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맞는 말인데 틀린 말 [욥 5:1-27]
 – 2023년 11월 08일
– 2023년 11월 08일 –
엘리바스는 1~2장의 천상의 일을 모른 채 4장에서 “경험”과 “환상”을 통한 계시를 바탕으로 고난의 원인을 알려줬었다. 욥의 고난은 그의 죄 때문이고 그가 하나님 앞에서 바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4장 7절). 엘리바스의 충고는 계속된다. 그의 두 번째 요점은 인간은 고통스러운 존재이기에 하나님을 찾고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부각한다. 이런 관점에서는 징계는 오히려 복이며 겸비하게 하나님께 나아가면 구원과 회복이 보장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1. 너는 부르짖어 보라(1~7절)
엘리바스는 욥의 항변을 어리석은 자의 헛된 부르짖음으로 간주했다. 부르짖어도 응답할 자가 없다는 것이다(1절). 엘리바스가 보기에 욥은 미련한 자처럼 분노하며 감정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2절). 엘리바스는 점점 강도를 높이며 욥을 책망한다. 욥의 집이 저주받은 것과(3절) 자녀들의 죽음을 빗대어(4절) 서슴없이 말한다. 그의 재산이 몰수당했음을 ‘올무가 그의 재산을 향하여 입을 벌렸다'(5절) 라고 표현도 했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고난 중에서 분노를 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그런 사람은 결국 망한다고 충고한다. 그는 3장에서 욥의 탄식을 고난에 대한 원망과 분노로 보았다. 고난 때문에 하나님께 화를 내는 것은 잘못이다. 하지만 고난이 주는 견딜 수 없는 아픔을 하나님께 토로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욥에게 임한 재난을 속속들이 꼬집어서 지적하는 엘리바스의 말들이 날카롭다. 규범적 지혜의 범주에서는 의심할 수 없고,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가르침이 욥에게는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욥의 고난은 죄에 따른 징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비난은 “고난은 죄의 결과이다”라는 규범적 지혜를 관철하기 위해 욥이 미련해서 자녀도 죽고, 재산도 잃었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고난이 닥친 욥을 위로하러 왔다가 그의 고통스러운 마음을 더욱 고통스럽게 헤집고 있다. 맞는 말이지만 욥에게는 그 어떤 폭력보다 강도가 셌다. 고난이 닥쳐올 때 깊이 살펴보지도 않은 채 무조건 죄 때문에 오는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다. 오히려 내게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엘리바스는 자신의 생일을 저주한 욥의 하소연이 정당하지 않다고 단정했다. 하나님은 고사하고 거룩한 자 중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는 처지라고 여긴다. 욥은 미련하여 집안이 망하는 것을 본 자였기 때문이다. 미련한 자여서 그 자녀들이 순식간에 죽은 것이다. 엘리바스는 철저하게 욥의 고난이 땅에서 자연스럽게 솟아난 것이 아니라 죄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판단한다. 일반적으로는 백번 맞는 말이지만, 욥에게는 틀렸다.
 
 
 
2. 엘리바스의 조언_나라면 하나님을 찾겠다(8~16절).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결책을 위한 엘리바스의 조언은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이다(8절). 엘리바스가 보기에 욥의 고난은 하나님을 찾지 않는 무지와 그분을 의지하지 않는 악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하나님은 그에게 구하고 의뢰하는 자에게 측량할 수 없는 복을 주시고 불의를 행하는 자를 끝까지 심판하시는 분이라고 말한다.
 
9-16절은 엘리바스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묘사하는 부분이다. 그는 욥이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큰일 혹은 기이한 일의 하나라고 보고 있다(9절). ‘기이한 일(니플라오트)’은 까닭 없이와 더불어 욥기를 관통하는 핵심 단어이자 반성적 지혜의 대표적인 표현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파악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인과응보의 원리 안에 가둬놓을 수 없고 하나님께서도 그 원리를 따라서만 움직이시는 분도 아니다. 엘리바스는 비를 땅에 내리시고 물을 밭에 보내시는( 하나님의 기이한 일) 일과 낮은 자를 높이 드시고 애곡하는 자를 일으키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일을 하시는 하나님을 예로 들면서 욥의 고난도 그와 같음을 비교한다.
 
엘리바스는 하나님께서는 헤아릴 수 없이 큰일을 하시는데 욥의 고난도 그와 같은 기이한 일이라고 본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교활한 자의 계교를 꺾고 지혜로운 자는 자기 계략에 빠지게 하고 간교한 자의 계략은 무너뜨리는 분이라고 말하면서 욥이 마치 그런 사람인 양 독설을 내뱉는다. 동시에 하나님은 자기 악행을 반성하면서 스스로 입을 다문 채 하나님께 용서를 비는 가난한 자는 구원하신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하나님께 회개하면 구원이 열릴 것이라고 욥으로서는 도무지 공감할 수 없는 말을 내뱉는다.
 
 
*하나님께 대한 엘리바스의 흠 잡을 데 없는 진술은 오히려 욥의 죄악을 더욱 전제하는 꼴이 되고 만다. 욥은 그의 말을 들으며 한없이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3. 하나님을 찾은 자의 복(17~27절)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는” 분이라고 선언한다. 욥이 하나님께 받는 고난을 “징계”라고 단정하는 엘리바스이다(17절). 당연하다 1~2장의 천상 회의를 모르는 사람이 내릴 수 있는 진단이다. 그래서 뒤이어지는 표현들은 ‘전형적인 규범적 지혜’의 표현들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지혜자와 의인은 환난과 기근과 전쟁과 멸망이라는 어려움 속에서도 구원받게 된다(19~22절). 징계가 복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여섯 가지 환난에서 욥을 구원하시고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욥에게 미치지 않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욥은 이미 최악의 환난 가운데 있었기에 쓸모없는 말 잔치일 뿐이었다. 쓸데없는 위로였다. 엘리바스는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막힌 방법을 소개하지만, 자신의 고난을 징계로 여기지 않는 욥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그럼에도 엘리바스는 허황된 약속으로 회개 이후 주어질 복을 소개한다.
 
어떤 측면에서는 욥이 다시금 온전한 길로 서게 된다면 얻게 될 구원의 예언적 선포라고 할 수 있다. 고통 중에 있는 욥에게 주는 소망의 말씀이 될 수도 있다. 전형적인 규범적 지혜다운 권면이다.
 
 
*엘리바스는 욥이 하나님께 징계받고 있다고 보았다. 이제 욥이 징계 사유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자비와 용서를 구하면 복을 받을 것이니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라고 경고했다. 즉 엘리바스는 어찌 되었든 욥이 지금 사는 방법은 민첩한 회개뿐이라고 믿고 있다. 회개해야 욥에게 밝은 미래가 열린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세상에는 회개가 필요 없는 고난도 있다. 징계가 복이 되기도 하지만 욥의 경우는 징계가 고난이었다.
 
 
 
나는?
-고난에는 원인이 있다. 문제는 그 원인을 잘 모른다는 데 있다. 그래서인지 때로는 고난보다 그 이유를 상상하는 것이 더 참담할 때가 있다. 혹은 그 원인을 너무 산뜻하게 정리하고 설명되어 되려 아픔을 주는 일도 있다. 본문이 딱 그 모양새다. 너무 교과서 같은 충고가 도리어 욥의 마음을 헤집는다.
 
-“나라면” (8절)이라는 엘리바스의 말에는 욥의 마음과 입장을 헤아리는 태도가 아예 없다. 자기 자신의 신학적인 기준에 맞추려 하기 보다 욥의 고통에 더 한 발짝 다가섰더라면 어땠을까?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들이라”라는 그의 말에는 죄로 인한 고난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이는 규범적 지혜가 기지는 명백한 한계다. 고난을 징계로밖에 볼 줄 모르는 것은 인과율의 함정에 철저히 오도된 것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본문에서는 죄 없는 욥을 죄인으로 만드는 망언이다.
 
-나도 주의해야 하겠다.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지체들에서 “죄가 있어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들이라”, “나라면” 따위의 표현을 아예 고려하지도 말아야 한다.
 
 
*옳은 말뿐이다. 그런데 욥에게는 틀린 말이다. 더 큰 문제는 엘리바스는 자기 말에 맹신하고 있다. 도무지 다른 가능성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어디 하나 틀린 것 없는 매우 지당한 말, 자신과 타인의 많은 경험에서 나온 검증된 말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일반화되어 버릴 수 있는 경험과 검증에 갇히지 않는 분이시다. 분명한 것은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은 사탄과 욥과 친구들의 생각 한계를 뛰어넘는 분이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 자신이 확고하게 확신하는 인과응보 사상으로 상황과 하나님을 재단하고 있는 그의 교만을 간과하면 안 된다. 나도 언제든지 이렇게 교만할 수 있다. 나의 경험과 확신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지도 않은 채 익숙하게(?) 혹은 아무렇지도 않게 툭, 말을 던질 수 있다. 그 말에 형제는 마음의 문이 닫힌다. 교회 공동체에서 멀어진다.
 
*모든 고난은 하나님의 징계가 아니다. 고난에서 교훈을 얻는 일은 의미가 있다. 하지만 모든 고난이 나의 잘못 때문에 닥치는 징계라는 시각은 또 다른 문제이다. 훈육을 달게 받으면 복이 되는 것이 맞으나 훈육의 목적이 아니라 고난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엘리바스는 회개해야 욥에게 밝은 미래가 열릴 것이라고 했으나 세상에는 회개가 필요 없는 고난도 분명히 존재한다.
 
*항상 옳은 말을 하는 것보다 언제 옳은 말을 하는가가 중요하다. 그러나 옳은 말을 굳이 하지 않아야 할 때도 있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나라도 꼭 이야기 해주어야겠다는 쓸데없는 사명감을 경계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잠시 숨 고르는 것에 익숙해야 할 것이다. 내가 하는 옳은 말보다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이 더 좋다.
 
 
 
*주님, 오늘도 역시 엘리바스의 똑똑한 말이 얄밉기만 합니다. 고난 겪는 욥에게 그의 말은 전혀 하나님에게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혹시 제 말이 이렇게 무미건조하지는 않을까요?
*주님, 부디 저에게 고통당하는 지체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바라보도록 눈을 열어 주고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말을 할 수 있도록 은혜 주십시오. 말뿐인 위로가 아니라, 말 때문에 위로받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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