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고통의 정점에서 [욥 7:1-21]
 – 2023년 11월 10일
– 2023년 11월 10일 –
6장이 엘리바스의 첫 번째 발언(4~5장)에 대한 욥의 답변으로 자신의 고통, 하나님의 공격, 자신의 무죄함, 죽음, 간구, 친구들을 향한 원망과 요구에 대해 말한 후에 7장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심정을 3장처럼 탄식하며 탄원한다. 인과응보의 원리에 대한 비판은 등장하지 않고 인생의 고통이라는 깨달음과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토로한다. 욥은 크고 크신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작은 인간의 삶에 일일이 관여하시느냐고 항변한다.
 
세 친구의 말이 대부분 욥을 설득하고 가르치려는 것과 대조적으로 욥의 말은 친구들의 지혜에 저항하기도 하고 독백과 같은 형식으로 독자들을 향하기도 한다. 또 하나님을 향한 탄원의 형식을 띠기도 한다. 때로 대상을 특정하거나 어렵거나 복합적인 경우도 있다. 이런 모습은 욥의 말에 마음으로 동의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욥의 말이 향하는 대상이 누구인가를 살피는 것은 본문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힌트를 제공한다.
 
7장에서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사면에서 대적하시므로 죽음만이 탈출구라고 생각할 정도로 고통스러움을 토로한다. 참된 휴식과 평안의 시간을 찾을 수 없다. 또한 온몸의 악창으로 인한 고통은 편히 잠들 수도 없게 하고 있다. 어쩌다 잠이 들면 하나님에 대한 두려운 꿈과 환상으로 이내 잠이 깨고 만다. 그의 마음에는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 자기 삶에 행복이 다시 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1. 하루는 길고도 길다. 그런데 인생은 짧다! (1~10절)
욥은 고통을 삶의 대가로 지불받는 임금으로 표현한다. 자신이 여러 달째 고통과 고달픈 밤(3절)이라는 삶을 사는데, 일과가 마쳐지면 뭔가 좋은 일을 기대할 수 있어야 함에도 그의 밤에는 기대할 것이 없다(2절)고 토로한다. 욥은 자기 경험을 인생에 대한 일반적인 진술과 연결하여 쏟아낸다. 그의 고백에 진한 현실감이 느껴지는 이유다.
 
욥이 경험한 것은 인과응보의 원리가 무너지는 매우 고통스러운 체험이었고 이는 다른 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고통으로 나아갔음을 의미한다. 규범적 지혜에서 말하는 것의 예외가 있을 수 있고 그 예외가 모든 사람이 인생에서 겪는 현실 가운데 하나이기에 욥의 고통은 공감대를 가져온다. 걱정과 근심으로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4절)”이는 경험을 해 본 이는 누구나 욥의 심정이 어떠할지 헤아리게 된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잠드는 일반적인 원리가 깨어진 삶을 사는 고통의 경험 역시 사람들이 겪는 규범적 지혜의 한계이다.
 
욥은 악창이 온몸을 뒤덮고 있었다. 구더기와 흙덩이가 의보처럼 덮여 있었고 피부는 굳어졌다가 터지는 것이 반복되었다. 피부 악창은 그의 밤을 완전히 깨뜨려 놓았다. 고통으로 채워진 밤을 늘 하얗게 지새워야 했다. 그 과정에서 두 가지의 상반된 생각이 교차한다. 먼저 고통을 견디는 시간은 매우 더디게 가는 반면(4절), 한 사람의 인생 전체는 한낱 바람이 부는 것 같이 빠르게 지나간다는 것이다(6~9절). 잠자리에 누우면 악창의 고통 때문에 “언제나 밤이 갈까”(4절) 생각하는 불면의 밤이 무척이나 느리게 가지만, 삶 전체는 마치 “베틀의 북보다” 빠르고(6절), “한낱 바람”과 같이 스쳐 지나간다(7절).
 
욥은 탄식 중에 기도한다(7~10절). 자신의 생명이 한낱 바람 같음을 생각하고 자신을 구해 달라고 간청한다. 자신이 죽으면 사람들이 더 이상 자신을 보지 못할 것이고, 하나님의 눈이 자신을 향할지라도 자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8절) 말한다. 구름이 사라지듯 스올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생명의 땅으로 올라오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9절). 죽은 자는 다시 생전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돌아가더라도 그 처소가 자기를 모를 것이다(10절).
 
 
 
2. 하나님을 향한 탄식(11~21절)
욥이 불평하는 이유는 자신의 괴로움 때문이었다(11절). 그 괴로움의 정도는 자신이 마치 하나님께서 무찌르셔야 하는 바다 괴물이나 된 듯이 감시하신다고 하소연한다(12절). 그 하나님은 꿈과 환상으로 자신을 놀라게 하고 두렵게도 하시는 분이시다(13~14절). 그러므로 차라리 질식사라도 당하고 싶다면서 괴로움을 토로한다(15절). 급기야 자신이 사는 것을 하나님이 싫어하시니 제발 죽게 해달라고 하소연한다.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16절).
 
침을 삼킬 만큼의 짧은 순간도 놓아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19절) 인제 그만 관심을 거두어 주시라고 하소연 한다.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어떤 손해가 끼쳐졌기에 이렇게까지 하시느냐고(20절) 하소연을 이어간다. “어찌하여 주께서는 내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시고, 내 죄악을 제하여 주시지 아니하시는 것입니까? 이제 내가 흙에 눕게 되었으니, 주께서 나를 찾으셔도 내가 없을 것입니다.” (새번역_21절) 그의 토로는 끝날 줄 모른다.
 
 
욥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슬픔과 온몸을 뒤덮고 있는 악창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자신을 제발 가만히 내버려 뒀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사라져 버리면 좋겠다”라는 말로 표현한다. 그의 고통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수직적인 차원과 친구들에게서 오는 수평적 차원으로 구분할 수 있다. 사라져 버리면 좋겠다는 그의 토로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사라짐과 하나님으로부터 사라짐으로 나타난다.
 
인생은 바람과 같고(7절) 입김과 같이 짧은 것이라서(16절) 빨리 지나가는데 “뼈를 깎는 고통”으로 채워진 인생은 짧은 순간의 인생마저 너무 길게 느껴지고 더 빨리 그 고통스러운 삶을 끝내고 싶다는 마음이 표현된다(15절). 이보다 끔찍한 일은 없을 것이다(16절). 그래서 욥은 하나님께 자신을 놓아 달라고,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게 그만 죽게 해달라고 간구한다(15~16절).
 
한 인간의 행위가 그 크신 하나님께 영향을 끼칠 리 없기에(20절), 그 크신 하나님이 미천한 한 인간의 잘잘못에 일일이 관여하셔서 작은 잘못 하나에도 벌을 내리실 필요가 있느냐고 항변한다(17~20절). 죄가 있다면 없애는 것이 어렵지 않은 일일 터인데 왜 하나님은 굳이 욥을 표적 삼아 고통스럽게 하시냐는 것이다.
 
친구들에게는 이러한 욥의 외침이 불경스럽게 여겨질 수 있겠으나 욥과 같은 고통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욥의 외침에 적극 공감할 것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욥의 발언도 역시 1~2장의 천상 어전회의에서 벌어진 일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하는 말이다.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하는 고통이 가장 괴로울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의 본능은 같은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욥의 세 친구처럼 고난의 원인을 분석하고 이유를 찾아 해석하려는 욕망이다. 그 욕망이 고통 중에 있는 인간의 외침을 분석의 대상으로만 보게 한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절규하는 성도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넉넉함을 갖춰야 할 것이다.
 
 
 
나는?
-욥은 지금 받는 고난은 죄의 열매이니 회개하라는 엘리바스의 충고에 대답했다. 먼저 자신의 무죄함을 호소하고 친구들의 조언은 고통만 더할 뿐이라고 지적했다(6장). 그리고 이제 자신이 무슨 큰 죄를 저질렀기에 이렇게 큰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하나님께 항변한다(7장).
 
-욥의 호소는 문자적으로 보면 제발 자신을 내버려 두어 며칠 만이라도 고통 없이 살다가 죽게 해달라고 대드는 것처럼 여겨지게 한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해 보면 욥은 자신의 인생 중에서 그 어느 때보다 하나님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또 가장 많은 말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극심한 고통 중에서 하나님을 찾고 많을 말을 하는 그의 중심이 여전히 하나님께 있음을 방증해 주고 있다.
 
-고난은 하나님과 이전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한다. 투정을 부리든, 탄원하든, 울며불며 몸부림을 치든,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고통을 매우 정직하게 표현한다. 누구나 당하고 싶지 않은, 겪더라도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는 그 고통에 솔직하게 토로한다.
 
-수개월 동안 지속된 자녀들의 죽음과 재산을 상실한 고통, 아내는 떠나갔고, 육신의 건강이 무너진 현재의 상태를 가감 없이 온몸으로 받아내며 반응한다. 오죽하면 친구들의 말대로 죄를 지어 고통을 받는다고 하여도 이렇게 큰 고통을 받을 정도는 아니지 않느냐며 차라리 빨리 죽게 해달라고 호소한다.
 
-고통을 무작정 참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좋은 신앙의 태도도 더욱 아니다. 때로 울부짖으며 절규하는 것이 가장 정직한 신앙이다. 그 울부짖음의 끝에서 고통을 뛰어넘게 하시는 주님을 가장 직접적으로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욥과 같이 죄와 상관 없이 고통을 당하고 고난을 겪는 사람들이 이 땅에 존재한다. 우리는 욥의 세 친구처럼 인과율에 따른 정죄와 판단에 익숙해지지 말고, 율법에 기초한 옳은 말의 폭력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처럼 그들과 함께 아픈 삶을 나누고 치유와 회복의 복음을 나누어야 하리라.
 
-욥은 하나님을 쉬지 않고 자신에게 고통을 주시는 분으로, 한순간도 눈을 돌이키지 않고 자신을 감시하면서 공격하시는 “눈과 감찰자”로 묘사한다(8, 20절). 끊이지 않는 육신의 고통을 하나님의 공격과 감시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잠깐 있다가 없어질 안개와 같은 자신을 과대평가하신 것이라고 항변한다. 그리고 혹여 죄를 지었을지라도 크신 하나님께는 별 영향이 없으실 터이니 죄와 상관없는 곳, 곧 죽음의 세계로 갈 자신을 용서해 주시기를 울부짖는다
 
-그의 말이 매우 지나치게 느껴지지만, 욥의 이런 모습이 오늘날 성도들에게는 없다. “솔직하게 직면하여 고하는 것”을 보기란 쉽지 않다. 고통의 정점에서조차 고상하게 포장하는 것은 위선이다.
 
 
*부르짖음…. 고통의 정점에서 가식 없이 외치는 욥의 몸부림이 애잔하다.
 
 
 
*주님, 이제 자신을 놓아달라고 외치는 욥이 애잔합니다. 하지만 이 부르짖음이 회복을 불러오고 있음을 압니다.
*주님, 고난의 시간이 오히려 가장 주님과 함께했던 시간이었습니다. 더 많이 말하고 더 많은 시간을 주님 앞에서 보냈음을 압니다. 고난의 때가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더 말하고 더 머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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