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엘리바스, 맞는 말인데 얄밉다. [욥 4:1-21]
 – 2023년 11월 07일
– 2023년 11월 07일 –
욥기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욥과 세 친구 사이의 논쟁(4~31장)이 시작된다. 세 친구 중에서 엘리바스가 가장 먼저 말을 시작하고 다른 두 친구보다 더 많은 말을 한다. 엘리바스는 인과응보의 원리에 기반하여 욥과 그의 자녀가 당한 재난은 모두 자기들 죄의 대가로 판단한다. 게다가 어리석은 인간은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어떤 항변도 불가하다고 자신의 영적인 경험을 통해 욥에게 충고한다.
 
 
 
1. 욥의 고난에 대한 엘리바스의 추론(1~6절)
욥의 절망이 가득한 탄식을 들은 엘리바스가 조심스럽게 욥에게 반론을 제기한다. “누가 만일 너에게 말하려고 한다면 네가 괴롭겠으나, 그렇다고 누가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새번역_2절) 라며 시작된 엘리바스의 이야기는 점잖은 충고에서 신랄한 비판으로 격화된다. 욥이 당한 일을 알고 한달음에 달려와 칠 일 동안 그저 옆에 있어 주었던 그들이 갑자기 이렇게 신랄한 비판의 자세로 전환된 것은 의외이다. 하지만 3장에서 욥이 자기 생일에 대한 저주가 세 친구에게 신성모독에 가까운 표현들에 충격을 겪은 것이다. 이러한 세 친구의 심정이 엘리바스의 첫 발언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2절은 욥이 당한 처지에서는 누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욥이 싫증을 낼 것을 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욥의 말에 대해 엘리바스는 참을 수 없는 지경까지 온 것이다.
 
이는 욥이 자기 생일 저주에서 시작해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에 이른 것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욥의 토로는 신성모독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엘리바스가 욥을 바라보기에는 “규범적 지혜의 화신”이었다. 1~2장에서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1:1, 9; 2:3)”는 하나님의 평가와 일치한다. 그런데 “이 일이 네게 이르매(5절)” 욥의 신앙 자체가 욥 자신의 자랑이요 그의 소원은 흠 없는 온전한 삶을 유지하는 것이었는데 그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한순간에 깨어져 버렸다고 폭로한다.
 
 
 
2. 규범적 지혜의 근간 : 인과응보(7~11절)
세 친구가 철저하게 신봉하는 하나님의 세상 통치 원리는 인과응보이다. 그렇기에 욥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한마디로 욥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죄 없이 망한 자가 없다(7절)”라고 지적한다. “내가 보니, 악을 갈고 재앙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둔다.” (새번역_8절) 라고, 말하며 자신들이 가진 신앙 철학을 확실하게 드러낸다.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진리이다.
 
하지만 이 말을 듣는 욥에게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말들이다. 엘리바스의 말은 진리를 담고 있기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욥은 사탄과 하나님과의 대화의 결과로 이유 없는 고통, 까닭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인과응보의 원리로 설명될 수 없는 일도 일어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욥의 기록을 읽는 독자는 이게 가능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지만 당시 시대의 사람들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엘리바스는 욥과 욥의 아내와 자녀들을 사자와 사자 새끼들에 비유하고 자녀들의 희생까지도 인과응보의 원리에 적용하는 가혹한 모습을 보이고 만다(10~11절).
 
아쉬운 것은 엘리바스가 설사 욥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이 그를 아끼려는 마음과 그를 바로잡기 위해 건네는 조언이라 할지라도 불편하다. 진리를 말하지만 거북스럽다. 엘리바스는 천상 회의를 알지 못한다. 그러니 자신이 익숙하고 당연하게 알고 있는 가치관을 따라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
 
엘리바스는 전통적으로 받아들이고 믿고 있는 인과응보에 기반하여 욥에게 건넨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자신의 영적인 경험을 이용한다. 그가 꿈 가운데 보았던 환상을 들려주며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려 한다. 그는 “내게 한 말씀이 은은히 다가왔는데, 내 귀가 그 속삭임을 들을 수 있었다.” (새번역_12절) 이러한 말로 시작하여 “그 밤에 본 환상”에서 보이지 않는 영이 눈앞을 지나가는 특별한 체험이 그에게 알려준 내용의 결론은 “그들은 지혜가 없이 죽느니라(21절)”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무지는 죽음과 멸망을 초래한다는 ‘규범’에 대한 진술이다. 전형적인 규범적 지혜이다. 하나도 특이하고 신비한 것도 없는 인과응보의 원리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엘리바스는 하나님께서 욥을 신뢰하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1:8). 하나님의 평가를 부정하는 거짓 증언을 하는 셈이다. 욥을 특정하기는 했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을 존중하시는 모습과는 다르게 스스로 인간에 대한 경멸적인 시각도 보여준다. 천사도 미련하다고 하시는 하나님이신데, 하물며 흙집에 사는 티끌로 지어진 존재, 하루살이 앞에서 부서뜨려지는 자를 믿어주시겠느냐고(18~20절) 말하며 한없이 허무한 존재인 인간임을 바라보게 한다.
 
 
*엘리바스가 이토록 고난 중에 있는 욥에게 가혹하기만 한 인과응보의 진리를 말한 이유가 중요하다. 3장의 욥의 생일 저주가 선악 이분법을 기반으로 한 인과응보의 원리에 대한 도전이 확실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엘리바스는 전통적인 규범적 지혜에 도전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나는?
-맞는데, 맞지 않는 말을 엘리바스가 늘어놓았다. 겉으로만 보면 그의 말은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욥은 재앙을 당하기 전에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권면했던 사람이었다. 이어 근거하여 엘리바스는 이 고난을 주관적으로만 보지 말고 상황을 냉철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는 욥에게 냉정하고 객관성을 잃지 말라는 요청은 너무 가혹하다. 하지만 엘리바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가 경험한 환상까지 예로 들면서 자신의 신학적인 입장을 피력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신학적인 전제로 눈에 보이지 않는 상황까지 통제하려 한 것이다.
 
-욥과 함께 칠 일을 재를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욥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고 그 아픔에 동참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욥이 참회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기다린 행동이었다는 것이 더 맞겠다. 규범적 지혜의 틀 안에서 사고하는 이들은 의인은 고난이 닥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고난 닥친 욥은 이제 더 이상 의롭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런 엘리바스의 모습은 사탄의 참소를 꼭 빼닮았다. 사탄이 죄를 드러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참소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엘리바스는 욥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와 사랑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즉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실상은 전혀 하나님의 마음에 접근조차 못 한 것이 맞다. 학문적이고 경험적인 지식은 탁월하다 할 수 있지만, 규범을 넘어선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마음조차 없다. 정해진 대로 움직여지는 세상이 아니지만 그 간단한 삶의 형세도 욥에게 적용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알고 있는 신학적 지식으로만 욥을 바라보고 있다.
 
 
*이런 모습…. 오늘날 목회자에게 보이는 너무나 익숙한 모습 아닌가? 그래서 부끄럽다. 조금만 지나도 들통날 지식의 한계를 마치 완성된 지식과 능력처럼 오도하고 행사는 교만한 목회자들의 모습이 엘리바스를 통해 보게 된다. 아…. 그래서 낯부끄럽다.
 
*그가 하는 말 하나하나가 모두 맞는 말이었지만 진실로 맞는 말은 아니었다.
 
*섣불리 말하고 결정짓는 말을 하지 않아야 함을 다시금 깨닫는다. 목사라고 해서 결정하고 결정짓는 언행을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을 다짐해 본다. 겸손하고 또 겸손해야 한다. 내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 것이 인생이다. 내가 경험한 것보다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 훨씬 많은 것이 인생이다.
 
 
*고난 중에 있는 이가 그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과정을 그 삶의 본모습이라고 단정하는 우를 범하면 곤란하다. 고통 중의 몸부림은 절제되지 않고 표출하는 것이기에 가장 원초적인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 욥이 당하고 있는 거대한 고난은 그도 평소에 인과응보의 원리에 기준하여 여러 사람을 훈계하고 지혜가 부족한 자(손이 늘어진 자, 넘어지는 자, 무릎이 약한 자) 를 강하게 했었던 지식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상황이었다. 자기 자신이 딜레마에 빠졌다. 규범적인 지혜의 한계에 분명히 직면했다.
 
*하루아침에 모든 소유와 자녀들이 사라지고, 아내마저 신의와 사랑을 잃어버렸다.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인과응보의 충돌 속에 자신이 알고 있고, 살아오며 가르쳐 왔던 모든 진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데 엘리바스와 두 친구는 여전히 지식으로 알고 있는 규범적 지혜로 욥을 단정하고 있다.
 
*엘리바스는 여기에 자신의 영적인 경험을 통해 자기 말에 대한 권위를 더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 경험이 가진 한계도 명확하다.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더욱 왜곡하게 했다. 1~2장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간이 가지는 한계일 것이다. 그럼에도 엘리바스의 언행이 아쉽기만 하다.
 
*고통당하는 이들에게 쉽게 “생각해 보라”, “네 믿음이 이 정도인가? 라는 식의 말이 얼마나 날카로운 비수가 되는지 잊지 않아야 한다. 그런 말보다 그저 고통에서 헤어 나오려는 몸부림을 응원하고 격려하는 것이 공동체 아니겠는가!
 
 
 
 
*주님, 맞는 말인데 맞지 않는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고통당하는 이들에게 한마디 말보다 한동안 함께 있기만이라도 하겠습니다. 말하는 것보다 듣고 보겠습니다.
*주님, 맞는 말을 얄밉게 하기보다 그저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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