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침묵을 깨뜨리고 절망을 토로하다 [욥 3:1-26]
 – 2023년 11월 06일
– 2023년 11월 06일 –
욥의 극심한 고통 앞에서 세 친구는 아무 말 못 한 채로 칠 일 동안 함께 보낸다. 욥의 이야기는 이들의 침묵을 깨는 계기가 되고 앞으로 진행되는 아주 긴 논쟁의 시작이 된다. 칠 일의 침묵을 깨고 토로하는 욥의 말 중에 세 친구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말하도록 촉발한 것을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 3장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무엇보다 욥의 토로에는 1~2장에서 고백한 경건한 고백은 더 이상 아니다.
 
고통과 재앙, 시험 초기의 욥은 경건하게 반응했다. 이것만으로도 그는 보통 사람의 범주를 뛰어넘었다. 그러나 칠 일을 보낸 욥은 그의 마음 밑바닥으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탄식과 불평을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었다. 그의 입이 열리자,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어둠이 들이닥쳤고 욥의 삶은 죽음과 혼돈으로 치닫는다.
 
 
 
1.그 후에 입을 열어(1절)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순전한 신앙의 동기에 대한 문제는 1~2장에서 결론이 난다. 욥은 사탄의 시험을 통과했다. 하나님의 욥에 대한 신뢰는 증명되었다. 세 친구의 방문도 이루어지고 그들은 욥과 고통을 함께 했다. 이제 회복을 기대할 수 있는 충분한 발판이 되었으리라 여겨진다. 그런데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라는 도입은 불안감을 가져온다. 어쨌든 2:10에서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라고 보도 되었기 때문에 “그 후에 입을 열어” 어떤 말을 할 것인지에 대한 긴장감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열린 입술로부터 의인 욥에게 기대할 수 없었던 저주의 말이 쏟아져 나온다. 아….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2.자기 생일을 저주하다(2~24절)
욥은 자기 생일을 저주하는 문학 형식을 빌려 그의 고통스러운 정황을 그대로 드러낸다. 고대의 생일 저주는 탄식의 극한 표현이다. 구약에 기록된 예는 본문 외에 예레미야 20:14~18에서 발견된다. 20장에 있는 예레미야의 5개의 고백록 중에서 가장 절정의 탄식시가 마지막 부분의 생일 저주였다. 그런데 예레미야의 저주문과 비교하여 깊은 심도의 저주문이 등장한다.
 
먼저 어머니가 자신을 난 날에 대해 저주한다. 더 나아가 잉태된 밤까지도 저주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태어나게 하신 생일의 때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낮과 밤을 통틀어 자신의 탄생과 더 나아가 인생의 모든 시간적 순간을 한꺼번에 삭제시켜 버리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에 그의 삶의 공간적인 부정도 이어진다. 아예 죽음 가운데 묻혀버리는 음부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단지 생명을 전하는 자의 소리뿐 아니라 그 새로운 창조의 날에 울려 퍼질 모든 즐거운 소리를 적막으로 차단한다. 욥은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자신의 상황을 중심으로 창조가 역행되기를 원하고 있다(3~12절).
 
또 음부 세계에 누워있는 먼저 간 이들을 일일이 부르며 그들의 죽음을 부러워한다. 이유는 분명하다 그곳에서는 고통이 끝나고 안식만 있기 때문이다(13절). 그리고 그곳은 모든 힘겨운 삶의 여정을 거쳐 간 자들의 휴식처이기 때문이다(14~15절). 욥은 차라리 음부 세계가 생명 있는 현실 세계보다 안식이 보장되어 있고 악인이나 의인, 갇힌 자나 감독자, 작은 자나 큰 자가 다 평등하게 쉼을 얻게 됨을 파격적으로 선포하고 있다(14~15절).
 
단순한 시간적 생일 저주가 아니라 현세 삶의 공간과 상황을 전폭적으로 부정하는 극도의 비관적인 표현들이 넘쳐난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욥에게 음부는 피난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곳은 현재 세상의 소요와 곤비함으로부터 떨어진 곳이며(17절), 갇힌 자의 억압이 없는 곳이고(18절), 모든 사람이 안정과 자유를 얻는 곳이다(19절).
 
점점 욥의 토로가 격해진다. 급기야 욥은 직접적인 죽음 간구를 피력한다(20~24절). “죽기를 바라고”, “죽음을 구하고” 있다(21절). 지금 살아있는 삶에서(24절) 어떻게든 사라지고 싶은 심정이 사무쳐 있다. *욥의 생일 저주는 극심한 탄식시의 차원을 넘어서서 자기 죽음을 바라는 자살 기도까지 이르고 있음을 보게 된다.
 
 
또 욥의 탄식은 자신의 개인적인 죽음의 갈구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의 생일 저주는 창조 세계 전체에 대한 저주로 발전한다. “그날이 캄캄하였더라면(예히 호섹)”은 하나님 창조 사역의 전면적인 거부에 해당한다. “빛이 있으라(예히 오르)”를 그의 저주문에서 의도적으로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거부의 의도는 창조 세계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혼돈의 세력까지 동원한다. 8절에서 “날을 저주하는 자들, 곧 리워야단을 격동하는 데 익숙한 자들”은 고대 마술에서 날을 좋게 하거나 나쁘게 하는 주문자들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모든 욥의 시도 목적은 분명하다.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무질서의 힘을 요청하여 존재 세계를 부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 나아가 욥의 이런 행태는 죽은 자들의 세계인 음부에 대한 묘사를 반복하고 절정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음부에 대한 기록이 이렇게 자세한 욥의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전무후무한 일이다.
 
 
 
3. 욥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25~26절)
그런데 매우 독특한 표현이 등장한다.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자신에게 다쳤다는 탄식이다. 혹시 욥이 이러한 환난을 예측하였다는 의미일까?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한 삶을 살고 있다는 욥에게 과연 어떤 두려움의 대상이 존재할까? 독자가 모르는 욥의 또 다른 모습이 있는 것일까?
 
저자는 지체하지 않고 26절에서 욥이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niv)” 욥이 두려워하는 것은 “로게즈” 곧 혼돈이었다. 그의 모든 질서와 안녕, 평안을 보호해 주던 울타리가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기존의 보호 장벽들이 무너져 내림으로 욥의 모든 삶의 무질서와 혼돈에 그대로 노출되고 만다. 아무런 보호망이 없는 그의 삶이 이제 무장해제당한다. 이후 “무방비 상태”로 친구들과 대화하며 또 하나님께 간구하고 항변한다. 최고의 완벽한 삶을 살았던 것이 쉽게 연상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욥은 하나님이나 다른 누군가를 저주하지 않고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한다. 하지만 욥의 탄식대로 만약 ‘그날’이 없었다면 이렇게 탄식하지도 못할 것이다. 태어난 날이 있기에 탄식할 수 있다. 고난은 삶의 일부인 것이다. 태어나지 말았으면, 죽었으면 좋았을 가치 없는 인생이라며 탄식과 절망하기보다 바울의 가르침처럼 창세 전부터 지금까지 우리를 붙들고 계신(엡 1:4) 하나님을 진실하게 붙들어야 할 것이다.
 
-3장의 욥의 고백은 1~2장의 그의 고백이 얼마나 교과서적이었는지 돌아보게 한다. 한꺼번에 몰려온 재앙 속에서 자신의 감정이 아직 분출되지 않은 메마른 고백이었음이 드러나게 했다. 욥은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자신의 심정을 고백한다.
 
-칠 일의 침묵은 폭풍처럼 덮친 재앙이 남긴 현실을 자각하게 했다. 자신을 두르고 있었던 소유물, 자녀, 건강, 아내라는 울타리는 모두 걷혔다. 철저히 자기 홀로 남았음을 인식한다. 홀로 남은 그에게 자기 존재조차 사치임을 처절하게 토로하는 것이다.
 
-하지만 욥의 탄식과 분노, 좌절과 낙심의 언어는 불신앙적이라고 단정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그는 철저히 자기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절망하고 있다. 현실을 직면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주위에 누군가 살아가는 삶보다 죽음을 안식이라고 여기고 있다면 그에게 세상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감히 짐작조차 못 한다. 그의 세상은 고통이 가득하여 있는 것이다.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욥이 그렇다.
 
*태어난 날을 저주하고 태어나 죽지 않은 것을 저주하며, 고난 중에 이어지는 삶을 저주하는 그의 처절한 탄식 앞에 해줄 수 있는 말이 없다. 칠 일 동안 침묵할 때 입술로 죄를 범하지 않았지만, 그가 입을 열기 시작하자 더 이상 찬송은 흘러나오지 않는다. 예배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깔끔한 신앙고백도 사라졌다.
 
*고통의 시간이 길어지자, 전에 없었던 말들이 쏟아진다. 생일을 저주하고 삶을 저주한다. 죽음을 말하기 시작한다. 드디어 내면 깊숙한 곳에 꽁꽁 봉인되어 있던 억눌림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이 순간만 보면 사탄은 그러면 그렇지, 욥도 별수 없는 인간이야 라며 쾌재를 부를 수 있겠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욥이 가지고 있던 하나님의 개념이 무너진 거기에서부터 점점 새로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더 성숙하게 일어나는 것을 보셨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삶의 궤적을 되돌아보면 예기치 못한 고난과 재앙 속에서 그전까지 자리 잡고 있었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무너지고 다시 세워지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더 깊이 다져왔던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고난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단련하는 집중력 있는 시간이었다. 고난이 아니라면 돌아보지 못하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영역들이 하나둘씩 드러나고 고민하며 싸웠던 시간이었다.
 
*그렇게 치열하게 자아와 싸우는 시간은 불신앙의 시간, 배신과 배역의 시간이 아니라 그저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실존이 성숙해지는 시간이다. 고난은 그래서 성숙이라는 쇠를 단련시키는 풀무불과 내리치는 망치와 같다. 불과 망치질이 순도가 높을수록 단단해진다.
 
*고난 중에 토로하는 것이 절망의 심연으로 끌려내려 가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기에 욥의 토로에 응원을 보내고 싶다.
 
 
 
 
*주님, 침묵을 깬 욥의 절규가 안쓰럽습니다. 어떤 말도 해줄 수 없는 고통받는 이들이 생각납니다. 저들이 단련의 시간을 잘 견디기만 바랄 뿐입니다. 고통에서 몸부림만 치더라도 절망의 늪에 잠기지 않을 줄 믿기에 몸부림만이라도 포기하지 않게 그저 들어주고 옆에 있어 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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