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원망 가득한 토로, 하지만 그조차 하나님 앞에서 쏟아내다! [욥 10:1-22]
 – 2023년 11월 14일
– 2023년 11월 14일 –
9장에 이어서 빌닷의 충고에 대한 욥의 변론이 계속된다. 사실 빌닷을 향한 것이라기보다 부당하게 재앙을 내리시는 하나님을 향한 토로이다. 9장은 세상의 불합리한 일들과 공의가 상실된 것 같은 일들의 모든 책임 하나님께 있다고 부르짖고, 자신에게 까닭 없이 재앙을 주신 하나님께 항변하는 내용이었다. 10장도 지속적인 절망감 속에서 자신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심판주 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탄원을 계속한다. 자신을 무고하게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바라서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고통을 주시는 그 원인을 알 수 없고, 하나님과 잘잘못을 가릴 수조차 없는 상황에서 욥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뿐이었다. 기도밖에 할 것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이 까닭 없는 것이듯 까닭 없는 은혜를 포기하지 않고 간구한다. 인간의 삶은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 없다. 욥이 당하는 것과 같은 이유 없는 고난들이 생긴다. 창조주 하나님의 인생을 향한 성실하심에 의문이 제기되고, 심판주 하나님이 부당하다고 느껴질 때가 간혹 인생에 찾아온다. 그러할 때 인간의 이해 범주를 넘어선 하나님의 주권과 뜻이 있음을 인정하고 믿음의 반응을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이다.
    
    
    
1. 하나님을 향한 탄원(1~2절)
하나님을 상대로 아무런 가망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욥은 불평을 쏟아낸다. 이렇게 하나님께 여과 없이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며 호소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자신을 정죄하시는지 알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무가내 매달림이 아니라 법정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을 변호하는 분위기로 탄원하고 있다.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2절)”라고 표현하며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께 아뢴 것이다. 이 변론을 통해 요구하는 것은 두 가지였다. 먼저 자신을 정죄하지 마시기를 요청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자신과 대항하여 고난을 주시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시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이런 욥의 모습을 통해 분명한 한 가지를 깨닫는다. 자신이 겪고 있는 고난의 해결책을 친구들과의 논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통 중에서 자신의 원통함과 괴로운 마음을 여과 없이 하나님께 쏟아낸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자신을 이토록 정죄하시는지 알고 싶어 몸부림친다. 나는 얼마나 진솔하게 하나님 앞에 서고 있을까?
    
고통을 하나님께 쏟아내는 것은 바람직하다. “불평을 토로하고,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1절)” “나를 정죄하지 마시옵고 무슨 까닭으로 나와 더불어 변론하시는지 내게 알게 하옵소서” 욥의 탄원의 목적이 분명하다. “알고 싶은 것”이다. 자신을 정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한다. 감당하기 벅찬 고난의 무게를 원인이라도 알고 감당하고 싶은 것이다. 욥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2. 창조하시고 학대하시는 것은 아니신가? (3~7절)
욥은 하나님이 손수 지으신 피조물인 자신을 학대하시고 멸시하실 뿐만 아니라 도리어 악인의 꾀를 두둔하신다고 원망한다. 마치 무엇을 제로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자신을 다루신다고 항변한다. 즉 자신이 악하지 않다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마치 자신을 악인 다루듯이 학대하고 멸시하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 터져 나오는 솔직한 말로서 그의 심정이 이토록 답답하다는 것이다. 답답한 마음에 도를 넘어선 원망을 하나님께 토로하고 있다. 이후 욥은 이 부분을 회개한다(42:1~6).
    
*중요한 것은 비록 투박하고 거칠더라도 하나님을 향해 끊임없이 질문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도 하나님을 향하여 항변하고 싶은 부조리함과 악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감사한 것은 이 모든 질문들을 허락하시며 인격적으로 이를 풀어나가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3. 하나님 그런데 왜 저를 공격하십니까? (8~17절)
욥은 자신을 정성스레 지으시고 생명과 은혜를 주신 창조주 하나님이 이제는 생각을 바꾸셔서 자신을 공격하고 계시는 것처럼 느낀다. 자신이 죄를 범했든지 의롭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이 엄청난 능력으로 자신을 공격하시고 완전히 짓밟으시는 것만 같다고 고백한다. 번갈아 가며 끊임없이 다가오는 질병의 고통이 바로 하나님이 진노 가운데서 자신을 죄인처럼 다루시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욥은 답답했다. 주의 손으로 나를 빚으셨고 만드셨는데 왜 이제는 멸하시려고 하시는지 괴로웠다(8절). 손수 지으셨고. 생명과 은혜를 주시며 보살펴 지켜주셨는데(10~12절) “그러한데(13절)” 내가 범죄하지 않았음에도(14~15절) 나를 젊은 사자처럼 사냥하시고, 새로운 증인들을 계속 세워 마치 군대가 나를 치듯이 번갈아 가며 나를 치게 하셨다(16~17절)고 토로한다.
    
*욥의 마음이 가늠된다. 나를 전적으로 사랑하셨던 하나님께서 도대체 왜 이런 고난을 한꺼번에 행하셨을까? 생각할 때 이런 표현은 자연스러운 반응일 것이다. 나를 사랑하시는 것만 같았던 하나님이 내 대적처럼 느껴질 때…. 아…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혹시 내 삶 속에 일어난 질병과 갖은 고통이 하나님 심판의 증거처럼 느껴질 때가 왜 없겠나…. 누구에게나 이런 느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십자가의 고통을 쏟아내셨다. 그렇게 “까닭 없이”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기 위해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찢긴 살, 남김없이 쏟아낸 피로 십자가의 극한 고통을 허락하셨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났다. *그렇다면 절대 의심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아무리 내 삶이 고통스러워도 하나님은 결코 나의 대적이 아니시다. 오히려 전적으로 나의 편이시다.
    
    
    
4. 그러니 잠시라도 쉬게 해주십시오! (18~22절)
욥에게 삶은 고통이었다. 그는 죽기를 원했다. 하지만 죽기 전까지 “잠시라도” 하나님께 평안하게 해주시기를 간구한다. 그런데 그가 생각하는 죽음은 영광의 나라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어떤 소망도 갖지 못한 채 절망의 깊은 심연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빨려 들어가는 죽음이다.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 “흑암 같고 무질서하며 빛조차 흑암 같은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죽음이 해방이 아니라 더 짙은 흑암으로 들어가는 것일지라도 차라리 죽음을 바랄 정도로 지금의 고통이 크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의 끝에서 삶의 한계를 분명하게 느끼며 신음하고 있다. 지금 살고 있는 것 자체가 죽은 것이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죽음은 결코 고통의 면제나 해방이 될 수 없다. 진정한 안식과 평안은 하나님 안에서 누릴 수 있다. 그렇다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우리에게 생명과 부활을 약속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꼭 붙들며 살아내야 하리라.
    
    
    
나는?
-욥이 학대와 멸시의 하나님이라고 쏟아낸다. 사람과 다른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욥이 악하지 않다는 것을 아심에도 학대하신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빠져나갈 길은 없다고 스스로 이해했다. 하나님께서 욥을 용서하지 않고 그의 허물을 찾고 죄를 들춰 내기로 작정하신다면 그 그물에서 벗어날 인간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욥의 마음에 “왜 지나치게 높은 하나님의 기준을 갑자기 자신에게 들이대서 이런 시련을 겪게 하느냐고 불만을 토로한다. 자신이 악한 사람이 아직 되지도 않았는데 악인들에게나 임할 재난을 당해야 하는지 재판이라도 받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분명 욥 자신이 이런 재앙까지 받을 정도로 악하지 않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자신을 학대하신 것이라고 비난한다. 그런 기준이라면 누구도 하나님 심판의 손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은 없다고 생각한다.
    
    
-욥은 하나님의 창조의 결과이다. 흙으로 빚으셨고 피와 살과 뼈와 힘줄로 친히 만드셨다. 그동안 생명과 은혜를 주셔서 보살펴 주시고 그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셨던 하나님이 이제 욥을 과녁 삼고 고통을 주시는 이유를 알 수 없어 욥은 괴로워한다. 왜 친구들을 군대처럼 보내서 공격하고 단죄하며 자백을 강요하여 고통을 겪게 하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조금이라도 자신을 변호할라치면 하나님이 젊은 사자처럼 욥을 사냥하시고 공포스러운 사나움으로 놀라게 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욥은 더 살고 싶지 않다. 죽음을 기다린다. 그것이 속히 왔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죽음이 그늘진 땅으로 광명이 없는 흑암이지만 지금 당하는 고난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부디 그 죽음에 이르기 전에 잠시라도 평안하기를 간구한다. 스올로 내려가면 하나님께 불평도 할 수 없고 찬양도 할 수 없으니, 여기서나마(잠시나마) 다 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한 것이다. 그의 고통은 이처럼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주님, 욥이 하나님 앞에서 가감 없이 쏟아내는 탄원이 부럽습니다. 나는 주님에게 이렇게 토로해 본 적 있나요?
*주님, 욥의 정직한 토로가 오히려 의미심장합니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앞에서 이처럼 마음의 상태를 정직하게 토로하는 신앙이 부럽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이처럼 희로애락을 정직하고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 쏟아놓고 싶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이가 행할 수 있는 신앙고백과 같음을 깨닫습니다.

Leave a Comment

매일성경 묵상

스데반의 설교_모세 이야기 [행 7:17-36]

스데반은 출애굽의 이야기 가운데 중요한 대목을 요약하는 방식으로 모세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는 모세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바로 공주의 아들로 입양된 이야기로 시작하고, 청년 시절 애굽

자세히 보기 »
매일성경 묵상

2차 투옥과 하나님의 적극 개입 [행 5:12-26]

산헤드린 공회의 엄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은 솔로몬의 행각에 모이고 하나님은 사도들의 사역을 통해 지속적으로 표적과 기사를 일으키신다. 이에 시기로 가득한 사두개인들은 사도들을 다시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