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잘 알지도 못하면서 바른말만 … [욥 6:1-30]
 – 2023년 11월 09일
– 2023년 11월 09일 –

엘리바스의 충고는 더욱 큰 상처를 욥에게 입힌다. 어쩌면 하나님으로부터 온 고난보다 친구들의 “지혜의 말”이 욥에게 더욱 “혀의 채찍”이 되었을지 모른다. 이런 측면에서 욥의 저항과 도전은 하나님께 향한 것이 아니라 바로 친구들을 향한 것이다. 욥은 왜 친구들에게 격정적인 반응을 했을까? 무엇이 욥을 더 큰 고통의 늪 속으로 빠져들게 했을까?

 

욥은 자기에게 임한 고난과 고통으로 삶의 힘을 잃고 죽기를 소원한다. 자신의 고난과 두려움이 하나님의 독화살을 맞은 결과이며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의 삶을 살았음을 확신한다.

6장은 욥의 전체 진술 중에서 중요한 주제들이 등장하는데 첫째, 고통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둘째, 나는 무죄하다. 셋째, 인과응보의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넷째, “지혜”의 말이 상황에 따라 폭력이 될 수 있다.

 

 

 

  1. 욥의 대답_ 내 괴로움(슬픔), 내 파멸(재난)의 무게를 아느냐? (1~10절)

3장에 이어 자신의 고통이 극심함을 토로한다. 고통의 무게를 잴 수 있다면 ‘바다의 모래’보다 더 무거울 것이라고 표현한다(2~3절). 그만큼 고통을 감당하는 것이 처절했기에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진술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엘리바스가 욥의 한탄을 듣고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의 분노와 시기(5:2)’라고 비난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서는 이 극심한 고통의 처지를 이렇게나마 말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친구에 대한 서운함도 있었을 것이다.

 

욥은 자신이 당한 고난을 “하나님이 보낸 화살”이라고 표현한다(4절). 자신의 가축들을 몰살하고 자녀들을 죽인 모든 공격을 하나님의 독화살로 느꼈다. 그리고 마지막 화살은 자신의 몸을 악창으로, 친구들의 비난과 조롱의 형태로 날아들었다고 보았다. 이에 욥은 입맛을 잃고 음식을 먹지 못할 정도에 이르렀다(7절). 그러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온 이 고난이 자신을 내동댕이치고 있는 기막힌 현실에 참담해한다. 아무도 간구를 들어줄 사람 없고, 심지어 죽고 싶은 소원조차 하나님이 안 들어주신다고 한다. 그러다가 결국 자신을 산 자들의 땅에서 끊어버리실 것이라고 예상한다(9절).

 

욥은 자기 죽음을 간구하는 와중에도 자신의 결백함에 대해 확고하다(10절). 어떻게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일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음에서 오는 확고한 마음이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삶을 살았다. 이는 엘리바스도 인정할 정도였다(4:6). 하나님께서도 욥의 온전함과 정직함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사는 의로움과 지혜로움을 인정하셨다(1:8; 2:3). 그렇기에 자신이 극심한 고통 가운데에서도 기뻐할 수 있고 지금 죽더라도 위안을 받을 수 있다고 고백한다.

 

그가 이렇게 자신의 의로움에 대하여 단호하게 말하는 것은 교만과 자기 의로움이 아니다. 자기에게 임한 재앙과 그 고통이 의로운 삶을 지금까지 유지해 온 것에 비해 너무도 무겁고 힘겨우며 억울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죽는다고 해도 생애의 마지막이 죄와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숨기지 않고 실천하며 순종한 삶이므로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1. 죽기를 소원하는 욥(11~21절)

욥은 더 이상 살아갈 힘이 없다고 토로한다(11, 13절).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화살과 독(4절), 손(9절)으로 표현되는 고난 때문이다. 욥은 “내 힘이 돌만큼 단단하겠는가, 내 피부가 금속으로 되어 있는 줄 아는가(12절)?’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공격을 받아낼 힘이 없다고 토로한다. 또한 주위 사람들로부터 아무런 힘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며(13절), 주위 사람들은 동정을 베풀기는커녕 뜨거운 햇볕에 물이 말라버리듯이 자신의 주위에서 사라져 버렸다고 한탄한다(16~18절). 이는 욥에게 닥친 재앙을 보고 두려워졌기 때문이다(21절). 또 15~20절을 통해 친구들은 사막의 신기루 같은 헛된 위로를 하고 있다고 공격한다.

 

친구들의 변덕을 “와디”(건천)에 비유한다. 평소에는 건천이었으나 비가 올 만 창창한 강이 되는 것을 빗대어 친구들도 한결같지 않다. 자신이 잘 나갈 때는 잘 대하던 그들이 힘겨울 때 자신을 공격한다고 원망한다.

 

 

 

  1. 고통을 더 악화시키는 친구들의 조언(22~30절)

고통 속에 있던 욥이 친구들에게 바란 것은 그들의 힘을 나누어 달라는 것이 아니었다(22절). 또 고통에서 건져 달라는 것도 아니었다(23절). 그가 원하는 것은 “헤세드(14절_개역 개정은 동정으로 번역, 새번역_사랑)”였다. 헤세드는 “인자, 인애, 자비, 사랑”이라는 뜻에 “신실, 성실, 신의, 변함없음”이라는 의미가 중첩되어 있다.

 

헤세드 대신 친구들이 선택한 방식은 “옳은 말”로 “책망”하는 것이었고, 이것은 욥의 마음을 후벼 파며 고통을 가중하는 결과를 가져왔다(25절). 인과응보의 원리는 분명 “옳은 말”이었지만, 욥과 같이 예외적일 때 적용하게 되면 그 옳은 말이 “가치 없는 말, 무의미한 말”이 된다. 26절에서는 “실망한 자의 말”로 번역되었다.

 

욥은 친구들에게 “행악자가 되지 말라”(29절) 고 간절하게 부탁했는데, 욥을 바로잡아 고난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그들의 선한 의도는 그를 죄인으로 낙인찍는 폭력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당당하게 친구들에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분명하다. 욥은 고난받을 죄를 짓지 않아서 떳떳했기 때문이다. “제발 너희는 돌이켜서 불의가 없도록 하여라. 돌이켜라, 이 일에 대해 내가 여전히 옳다. 내 혀에 어찌 불의가 있으며, 내 입이 어떻게 썩은 것을 분별하지 못하겠느냐?” (새번역_29~30절)

 

욥은 당당히 말한다. 나의 의는 건재하다.

 

 

 

나는?

-엘리바스가 “분노(카아스)”가 미련한 자를 죽인다고 하자, 욥은 나의 괴로움(카아스)을 달아보면 바다의 모래보다 더 무거울 것이라고 대답한다. 상황을 바르게 살피지 않거나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권면은 오히려 상처가 된다. 욥은 하나님 앞에 탄식하지 말라는 엘리바스의 권면을 즉시 반박했다. 자신의 상처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아픈지 차라리 죽고 싶다고 고백했던 욥의 말은 엘리바스의 충고가 얼마나 그에게 큰 상처였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상상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있는 친구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지식을 총동원한 충고가 아니었다. 천사들의 아름다운 말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듯 권면이나 충고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

 

-욥은 자신에게 임한 엄청난 고난을 “전능자의 화살”이 자기 몸에 박힌 것으로, 하나님의 두려움이 자신에게 덮친 것으로 받아들인다(4절).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난을 이해할 수 없을 때 나도 역시 하나님의 공격을 받는 것 아닌가 하고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나왔음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그렇게밖에 하실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 앞에 내 모든 고통을 쏟아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욥이 3장에서 탄식하면서 하나님께 죽음을 구한 것은 그가 당한 고통이 너무나 크고 무거웠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치셨기에 살아갈 의미도 없고 버틸 수있는 힘도 없으니 자신의 생명을 끊어달라고 한 것이다. 삶의 의미를 상실할 정도로 고난이 길고 힘든 시기를 지난다면 욥의 인내를 묵상하며 견뎌주면 좋겠다.

 

-그가 죽음을 구한 이유는 지금 당장 죽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지 않았음을 인정받을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음이 모든 문제의 결말임이 분명하나 지금 살아 있는 시간 동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오늘 내게 주시는 의미를 붙잡는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

 

 

*욥의 아쉬운 고백에 마음이 저린다. 자신이 친구들의 눈에는 마치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저버린 것처럼 보였을지라도 그들이 진정한 친구라면 절망에 빠진 자신의 편에 서서 진심으로 위로해 주었어야 한다고 말한다(14절). 그렇게 위로를 기대한 친구가 금방 말라버리는 시내(와디)처럼 허망한 존재일 뿐이라고 토로한다. 녹아내린 눈으로 물이 많아졌다가도 더운 열기에 금방 없어져 버리는 와디는 그 물을 갈급하게 찾아다니는 대상과 상인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15~21절).

 

*욥이 친구들에게 바라는 것은 신학적 논리로 무장한 말이 아니다. 물질적인 도움이나 큰 구원의 손길이 아니다. 고난당하는 자신을 진정으로 위로해 주는 따뜻한 우정이었다(22~23절).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고통당하는 이들의 이웃이라면 구체적인 도움을 생각하기 전에 그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며 그들과 함께 있는 일을 먼저 해야 한다.

 

*주님이 그러셨다. 주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인간의 고통 가운데 함께 계셨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기억해야 하겠다.

 

 

*욥은 자기 말이 고통 가운데서 나온 진실이었다고 말하면서 엘리바스는 그저 자신의 말꼬투리를 잡고 책망만 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신에게서 허물을 찾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24~26절), 오히려 자신들의 논리를 위해서 고난 겪는 친구를 팔아넘기는 짓을 하고 있다고 비난한다(27절). 그러면서 세 친구에게 고난 겪는 자신을 진정으로 대면하고 잘못이 없는 자기 말을 책잡는 일을 그치라고 부탁한다(28~30절).

 

*나는 어떨까? 나의 논리와 판단에 다른 사람의 상황을 끼워서 맞추려고 하지는 않았을까?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위로하기보다는 내 논리에 따라 그를 더 힘들게 하지는 않았을까?

 

*고통의 원인을 파악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보다 위로의 말 한마디가 사람을 살린다.

 

 

*역경을 만나야 누가 진정한 친구인지 알게 된다. 나는 친구들에게 가르치려고만 하는 친구일까? 바른 소리만 하는 친구일까?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가? 그런데 너희의 책망은 도대체 무엇을 책망하는 것이냐? 너희가 말이나 책잡으려 하고, 절망한 자의 말들은 바람일 뿐이라고 생각하느냐?” (새번역_25~26절)

 

 

 

 

*주님, 신학적인 말보다 마음을 아우르는 말을 하겠습니다. 바른말, 가르치려는 말보다 따뜻한 말을 하겠습니다.

*주님, 고통당하는 이웃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말보다 행동이 앞서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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