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복을 받았는즉 화도 받지 않겠느냐? [욥 2:1-13]
 – 2023년 11월 05일
– 2023년 11월 05일 –
욥에게 닥친 두 번째 재앙은 건강의 문제였다. 소유와 자녀들에게 덮쳤던 재앙이 채 추슬러 지기도 전에 생명의 문제와 결부된 질병의 재앙이 연이어 찾아온 것이다. 욥의 고통이 심화하고 있음을 누구라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욥은 이번에도 경건한 신앙으로 응답한다. 그러나 그의 신앙을 지속해서 흔들 세 친구의 방문이 새로운 국면을 열어준다.
 
욥의 신앙이 보상을 바라는 인과응보의 원리에 따른 것임을 입증하는 데 실패한 사탄은 다시 하나님과 대화를 통해 더 강도가 높은 고난의 시험을 준비했다. 욥의 소유에 국한되었던 재앙이 이제 욥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덮친다. 지독한 피부병이 욥을 휘감았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욥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는다. 심지어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라는 아내의 절규를 “어리석은 말”로 평가하며 1:21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신앙고백을 이어간다.
 
“….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으니,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소?” (새번역_10절)
 
 
 
1. 하나님의 보호의 울타리가 무너졌다! (1~6절)
두 번째 천상 회의가 열렸다. 오롯이 욥 때문이었다. 그의 순전한 신앙의 동기가 과연 무엇일까? 라는 안건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욥이 형언할 수 없는 재앙의 고통 속에서도 경건을 유지하고 있음을 부각하셨다(3절). 하지만 사탄은 여전히 할 말이 있다. 욥의 외적인 소유를 친 재앙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끔찍한 제안을 한다. 자신의 생명과 직결된 시험에도 과연 견딜 수 있는지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다.
 
사탄은 “가죽으로 가죽을 바꾼다”라는 속담을 인용한다. 이것은 흔히 고대사회에서 물물교환의 형식으로 이루어졌던 상거래 모습을 표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인용 속담에는 사탄의 저의가 숨어있다. “바꾼다(베아드_בְּעַד)”로 번역된 히브리어 전치사는 “~을 위하여 혹은 ~둘레에”라는 의미가 있다. 사탄의 이 속담 인용에는 앞서 1장 9절과 10절에서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는가에 대한 질문과 하나님께서 욥과 그의 집, 소유물 둘레 사방에 울타리를 둘러 주셨기에 그런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문장에는 전치사 베아드(בְּעַד)가 세 번 사용된다. 개역 개정에는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이라고 번역되었으나 이를 직역하면 “그의 둘레에, 그의 집 둘레에, 그리고 그의 소유물 둘레에….”이다. 그런데 그 전치사 베아드가 “가죽으로 가즉을 바꾼다”라는 사탄의 보고에도 사용되었다. 이 구절의 히브리어는 “오르 베아드 오르(עוֹר בְּעַד עוֹר)”이다. “가죽 둘레에 가죽을”로 직역할 수 있다.
 
저자의 이와 같은 기록의 의도는 분명하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욥의 가족 둘레에 하나님의 울타리를 둘러 주셨기에 욥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탄은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욥 주변에 쳐주신 건강의 울타리, 자녀의 복이라는 울타리, 재산의 울타리가 안정적이고 풍족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실제로 욥의 고난 순서는 가장 바깥 경계들에서부터 몰려왔다. 처음에는 그의 재산인 가축들과 종들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다음은 자녀들이 몰살당하였다. 그리고 이제 욥 자기 건강의 울타리까지 파괴된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으로 본다면 욥의 고통 본질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의 고난은 가족과 재산을 잃고 건강까지 잃은 차원으로 보는 것은 직관적인 시각이다. 진정한 고통과 재앙은 하나님의 보호 울타리가 허물어져 내리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보호 울타리 안에서 “욥의 세계”가 굳건하게 서 있었다. 이 울타리가 무너짐으로 이제 욥은 모든 인생의 문제 앞에 노골적으로 노출되었다. 보호받음에서 유기됨, 울타리 안에서의 질서가 무너진 울타리로 인해 무질서로 떨어짐, 이것이 욥의 고통 본질이었다.
 
 
또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욥에게 고난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탄은 5절에서 이렇게 요청한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이 구절과 연결할 수 있는 4절의 가죽으로 가죽을 교환한다는 의미는 단지 등가교환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소유물과 사람의 생명이 같은 값어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부의 해석 중에는 한 번의 가죽이 가리키는 것은 1~2장의 문맥을 따라 동물의 가죽, 즉 소유물을 가리키고, 또 하나의 가죽은 사람의 가죽, 즉 건강과 생명을 의미한다는 해석이다. 자신이 소유한 동물 가죽을 팔아 생명과 건강을 지킨다는 의미라면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꿀지라는 말의 의미와 자연스레 조화된다. 사탄은 이런 의미로 주의 손을 펴서 욥의 뼈와 살을 치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과연 사탄의 집요한 재앙의 고난을 욥은 잘 견딜 수 있을까? 그 참혹한 시험을 꿋꿋하게 통과할 수 있을까?
 
 
 
2.두 번째 재앙과 욥의 반응(7~10절)
사탄은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온몸을 악창으로 짓이겼다. 이 표현은 신명기 28:35이 배경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그의 명령을 지켜 행하지 않는 자에게(신 28:15) 임하는 징벌 중의 하나가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이르는 “심한 종기(쉐힌 라아)”이다. 저자는 신명기 본문의 표현을 완전히 같이 사용했다.
 
욥기의 반성적 지혜는 뿌린 대로 거두는 인과응보의 정수인 신명기의 규범적 지혜를 겨냥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의 명령을 지켜 행하는 욥과 같은 이에게 어떻게 이런 재앙이 일어날 수 있는가에 대한 성찰을 던진다. 더구나 욥에게 생긴 심한 악창(종기)은 단순하게 가려운 정도를 넘어 하루 종일 썩어가는 자기 몸을 기왓조각으로 끓는 처지까지 떨어졌다. 사탄의 말대로 이 질병은 욥의 뼈와 살을 친(5절) 병이었다. 우리는 이 질병이 죽지 않을 질병인 것을 알지만 욥은 자신이 죽음이 임박했다고 느낄 정도였을 것이다. 이어지는 3장부터 욥의 고백 속에 이 고통이 얼마나 큰지 죽음에 대한 언급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9절).”라는 아내의 말도 욥이 겪는 질병이 죽음에 이를 정도의 심한 병인 것을 뒷받침한다. 이런 아내의 말을 욥은 지혜의 말이 아닌 “어리석은 자의 말(10절)”이라고 하는데, “욕하다(바라크)”라는 말이 사실 “축복한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욥의 아내는 ‘하나님을 축복하고 죽으라.’라고 말한 것이며 이를 욥은 어리석은(나발) 말이라고 한 것이다. 실상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욥에게 덮친 시련의 마지막은 아내의 비난일 수도 있겠다. 욥의 아내는 이 모든 재앙으로 인해 고통받는 한 가운데서 꿋꿋하게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마음을 지키고 있는 남편을 이해할 수 없었다. 너무도 부자연스럽게 침착함을 유지하는 남편이 미웠을 수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울타리의 붕괴는 보통의 인간에게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었겠으나 욥은 놀라울 정도로 담담하게 고백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는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10절)?” 이 놀라운 고백은 감당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서 신앙의 신실함을 답답할 정도로 고수하고 있는 욥에게 “당신이 아직도 당신의 온전함을 굳게 지킬 것입니까?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 버리시오.” (새번역_9절) 라고 아내가 쏟아낸 저주를 듣고 고백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내는 미련할 정도로 답답하게 신앙의 신실함을 지키는 욥을 경멸했다.
 
욥의 마지막 재앙이 아내의 돌변일 수 있는 것은 “소유물과 건강” 외에 인간의 삶을 지켜주는 중요한 울타리가 “사회적 관계성”이며 이것의 기초 중의 기초, 핵심 중의 핵심이 부부관계이기 때문이다. 평소 남편 욥의 성실함과 신실한 경건함을 존경해 왔을 것이다. 하지만 존경의 이유였던 신앙의 “온전함”이 이제는 혐오의 이유가 되어 버린 것이다. 아내라는 울타리마저 철저하게 허물어진 욥은 이제 철저히 고독한 존재로 하나님을 대면해야 한다.
 
*소유, 자녀, 건강, 관계의 울타리가 철저하게 무너졌다. 저자는 먼저 무너진 소유물과 자녀라는 울타리를 직면하며 1:22절은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라고 했고, 자신의 건강과 아내와의 관례라는 울타리가 무너진 후에는 10절 하반절에서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라고 평가한다. 첫 번째 요약에 없는 “입술로”라는 단어가 추가 되었는데, 이것이 “입술로는”이라는 의미보다는 “입술로 조차”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지 않았음을 강조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3장에서의 욥은 칠 주야의 침묵을 깨고 다시 입을 열었을 때 전혀 다른 내용의 말들을 쏟아낸다. 욥은 진정 “온전한” 신앙이었을까?
 
 
 
3.세 친구의 방문과 탄식(11~13절)
세 명의 친구가 등장한다. 그들의 출신지는 데만(엘리바스), 수아(빌닷), 나아마(소발)이다. 데만은 에돔 남부 지역으로 예레미야는 이곳을 “지혜의 고장”으로 불렀다(렘 49:7). 수아와 나아마 지역은 모두 에돔의 어느 지역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세 친구의 이름과 출신 지역에 대해 여러 해석과 논의가 있지만 욥기를 이해할 때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단지 성경은 그들이 “각각 자기 지역에서부터” 온 것과 그 지역이 욥이 사는 지역에서 먼 곳일 것, 그들이 같은 지역 출신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한다.
 
세 친구는 욥이 지난 세월 동안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의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직접 목격하지 않았다. 이는 욥과 그의 자녀들에 대한 평가는 직접 목격한 사실이 아니라 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른 추론에 불과하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그들의 출신지를 밝힌듯하다.
 
또 주목할 만한 것은 그들이 각각 다른 출신 지역임에도 “인과응보의 신학(원리)”이 어느 특정 지역이나 소수의 의견이 아닌 당시 고대 지방에 널리 퍼진 주류적인 관점인 것을 확인하게 된다. 서로 다른 견해의 논쟁이 아니라 세 친구와 욥 한 명의 논쟁이라는 구도는 인과응보를 기반으로 한 “규범적 지혜”가 훨씬 널리 받아들여지는 보편적인 지혜였음을 증명한다.
 
 
 
나는?
-사탄은 포기를 모른다. 소, 나귀, 낙타 등과 종들을 다 잃고, 열 명의 자녀를 한꺼번에 잃어버린 욥이 여전히 온전한 신앙을 지켜도 인정할 줄도 물러설 줄도 모른다. 하나님께 욥이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불행이 닥치면 하나님을 원할 것이라고 장담한다.
 
-하나님이 건강을 지켜주고 계시기에 신앙을 지키는 것이라며 헐뜯는다. 사탄은 당장 욥의 뼈와 살을 쳐서 그가 자기 몸에서 고통을 겪으면 찬양 대신에 욕이 나올 것이라고 믿었다. 사탄답다. 이로 보건대 사탄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 땅을 살아내고 있다고 진심으로 고백하는 자들이 분명하다. 사탄이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하나님께서 신앙과 경건의 이유가 되는 삶을 보는 것이다. 그것이 진짜 신앙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보시며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증명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유 없이 당한 고난 속에서도 욥이 보인 온전함을 칭찬하셨다. 그러면서 사탄의 활동에 분명한 제한을 두고 그가 요청한 시험을 허락하신다. 그만큼 욥을 신뢰하시는 것이다. 욥도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두 번째 고난의 시행을 허락하신 이유는 사탄이 욥의 변치 않는 온전함을 보고 두 번 다시 핑계 댈 수 없게 하시려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고난이 찾아오더라도 모든 상황을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심을 신뢰하고 경외하는 마음을 잃지 않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욥의 생명은 건들지 못하게 하시면서 그의 육신을 치는 고난을 허락하셨다. 욥은 온몸에 종기가 나서 괴로워한다. 자녀와 재산, 이제는 건강까지 빼앗기는 고난이 갑자기 덮쳤다. 이런 상황에서도 침묵하며 견디는 욥을 보고 아내는 견디지 못해 한다. 하나님을 욕하고(축복하고) 죽으라고 말한다.
 
-그러나 침묵하며 견디는 그 모습을 견디지 못한 아내는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욥은 “입술로”는 조금도 범죄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마음은 어땠을까?
 
 
*가장 무서운 시험은 가장 가까운 사람을 통한 시험이다. 사탄은 욥의 온전함을 무너뜨리고자 가장 가까운 그의 아내를 이용하여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절규하게 한다. 어떤 면에서는 그토록 고생하는 남편을 위한 매몰찬 말이었을 수 있지만 결국 사탄의 말을 옮긴 것으로밖에 해석이 되지 않는다. 욥의 아내는 자신이 인식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욥에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나는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존재로서 누구의 대변자로 말하고 있을까?
 
 
*나를 둘러싸 주신 하나님의 울타리가 새삼 감사하다. 나의 삶의 모든 것을 둘러싸 주신 하나님의 울타리가 있어 든든하다. 그 울타리를 무너뜨리려는 사탄의 도전이 강력할지라도 혹시 무너질 수 있어도 그 모든 과정을 아시되, 욥의 온전함을 끝까지 신뢰해 주신 하나님께서 나의 믿음의 여정도 그리해 주시면 좋겠다. 그저 믿어주시는 하나님이시면 충분하다. 감격스럽다.
 
*사탄은 울타리를 허물어 무너뜨리는 존재다. 하나님은 울타리를 내어주기를 허락하셔도 생명을 끝까지 지키시는 분이시다. 이 과정을 통해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하신다. 그 깊은 경륜의 인도하심을 사람의 지혜로는 감히 측정불가이다.
 
 
*욥의 세 친구는 그의 비극적인 재난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왔다. 자기 일인 듯 여기며 슬퍼했다. 며칠 동안 아무 말도 안 하고 아무 일도 안 하고 단지 그의 곁을 지켜준다. 그의 침묵을 존중해 준다. 그것이 그들이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위로였다. 진심 어린 공감의 모습이다. “함께 있어 주는 것”의 가치는 형언할 수 없다. 재난을 당하고 고통 중에 있는 지체를 향한 부산한 행동들보다 그저 가만히 울고 있는 지체 옆에 있어 주기만 해도 된다.
 
*우리 더온누리공동체가 그저 가만히 옆에 있어 주는 공동체이기를 소망한다.
 
 
 
*주님, 울타리가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는 아직 무너지지 않은 것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소유, 재산, 자녀, 건강, 심지어 아내까지 무너졌지만,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무너지지 않은 것이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주님, 그렇기 고난의 정점을 지날수록 사람의 말이나 세상의 방법과 관계에 얽매인 어리석을 답습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가만히 주님 곁에 머물기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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