 하나님의 대화 때문에 벌어진 사건임을 밝힌다.
 
*욥기를 이해하기 위한 설명은 “나비 생각”의 글을 인용했다. 욥기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잠언>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욥기는 성찰적 지혜를 다룬다. 성찰적 지혜란 한마디로 규범적 지혜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규범적 지혜란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에 따라 사는 것을 말한다. 밤에는 잠을 자고 낮에는 일을 한다. 봄에는 씨를 뿌리고 여름에는 땀 흘려 가꾼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를 따라 사는 지혜이다. 규범적 지혜를 밑절미로 쓰인 책이 바로 <잠언>이다. 그런데 욥기는 규범적 지혜가 다 설명할 수 없는 그 너머의 지혜를 다룬다. 규범적 지혜가 인류의 삶에 항상 같이 적용되는 기계적인 법칙이거나 우주의 유일한 규칙은 아니다. 옛날에는 가난의 이유를 게으름 한 가지로 보았다. 그런데 부지런하고 착한 사람이 가난한 경우도 많다. 그것은 세상에 악과 불의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을 성찰적 지혜라고 한다.
 
우스 땅에 사는 욥은 규범적 지혜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흠이 없고 정직하였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었다.” (1:1). 이 사실을 1~2장에서만 글자 하나 다르지 않게 세 번이나 반복한 것(1:1, 8, 2:3)은 이후에 욥이 당한 고난의 원인이 그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으로 읽힌다. 저는 욥기를 읽으며,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시고 운행의 질서를 창조하신 분이지만 그 법칙에 갇혀 옴짝달싹도 못 하는 기계적 존재가 아님을 깨닫는다. 그런 의미에서 잠언의 독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전제되지만 <욥기>를 읽는 독자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 또는 ‘알 수 없는 하나님’에서 출발하므로 더 높은 신앙 지식을 요구받는다. <욥기>의 하나님은 상식과 보편적 지식을 통하여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하나님 그 이상이시다. 난해하지만 그렇다고 불가해하지는 않다.
 
 
 
1. 욥은 누구인가? (1~5절)
욥에 대한 정보는 지극히 제한적이다. 그의 출신 지역인 우스 땅의 위치는 에돔 지역(렘 25:20-21; 애 4:21) 혹은 메소포타미아 북부 아람 지역(창 10:23; 22:20-21)으로 추정한다. 이스라엘 지역 밖의 인물이다. 본문은 욥에 대하여 네 가지로 묘사한다.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로 그린다.
 
“온전함(탐)”은 외모를 포함하여 전인적으로 완벽한 삶을 의미한다. “정직(야살)”은 구부러짐 없는 올곧은 심성을 뜻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는 표현을 통해서는 전통적인 지혜 사상에서 최고의 현자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욥의 모습을 부각한다.
 
그에게는 아들 일곱과 딸 셋이 있었다. 자녀에게 관련한 완벽한 축복을 받았음을 드러낸다. 그런데 완벽한 축복이었던 자녀들은 하루아침에 완벽한 저주가 되어 경험하게 될 완전한 참담함을 역설적으로 설명한다. 욥의 재산을 설명하는 것도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최대의 소유를 자랑하는데, 자녀들의 숫자인 완전수 일곱과 셋이 재산을 표현하면서도 사용되었다. 한편 욥의 종교적인 삶도 매일 번제를 드릴 정도로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성실한 경건함을 묘사한다. *욥은 자녀나 소유물, 종교 생활에 있어서 완전하고 완벽한 삶을 살고 있었음을 묘사하는 것이다. 저자는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다(5절)”라고 기록한다. 이렇게 기록한 이유는 앞으로 일어나게 될 욥의 고난에 대해 그에게는 책임이 없음을 분명하게 하려는 것이다.
 
*동방에서 가장 위대한 자,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한 자녀의 구성, 부족함이 없는 소유, 자녀들에게도 조금의 부정도 용납하지 않는 경건함…. 그는 완벽한 삶을 살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삶이 있을 수 있을까 싶은 정도다. 게다가 하나님도 그를 인정하실 만큼 온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했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 부족함 없는 완전한 삶이 오히려 더 불안하다. 실제로 욥은 하나님의 강렬한 자기 연설을(38~41장) 들은 후에야 자신의 불완전함을 고백했다.
 
 
 
2. 천상회의(6~8절)
갑자기 배경이 전환된다. 우스 땅에서 하나님께서 계시는 천상의 공간으로 옮겨진다. 이는 욥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 인간의 관찰과 이해를 벗어난 영역인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다. 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절대 주권자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심과 인간의 작고 작음을 분명하게 대조함으로써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는 것이다.
 
지상에서 욥의 삶을 소개하다 갑자기 천상에서 벌어진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들의 회의 장면으로 전환되며 욥이 받는 의로운 고통의 발단이 이곳임을 설명한다. 구약성경에서 종종 등장하는 천상 회의 혹은 하나님의 어전회의는 땅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에 대한 하늘의 결정을 말할 때 사용되는 문학적 소재이다.
 
천상 회의는 창세기 초반,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도 등장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다스리게 하자(창 1:26)”라고 결정했다. 또 이사야의 소명 장면에도 천상 회의가 등장한다(사 6:8). 천상 회의를 목도하고 있던 중에 천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 선포 사명을 누가 감당할 것인가 물으실 때 이사야가 응답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그 천상 회의에 “사탄(핫사딴)”이 참석한다는 점이다. 사탄의 의미는 어원적으로 “(어떤 의견에) 반대하는 자, 반론을 제기하는 자” 혹은 법정에서 피의자의 죄를 고발하는 “고발자”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이는 사탄의 등장은 악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본문에서는 “검사”처럼 문제를 제기하는 고발자의 모습과 역할을 한다. 참고로 사탄은 1~2장을 제외하고는 다시 등장하거나 언급되지 않는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악과 부조리의 기원이 사탄임을 증명하는 기록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네가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신다. 사탄은 온 땅을 두루 다녀왔다고 말한다(8절). 그런데 7~8절을 이해하려면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이전에 논쟁이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고 물으신 것은 사탄이 세상에는 참다운 의인이 없다고 주장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반박이다.
 
욥의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그 동기에 대한 검토가 사건의 발단임을 짐작할 수 있다. 1절에서 소개한 대로 하나님께서 직접 욥의 신앙을 확인하심으로 사탄의 도발이 이어진 것이다.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할 리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를 보호하시고 복을 주셨기 때문이기에 보호와 공급을 중단하시면 욥의 신앙도 증발할 것이라고 장담한다.
 
*상황과 처지에 상관없이 하나님 자신이 경외의 유일한 대상이 되고 있을까?
 
 
 
3.” 까닭 없는 신앙”은 있을 수 없다(9~12절).
사탄은 욥기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욥이,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개역 개정_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새번역_9절) 과연 욥은 하나님께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이 그 신앙을 지킬 수 있을까? “까닭 없이(힌남)”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은혜”로 번역되는 ‘헨’의 부사형이다.
 
은혜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의 마음으로, 아무런 이유 없이,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으시고 값없이 주시는 것”이다. 은혜는 “인과응보의 원리”를 따르지 않는다. 인간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사탄이 하나님께 되묻는 질문의 핵심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신앙이 어떻게 인과응보의 원리를 벗어날 수 있겠는가?” 결코 벗어날 수 없기에 신앙에 뒤따르는 보상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의 목적이자 결과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라는 것이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것이 규범적 지혜의 인과응보 사상이라면, “거두지 않아도 계속 뿌릴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서 반성적 지혜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탄은 과연 욥에게서 그 모든 소유를 다 빼앗아 가도 그가 과연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을 것일까? 라고 질문한 것이다(10~11절).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욥의 모든 소유를 처분하도록 맡기되 욥의 몸에는 손을 대지 말라고 하셨다(12절). 얼핏 이런 사탄과 하나님과의 대화와 결정으로 희생양이 된 것처럼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본래부터 “까닭 없는 신앙”이 가능하고 그 완전한 예가 욥인 것을 강조하신 것이다.
 
즉, 세상에 둘도 없는 욥의 순전한 여호와 경외함의 모습을 사탄에게 확인시켜 주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욥의 고난은 까닭 없는(아무런 이유 없이) 신앙을 발견하고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 확인을 위한 과정은 너무도 혹독했다. 하지만 그 확인 결과는 놀랍기 그지없었다.
 
 
 
나는?
-사탄이 제기한 아무런 이유(대가) 없이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을까? 이 질문 자체가 인간의 신앙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지를 확인시켜 준다. 사탄은 그런 존재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신 “까닭 없는 사랑”을 의심하게 하고 구원받은 인간이 순종하는 그 까닭 없는 여호와 경외함을 폄훼한다. 사탄은 그런 존재다. 늘 왜곡 시킨다.
 
-그러나 본문은 이런 사탄을 소개하는 목적이 아니다. 사탄의 눈에 띈 하나님조차 인정하는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1, 8절)” 욥의 “까닭 없는 신앙”을 소개하는 것이다.
 
-사탄은 욥의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신앙이 까닭 없이, 계산 없이 했을 리 없다고 주장한다. 하나님께서 보호와 공급을 중단하시면 언제든지 욥의 신앙도 무너지고 사라질 것이라고 장담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을 신뢰하신다.
 
 
*이 자체만으로 얼마나 놀라운 욥의 신앙인가? 과연 실존 인물일지 싶을 정도로 동시대에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자기 나라와 백성을 이루시는 여정을 시작하신 때, 놀라울 정도로 욥을 신뢰하는 하나님의 모습이 충격이다. 왜 신앙 좋은 욥을 자기 백성의 조상으로 삼지 않으셨을까? 생각이 들 정도다.
 
*오죽하면 사탄에게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까지 하셨다. 그만큼 욥에 대한 신뢰는 확실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그의 속사람을 익히 아신다. 너무도 주저함이 없이 사탄에게 시험해도 된다고 하실 정도로 욥의 신앙은 완전했다.
 
*한편으로 보면 고작 사탄의 주장에 반박하시려고 한 사람의 인생을 처절하게 파괴하는 것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결정이 아쉽게 다가올 수 있다. 사랑하는 자기 백성을 실험 대상으로 삼는 하나님의 태도가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어쩔 수 없다. 그만큼 충격적이다. 그럼에도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사탄에게 욥에게 주의를 집중시키시고 그의 시험을 유도하신 것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이 시험을 통해 욥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고난을 받고 하나님에 대한 더 넓고 깊은 세계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고난과 고통이 깊을수록 처참하겠지만 단지 사탄의 호기심을 해소하는 차원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사탄은 알지 못하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고난의 목적이 분명히 있다.
 
*욥이 더 알아야 하고 이해해야 하며 받아들여야 할 하나님과 이 세상에 대한 가치가 분명히 존재한다. 실제로 욥은 이 고통과 고난의 끝에서 하나님의 직접 호소를 들으며 자신의 한없이 부족한 모습을 깨닫게 되었다. 나도 마찬가지 아닐까? 고난과 고통의 시간이 아니면 결코 이해할 수 없고 깨닫지 못하는 하나님에 대한 지평이 분명히 있다.
 
*내가 이해하는 수준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해의 경계 너머에도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깨닫게 하시려는 섭리가 분명히 존재한다.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보여 주고 싶으신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진다. 사탄에게 인간은 자기 유익과 만족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를 경외하는 이가 분명 존재하며 그가 바로 욥인 것을 자랑스러워하신 것이다.
 
*사탄은 인간이 결코 아무런 대가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할 수는 없는 것을 고집하고 싶었겠지만, 너무도 당연한 듯 욥의 이야기를 꺼내실 정도로 하나님은 욥을 잘 알고 계셨다. 그의 신앙이 순수함과 순전함, 온전함을 인정하셨다.
 
 
 
*주님, 저도 묻고 싶습니다. 나는 과연 “까닭이 없어도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을까? 라고요. 그런데 쉽게 동조할 수 없습니다.
*주님, 죄와 악이 없는 사람도 화를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착하고 의로운 사람도 고통을 당할 수 있음을 깨닫고 수용하기까지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지혜를 허락해 주십시오.
*주님, “까닭 없는 신앙”을 다지겠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을 신뢰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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