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확신에 찬 신념의 말이 비수가 되어 욥을 헤집는다 [욥 8:1-22]
 – 2023년 11월 11일
– 2023년 11월 11일 –
빌닷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부당하다고 원망하는 욥에게 하나님께서는 절대적으로 공의로우시다고 반박한다. 욥의 자녀들이 죄 탓에 죽게 되었는데 이는 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 결과라고 확언한다. 악인을 심판하시고 의인은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찾고 회개함으로 돌이키라고 권고한다. 빌닷은 욥의 고난을 인과응보의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자녀들의 죽음을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로, 욥의 불행을 하나님을 잊어버린 과오로 판단한다. 그럼에도 아직 욥에게 회복의 가능성이 있으니 회개하라고 촉구한다.
 
 
 
1. 빌닷의 책망(1~2절)
엘리바스의 말에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하는 항변을 듣고 있던 빌닷이 강력하게 책망한다. 빌닷은 욥이 자신의 고통에 대해 하나님께 탄식하고 불평하며 무고함을 증명하려는 모습을 인과응보의 원리에 도전하는 것으로 여겼다.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는가? (2절)”라며 책망을 시작한다. 빌닷은 욥이 하나님께 자신을 항변하는 말들이 강력한 바람과 같이 거칠고 험하다고 지적한다. 빌닷은 욥이 불평을 지속하고 자기 형편의 어려움과 고통을 절망적으로 토로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이며 올바르지 않다고 지적한다.
 
 
 
2. 빌닷의 반박(3~7절)
욥이 죄를 범하지 않은 자신에게 이유 없이 고통을 주시고 괴롭게 하신다고 탄식하는 것을 하나님의 공의를 행하심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다. 빌닷은 하나님께서는 의인은 복을 받게 하시고 악인은 벌을 받게 하시는 인과응보의 원리를 따라 바르게 판단하시고 심판하신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뜻과 인과응보 논리를 동일시한다.
 
이런 관점으로 욥의 자녀들이 죽게 된 것이 그들이 죄를 범하였기에 벌을 받는 인과응보의 원리를 따라 벌어진 사건이라고 말한다. 이는 욥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고난이 자신의 죄 때문에 받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빌닷은 욥이 그의 자녀들과 같이 죽음까지 가는 심판을 받지 않으려면 회개함으로 회복을 얻어야 한다고 권면한다.
 
먼저 하나님과 관계의 회복이 일어나야 하고 이를 위해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기도하며 죄 용서를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함으로 회개하라고 한다. 또, 삶의 태도에 있어서 회복을 말하며 도덕적으로 정결하고 흠 없는 삶을 살라고 한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욥의 처소를 하나님의 직접적인 보호 아래 있는 의로운 거주지로 평안케 하실 것이다.
 
현재는 재앙으로 인해 가족, 재산, 건강까지 잃은 초라한 모습으로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회개하면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7절) 라고, 말하며 회개를 촉구한다. 특히 많은 성도에게 꿈과 희망과 용기를 주는 이 유명한 구절은 빌닷이 욥에게 규범적인 지혜에 근거하여 “네 자녀들이 죽은 것은 그들의 죄 때문이다.”라는 말을 대놓고 한 뒤에 이어지는 말이다.
 
*무수히 많은 사람을 “살리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그의 영혼을 갈가리 찢어놓는 끔찍한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반성적 지혜”의 가르침이다.
 
 
 
3. 불의한 자에게 임하는 화(8~19절)
빌닷은 자기 지혜의 근거를 “옛 시대 사람과 조상들”에게 둔다. 신 32장 7절 “아득한 옛날을 회상하여 보아라. 조상 대대로 내려온 세대를 생각하여 보아라. 너희의 아버지에게 물어보아라. 그가 일러줄 것이다. 어른들에게 물어보아라. 그들이 너희에게 말해 줄 것이다.” 이처럼 규범적 지혜는 패턴을 아는 것이다. 이 패턴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실 때 이미 결정된 규범이다. 따라서 과거를 기억하고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 패턴은 자연 현상에 대한 관찰(일반계시)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이런 특징 때문에 규범적 지혜의 관점에서는 나이가 많은 것이 지혜를 상징한다. 과거에 좀 더 가까이 있기 때문이고 패턴을 관찰한 경험이 많기 때문이다. 잠언의 형식이 부모와 조상들에게서 배우는 형식으로 기록된 이유이기도 하다.
 
빌닷은 “뿌린 대로 거둔다”라는 규범적 지혜의 근본 원리를 설명한다. 이렇게 설명하는 이유는 전통적인 규범적 지혜를 알 때 고난의 원인을 알 것이라는 생각에서이다. 욥이 지혜를 따라 순종하는 삶을 통해 인과응보의 원리 안에서 복을 누리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 전통적 지혜를 배우라고 한다. 조상들과 비교하여 현재를 사는 인생은 짧고 유한하며 그림자와 같이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이는 현재적 고난을 통해 경험만으로 하나님을 판단하지 말고 지혜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이다.
 
 
빌닷은 욥이 하나님을 잊은 자처럼 행하지 말라며 세 가지 예를 들어 어리석게 하나님께 항변하여 인과응보의 심판을 받지 말라고 한다. 첫째 왕골과 갈대를 통한 비유를 든다(11~12절). 왕골과 갈대가 애굽의 강가에서 겉보기에 무성하게 자라지만 이는 일시적인 것이다. 건기가 시작되어 강이 마르면 곧바로 마르게 된다고 말한다. 이는 악인이 악행을 통해 번성하고 잘 되는 것 같지만 한시적이며 곧 멸망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그에게서 소망이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둘째, 거미줄이 안전하게 보이지만 끊어지는 것처럼, 악인이 믿고 의지하는 바는 결국 의지할 수 없도록 없어질 것이다. 이는 거미가 수고하여 거미집을 지었다 할지라도 거하지 못하게 되는 것처럼 악인이 수고하여 쌓은 모든 것도 일시적이며 결국 보존되지 못하고 사라지게 될 것을 비유로 말한 것이다. 이 두 비유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자,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는 인과응보의 결과로 심판을 받아 멸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셋째, 빌닷은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의 결과를 식물에 비유하여 교훈한다(16~19절). 식물이 잘 자라는 것을 “햇빛을 받고 물이 올라 그 가지가 동산에 뻗으며”라고 표현하며 악인이 누리는 형통함을 묘사한다. 하지만 식물이 돌무더기와 돌 가운데 뿌리를 내리며 든든하게 서서 번영과 형통을 누릴 것 같지만 결국은 뽑히게 된다. 그렇게 뽑히게 되면 심겼던 자리조차 몰라보게 되는 것처럼 악인의 형통함과 견고함은 결국 순식간에 사라지고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인생무상이다.
 
 
 
4. 순전한 이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20~22절)
전통적인 지혜를 따라 악인에게 임할 심판과 의인에게 주어지는 축복이 있음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공의는 악한 자가 형통하도록 붙드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공의는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고 그를 향하여 웃음과 기쁨을 준다. 더 나아가 순전한 자를 미워하는 자와 악인까지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셔서 멸망케 된다고 한다.
 
빌닷은 욥을 향하여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고 전통적 지혜에서 배우고 순종하라고 말한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공의 심판을 받지 말고 돌이켜 의인이 받는 복을 누리라고 마지막까지 충고한다.
 
전통적인 규범적 지혜를 따르지 않고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하며 하나님께 항변할 때 그의 공의가 악인에게 심판으로 임하고 결국 멸망하게 된다는 경고이다.
 
 
 
나는?
-빌닷은 욥의 주장이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욥의 자녀들은 죄를 회개하지 않았기에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살아있는 욥이 이 고난에서 벗어나려면 회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할 때 지금은 비록 다 잃고 미약하지만, 나중에는 다시 창대할 것이라고 위로하는 말씀이다. 빌닷은 철저히 인과응보의 사관이 확고하다.
 
-인과응보의 원리는 전통에서 보고 배우며 터득하는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이 전제이다. 이는 조상들이 터득한 지혜이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깨닫기 힘들지만, 짧은 인생, 자기 경험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인과응보는 자연에서 배울 수 있다. 왕골과 갈대가 겉보기에는 왕성해 보이지만 순식간에 말라버리듯이, 거미줄 위에 집이 서지 못하듯이, 햇빛을 받고 올라왔다가 갑자기 뽑히는 식물처럼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잊고 교만하여 벌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빌닷의 신학은 확고하다. 하지만 알고 있는 지식이나 경험한 현상만을 가지고 하나님의 공의를 모두 이해할 수는 없다. 혹시 내 얕은 신학적 지식으로 고난 겪는 사람들을 판단하기보다 그들의 아픔에 동참하려고 애쓰게 해야 한다.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회복을 간구해야 한다(5절). 그러나 회복이 더딘 것을 반드시 회개할 것이 남아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선하신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인내해야 한다.
 
*욥과 친구들의 대화가 점점 격화된다. 고통 속에 있는 욥을 위로하기 위해 방문한 그들의 마음이 무색하게 이제는 논쟁으로 치닫는다. 전통에 호소하며 보응의 원리를 고수하고, 다양한 은유로 욥을 정죄하며 회개를 촉구하는 빌닷에게 공감이나 유연함이 없다. 욥의 고통, 절박한, 억울함을 헤아렸다면 단지 하나님을 향한 거친 말투가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고통 속에서 괴롭다고 아우성치는 이의 태도를 문제 삼고 비난하기보다 그렇게 거칠게 나올 수밖에 없는 그 심정을 헤아려야 하지 않을까?
 
*빌닷의 확고함은 “공의롭고 정의로운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은 억울할 일이 없다”라는 것이었다. 이런 신념이 욥의 자녀들이 그들의 죄로 죽은 것이니 살아있는 욥이라도 회개하라는 말의 폭력을 서슴지 않게 했다.
 
*그릇된 신념이 가지고 오는 타인에 대한 말과 행동의 폭력의 문제는 욥과 세 친구의 문제일 뿐이겠는가?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갈등의 문제가 이와 같은 것에서 오지 않을까? 특히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이들이 가장 거친 말의 폭력을 예사로이 내뱉는 것을 보면 가히 통탄할 일이다.
 
 
*빌닷은 전통의 권위를 맹신하고 있다. 여러 세대를 거쳐 지혜를 전수해 주는 것이 전통이라지만, 모든 경우가 다 지혜로운 것이 아님을 인지해야 한다. 전통은 더 나은 지혜로 나아가게 하는 미래적인 지혜여야 하는데, 옛것 자체만으로 묶여 과거로 향하는 지혜라면 점차 사멸될 것이 확실하다. 하나님 나라 복음이 다시 오실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도 이런 이유가 아닐까?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며 재림의 주님을 소망할 때 완전하게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오늘을 믿음으로 살아내게 할 것이다.
 
*빌닷은 회개하면 하나님이 그의 손을 잡아 주시고 즐거움을 안겨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인과율의 원리는 매우 교묘하여 기복적인 수단이 되게 하기도 한다. 사탄도 욥의 경건을 하나님 앞에서 이런 시각으로 폄훼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니 경건하다는 논리였다(1:9~11; 2:5).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으로 사는 것은 인과율의 공식처럼 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믿음으로 사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빌닷도 역시 엘리바스와 다름없이, 아니 그보다 더 화려하고 수려한 말로 욥을 정죄한다. “하나님을 잊은 자, 저속한자”라고 단정한다. 위로가 필요한 자리에서 자신이 가진 규범적 지혜를 여러 은유로 욥의 마음에 비수를 꽂는다. 그러나 본인은 그것이 비수인 줄 모른다. 내가 혹시 이럴까 두렵다. 수려한 말보다 묵묵히 함께 해주는 시간이 더 가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주님, 내가 알고 있고 확신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때로 상대방에게 폭력, 좌절, 비수를 꽂을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부디 이런 말을 쉽게 휘두르지 않도록 제 마음과 입술을 지켜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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