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크신 하나님, 철저히 무능한 인간 [욥 9:1-16]
 – 2023년 11월 12일
– 2023년 11월 12일 –
빌닷은 욥의 고통 토로가 인과율의 원리에 충실하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의 발언은 엘리바스보다 수위가 높았다. 욥 자녀들의 죽음도 그들의 죄 때문이라고 공격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런 주장은 조상들의 지혜라고 말했다. 욥은 이러한 빌닷의 충고에 대해 대답한다. 본문의 그 응답의 전반부이다.
 
인과응보의 원리로 죽은 자기 자녀들을 저주하고 고난 겪는 자들을 정죄하는 빌닷의 말에 욥은 저항한다. 이 과정에서 두 가지 중요한 반성적 지혜를 다룬다. 먼저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인간의 생활 영역을 한참 벗어나는 것이며, 그렇기에 커다란 창조주를 한낱 피조물인 인간은 다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욥은 친구들이 말하는 규범적 지혜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저자는 1장에서 그가 스스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고자 최선을 다하는 지혜의 화신이었음을 이미 기록했다(욥 1:1-5). 그러나 욥의 삶과 신앙은 인과응보의 원리에 한정되지 않았다. 그 원리를 초월한 주권적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 즉 반성적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욥 1:21; 2:10). 욥은 9~10장을 통해 친구들의 논리에 대응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과 담판을 지으려고 한다. 그것은 자기 고난의 원인을 설명해야 할 책임이 하나님께 있는데도 침묵하고 계신다고 항의하는 모습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던지 “초하나님 존재가 하나님과 자기 사이를 심판해 줄 것”을 기대한다. 욥은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정죄하신다면 감히 하나님께 맞설 수 없는 존재인 것도 인정한다.
 
 
 
1. 일부 동의 그러나 반문(1~4절)
사람이 하나님과 견주어 결코 의로울 수 없다는 엘리바스의 주장(욥 4:17)을 욥은 잘 안다(2절).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이는 곧 하나님 앞에 어느 사람도 지혜자일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움직이시는 방법을 예측하거나 평가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의미가 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차이를 이런 관점으로 이해한다면 과연 엘리바스나 빌닷은 어떻게 하나님을 그렇게 잘 알 수 있겠는가?
 
욥은 말한다. 지혜와 힘은 하나님께 있고(4절)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어서 하나님에 대하여 어느 인간도 제대로 알 수 없다(3절). 이것이 반성적 지혜의 주장이다. 즉 “왜 너희들의 지혜를 너희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않느냐?”는 반문이다.
 
 
 
2. 반성적 지혜_하나님의 크신 능력(5~9절)
욥은 구체적으로 자연 속에 나타난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를 노래한다. 5절에서 하나님은 산을 움직이시는 분이며 진노하시면 산 하나 정도는 가볍게 뒤집어엎을 수 있는 분이다. 산이 미처 깨닫기도 전에 이런 일을 하실 수 있을 정도로 미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기도 전에 산이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6절은 땅을 흔드시는 분으로 묘사한다.
 
고대의 세계관에서 육지는 커다란 기둥들 위에 큰 판이 얹어져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렇기에 욥의 이런 묘사는 기둥 위에 얹힌 육지를 흔들어 땅의 기초인 기둥까지 흔들리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는 것이다. 전통적 지혜에 따르면 우주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의가 필수이고 불의가 생기면 땅의 기초가 흔들리고, 하나님이 공평하게 다스리시면 땅이 안정되고 움직이지 않는다고 여겼다(시 96:10). 그런데 욥은 하나님에 대하여 하나님이 산을 흔들고 정의로운 질서보다 무질서를 초래하는 분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해를 뜨지 못하게, 별을 반짝이지 못하게 봉인하셔서 세상에 암흑을 가져오시는 분으로 묘사한다.
 
문자 그대로 들으면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가 되지만, 욥이 친구들의 충고에 대하여 반응하는 측면에서 본다면 그 내용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규범적 지혜는 인간의 생활 반경 안에서 주로 관찰되는 것을 통해 삶의 규칙(규범)을 끌어내어 인간의 삶에 적용한다. 이런 면에서 인간 중심적인 지혜일 수 있다. 반면 반성적 지혜의 특징은 인간의 삶의 영역 바깥의 세계마저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께서 땅의 기둥들을 흔드시고(6절) 해를 뜨지 못하게 하시거나 별들을 가둬두는 것이(7절) 땅이나 해, 별의 무지나 악 때문이 아니다. 욥의 친구들은 인과응보의 원리로 세상이 움직이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입증하는 자료가 되지만, 그 인과응보의 원리로 설명될 수 없는 세계 또한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다는 사실을 통해 하나님을 인과응보의 원리 하나에 가둬놓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원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 원리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파괴하기도 하시며, 창조하기도 하시는 놀라운 능력을 갖추신 분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지혜 앞에 인간의 지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3. 반성적 지혜_인간의 무능(한계)(10~16절)
10절은 5~9절과 11~16절을 연결하는 경첩과 같은 역할을 한다. 크고 크신 창조주 하나님을 한낱 인간이 이해할 수 없다는 자연스러운 논리의 귀결이다. 특히 크신 하나님의 움직임을 인간은 “측량할 수 없고 셀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고난과 고통이 인과응보의 원리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로 일어났지만, 이조차도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측량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깨닫고 있다.
 
산과 바다와 별의 움직임이 바뀌는 것은 그들이 죄를 지어서가 아닌 것처럼 욥에게 일어난 불행 역시 죄나 무지로 인한 것이 아니다. 지혜에 대한 인간의 인식 가능성을 규범적 지혜에서는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지만, 젊은이들은 지혜와 무지 사이에서 어느 쪽이든 갈 수 있는 불안한 존재이고, 그들을 유혹하는 악의 손길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기에 그들은 부모와 조상 세대에게서 지혜를 배울 필요가 있다. 그러나 반성적 지혜의 입장은 인간은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자유로우심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이시기에 천상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존재이며,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인간은 알 수 없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내 앞을 지나더라도 알 수 없으며(11절), 하나님이 가져가시면 인간은 막을 수 없다(12절). “라합(고대 근동의 신화적 존재로 혼돈을 일으키는 신화적인 존재)을 돕는 자들”과 같은 천상적 존재들을 굴복시키는 분이 왜 재앙을 내리는 그 이유를 인간이 알 수 있는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엘리바스나 빌닷이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을 잘 알 수 있는가? 너희는 인간이 아닌가?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행위에 옳고 그름의 평가를 할 수 없고 동시에 그 뜻을 돌이켜 달라는 요청에 하나님이 응답하셔야 하는 이유가 없는 것이다(14~15절). 인간은 하나님께 대하여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판단, 평가에서 그저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바랄 뿐이다(15절). 특히 15절의 “간구할 뿐이며”로 번역된 “하난(חָנַן)” 동사는 1:9과 2:3의 “까닭 없이”와 같은 어근을 가진다. 한 인간의 올바름(쩨데끄)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미쉬파트)에 있어서 행동한 그대로 보응 받는 인과응보의 원칙을 벗어나서 하나님의 “까닭 없는” 긍휼과 은혜를 간구하는 욥의 태도를 잘 드러내고 있다.
 
*이와 같은 욥의 모습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나 인간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 속에 있을 때 인간이 하나님께 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의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로 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16절은 인간의 무능함 속에서 현재 상황에서 하나님께 간구한 것을 혹시 들어주셨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그것이 응답인지 확신할 수 없는 무지의 상태에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 인간의 무능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인지하거나 생각하지 못한 재앙을 주실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응답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누구도 무지할 수밖에 없다.
 
 
 
나는?
-욥이 처절한 고백 가운데서 탄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하나님의 무응답 때문이었다. 욥은 하나님을 온 우주를 주관하시는 완전한 주권자이자, 모든 피조물을 만드신 전능하신 창조주로 묘사하다가도 자기 마음대로 세상사를 주관하면서도 피조물에 대한 무관심한 독재자로 비유한다. 그만큼 절망적 상황에서 기도에 대한 응답은커녕 거절의 음성조차 들을 수 없었던 욥의 입장에서 내뱉을 수밖에 없었던 절망의 탄식이었다. 괴롭기만 한 절규였다. 그런데 빌닷의 한층 강화된 판단을 들은 욥은 지금 자신이 지식으로 알고 있는 하나님이 아닌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그 절규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전부가 아닐 수 있어도 사실이었다. 욥은 말도 안 되는 고난과 고통에 짓눌린 경험으로 얻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압도당하고 있다. 그가 깨달은 하나님은 누구신가? 그가 고통 속에서 깨달은 반성적 지혜는 무엇이었는가?
 
-유일하신 주관자 하나님이시다. 욥은 해와 달들이 뜨고 지는 모든 것을 자기 의지대로 주관하신다는 “우주적 신정론”을 고백한다. 그 우주와 비교할 때 자기 삶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인정한다. 그러니 자신의 삶을 하나님이 마음대로 운용하신다고 해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그렇다 인간은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가진 재물과 지식이 있으면 마치 자신이 우주의 왕이라도 된 것처럼 교만으로 가득 찬다. 욥처럼 하나님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과 그것을 뛰어넘는 모든 것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신앙이 없기 때문이다. 한편 하나님을 극대화하고 인간을 극소화하기만 한다면 하나님도 바르게 이해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는 것도 잊으면 안 된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우리가 다 담을 수 없는 존재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부모와 자식 관계에서도 궁극적인 존경과 순종이 있지만 때로 격의 없는 대화와 갈등을 통해 더 깊은 사랑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욥은 끝없는 고통 속에서도 끝없는 질문과 외침을 통해 결국 “주에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는다”라고 고백하였다. 자신의 마음을 토로하고 하나님을 만나면서 점점 하나님은 자신의 지식과 경험으로 다 담을 수 없는 분인 것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앞에서 솔직함이 우리를 하나님의 진리로 깊이 들어가게 한다. 욥이 주님의 임재에 대한 갈망과 솔직한 대화를 통해 결국 하나님을 만나고 해답을 얻게 되듯이 우리의 인생도 정직하게 주님을 더 온전하게 알아가는 여정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욥이 그 처절한 고통 속에서 깨달은 하나님은 의로운 자를 의롭다고 인정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다. 빌닷은 욥이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는 것만으로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욥은 자신의 순전함은 포기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순전성을 인정하지 않고 계신다는 것도 인정한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자신의 의로움을 인정하지 않는 현실에 직면하고 있다.
 
*의로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주장하지 못하는 인간이다. 욥은 아무리 자신이 의로워도 그것을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뿐임을 인정한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지혜와 지식에 있어서 인간과 비교할 수 없기에, 자신이 억울해도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욥에게 하나님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무소불위의 재판장이다. 그분의 판결을 뒤집을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자기 마음대로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욥에게 하나님은 창조의 질서를 세우기도 하시고 선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선악의 피안에 계신 분이시다. 종잡을 수 없다. 파악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분이시다. 즉 인과응보의 틀에 가둘 수 없는 분이시다.
 
 
 
*주님, 크신 하나님을 가늠조차 못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인간의 철저한 무능과 한계에 좌절감을 느끼지만, 그 좌절감이 다시 도전할 용기를 주는 것은 확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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