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엘리바스와 빌닷과 다름없는 소발의 충고 [욥 11:1-20]
 – 2023년 11월 15일
– 2023년 11월 15일 –
엘리바스와(4~7장) 빌닷에(8~10장) 이어 두 친구와 함께 밤낮 이레 동안 욥의 곁에서 있었던(2:11~13) 소발이 욥을 향하여 변론한다. 특히 소발은 욥이 악에서 떠나 회개하라(8:5~7)는 인과응보 원리에 문제를 제기하며 하나님을 향해 질문하고 변론하는 것을(9~10장) 함께 듣고 있다가 본 장에서 충고하게 된다.
 
소발의 발언도 엘리바스나 빌닷과 구조와 형식, 내용에 있어서 유사하다. 특히 8장의 빌닷의 논리와 상당히 닮았다. 세 친구는 각각 독립된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 사람의 입을 통해 규범적 지혜의 주제들이 표현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소발의 말에서 주목해야 할 지혜는 인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크심을 인과응보의 원리와 연결하는 점이다. 반면 욥은 하나님의 놀라우심을 인간의 이해 불가능성과 연결했던 점에서 차이가 난다. 소발은 욥이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하는 변론을 듣고 사람이 다 알 수 없는 지혜의 신비가 있음을 언급하며, 하나님의 지혜의 깊이와 오묘함을 나타내고 있다. 욥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할 때 고난 속에서 진정한 회복이 일어남을 강조한다.
 
 
 
1. 욥의 무죄 주장에 대한 책망(1~6절)
엘리바스와 빌닷과 욥의 대화를 듣고 있던 소발은 자신은 의로워서 무죄하다고 결백을 주장하는 욥(9:20-21; 10:7)을 향하여 그가 헛된 말을 많이 하고 지혜를 알지 못하여 조롱하는 어리석은 자라고 책망한다. 소발은 전통적 교리의 원칙인 인과응보의 원리를 적용하여 “내 도는 정결하고 나는 주께서 보시기에 깨끗하다”라고 한다. 스스로 온전하다고 항변하는 욥의 태도를 책망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욥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여 주시기를 원한다.
 
하나님께서는 오묘한 지혜로 헤아릴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며 욥은 그 지혜를 다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지혜 비밀을 인정하지 않고 또 깨닫지 못하여 스스로 무죄하다고 주장하는 욥의 태도가 그의 어리석음과 하나님 앞에서의 죄인인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았다. 욥이 겪고 있는 일이 부당해 보이나,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될 때 자신의 죄악을 깨닫게 되고 자신이 당하는 고난은 자신의 죄보다 가벼운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소발은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하는 욥을 오히려 말 많은 어리석은 자로 취급한다. 그는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헤아릴 수 없는 지혜의 신비를 강조하며 인과법칙에 저항하는 욥을 책망한다. 현재 욥이 받는 고난은 그가 지은 죄에 비해 가볍다고까지 하면서, 더 심하게 받을 벌을 적게 받았으니,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욥이 하나님께서 벌하고 계실 때 저항하지 말고 감춰진 죄가 무엇인지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소발은 매우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지혜와 오묘함과 광대함을 강조하면서 정작 자신은 좁디좁은 인과법칙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나는 어떨까? 오묘하고 광대한 하나님의 지혜에 대하여 열려 있다고 할 수 있을까?
 
 
 
2. 하나님의 오묘한 지혜(7~12절)
소발은 하나님의 지혜는 오묘하여 측량하지 못하며 사람의 한계로는 완전히 알 수 없음을 “어찌 알겠느냐?”라는 전통적인 지혜 교사의 가르침의 형식을 사용하여 욥에게 말한다(7, 8절). 특히 하나님의 지혜는 하늘보다 높고, 스올보다 깊고,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다(8, 9절)고 표현한다. 하나님의 지혜는 높이와 깊이와 길이와 넓이에서 무한하시다. 그런데 욥이 이런 전통적인 가르침인 인과응보에 대해 항변하고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으며, 고난을 불평하는 모습에 대해 하나님의 지혜 비밀과 대조하여 그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또, 무한한 지혜를 가지신 하나께서는 어리석은 자의 행동과 악을 행하는 자도 다 보고 알고 계신다고 말한다(10~11절).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재판을 여시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지혜 앞에서 어리석은 자와 악한 자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소발은 욥도 이러한 죄인 중의 한 사람이므로 하나님 앞에서 죄가 드러나 지금의 고난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욥의 고난이 사람의 한계로는 다 알 수 없지만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뛰어난 지혜로 하시는 일이기에 부당하다고 할 수 없고 욥의 고난은 하나님의 지혜로 판단된 욥의 죄에 대한 정당한 결과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렇기에 욥이 받는 고난이 까닭 없이 주어진 것이라며 불평하는 것에 대해 고집이 세고 미련한 동물의 대표 격인 들나귀에 비유하여(12절) 머리가 빈 어리석은 자의 행동처럼 지각없고 고집 세고 미련한 행동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의 오묘함 앞에서 한계를 지닌 인간이 죄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고 권고한다.
 
*하나님은 측량치 못하는 높고, 깊고, 길고 넓은 지혜를 가지신 분이기에 하나님의 행하심을 우리가 다 알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다. 지금의 고난이 부당하게 여겨질지라도 하나님의 지혜 앞에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어리석고 길들지 않은 들나귀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하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3. 그렇기에 회개하라! (13~14절)
소발의 충고도 결국 인과응보의 논리 귀결인 회개함으로 돌이키라는 것이다. 소발은 욥에게 먼저 그가 행하는 잘못된 태도(13절)와 잘못된 삶(14절)에 대해 진정으로 회개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욥이 친구들에게 그들이 악을 행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자신은 불의하지 않다고 말했으나(6:29~30), 소발은 욥의 그런 태도와 행동이 불의하니 회개함으로 돌이키라고 말한다.
 
그리고 욥이 취해야 할 회개의 방법을 네 가지로 충고한다. 먼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정하라고 말한다. 이는 사람의 생각과 마음에 따라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마음을 고정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둘째, 하나님을 향하여 손을 들라고 말한다. 이는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라는 것이다. 인간 이해의 한계 속에서 탄식하고 항변하는 것을 그치라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진정한 도움의 근원임을 믿고 그의 도우심을 바라라는 것이다. 셋째는 손에 죄악을 소유하고 있다면 버리라고 말한다. 이는 욥의 행동 속에 있는 죄악된 모습을 즉각적으로 멀리하는 것이 죄를 회개하는 모습임을 말하는 것이다. 마지막 넷째는 불의가 장막에 거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소발은 욥이 가족들을 잃게 된 것은 불의가 욥의 집안 가족들 안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전제하에 불의한 모습에서 회개하라는 것이다.
 
 
 
4. 회개하면 회복된다! (15~20절)
“만일 ~하면 ~하리라”는 조건절을 통해 회개하라고 촉구한 소발은 회개하고 돌아오면 받을 수 있는 축복을 열거한다. 그런데 15~17절은 10장에서 욥이 친구들에게 항변할 때 말한 것을 다시 인용하여 욥에게 되돌려 말하고 있다.
 
욥이 회개하면 이전에는 의로울지라도 얼굴을 들지 못했고(10:15~16), 흠 없는 얼굴로도 무죄함을 인정받지 못하고 두려워했으나(10:28~29; 3:25), 회개하면 흠 없는 얼굴을 들게 되고 두려움이 없게 될 것이다(15절). 욥이 겪는 환란(3:10, 20)은 물이 흘러가듯 잊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15절). 또 욥은 자신의 생명이 어둡고, 흑암과 같은 죽음을 향하여 가고 있다고 여겼으나(10:21~22), 생명의 날로 대낮보다 밝을 것이고 아침과 같을 것임을 제시한다(17절). 욥이 평안함과 안식, 소망이 없는 삶(3:26; 6:11~13; 7:6)을 살며 밤에도 잠 못 이루는(17:3~4) 탄식 속에 살지만, 회개하면 희망이 있게 되고, 안전하고, 평안히 쉬게 될 것이며(18절), 누워도 두려울 자가 없고, 많은 사람이 네게 은혜를 구하게 될 것이라며(19절) 강력하게 회개를 촉구한다.
 
회개하면 이렇게 축복을 받게 되지만, 그러나 회개하지 않는 죄인의 결국은 눈이 어두워지고 도망갈 곳이 없이 죽음만 있을 것임을 결론적으로 말한다(20절). 욥이 자신의 고난에 대한 항변과 불평들을 그치고 하나님의 지혜 앞에 잘못된 태도와 행동을 회개할 때만이 그 모든 문제에서 해결 받을 것이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나는?
-소발이 보기에 욥은 말 많고 자기 의를 주장하는 뻔뻔함이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욥의 교만한 입을 막아주시기를 바랐다. 소발의 눈으로 보면 욥의 교만함에 비해 그가 받은 고난이 크지 않게 보였다. 그가 토로하는 탄식과 항변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소발은 욥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온전한 사람임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욥은 이유 없이 고난을 겪고 있는 것이 분명함에도 수다쟁이로, 뻔뻔한 사기꾼으로 치부된다면 그의 마음이 어떨까? *적절하지 못한 권면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상처로 힘들게 할 뿐이다.
 
*목회하다 보면 상대방이 듣기에 억울한 권면을 할 때가 있다. 그것도 아주 나중에야 그것을 깨달을 때가 있다.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른다. 욥을 묵상하며 더욱 과거의 그런 일들이 나를 이불을 차게 만든다. 아…. 그래서 목회는 정말 어렵다. 오늘의 말과 행동이 평생 나를 따라다닌다. 그러니 말하지 않으면 좋겠지만…. 에고야 나는 말을 해야만 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말을 주셨으면 좋겠다.
 
*어제 교역자 직원 모임에서도 내가 했던 말이 걸린다. 언젠가 그 말이 비수가 되어 나를 찌를 것으로 생각하니 나의 경솔함에 또다시 고통스럽다.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과 입술에 적절한 지혜와 절제를 주셔서 언행이 제어되면 좋겠다…. 제발….
 
 
-소발은 하나님의 지혜는 하늘보다 높고 스올보다 깊어서 어떤 사람도 그 지혜를 결코 다 헤아릴 수 없다”라고 했다. 하나님의 판단은 늘 공의로우시기에 누구도 그 판단에 토를 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욥은 마치 들나귀처럼 교만하여 하나님의 이 깊은 지혜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불평까지 한다고 비난한다. 소발의 말한 대로 하나님의 지혜가 깊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욥이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지 못해서 자기 죄를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었다. *소발의 문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모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대상이 어떤 상태인지를 분별하지 못하고 있다.
 
*주일 말씀을 준비할 때 내가 혹시 소발과 같은 시각을 갖고 준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더온누리교회 성도님들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을까? 막연하게 선입견을 품고만 있는 것이 아닐까? 전체 성도 중에 심방을 통해 교제하고 대화를 나눈 성도가 얼마 되지 않는다. 나는 성도님들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미치니 답답하다…. 속이 꽉 얹힌듯하다…. 이때 필요한 소화제는 만남과 교제, 대화일 것인데, 요즘은 소화제 구하기가 어렵다…. 에고야…. 그래도 이리저리 찾아다녀야겠지?
 
*잘못된 진단에서 오는 말씀은 비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해하고 공감된 진단에서 오는 말씀은 쓰디써도 양약이 될 것이다. 나는 쓰더라도 양약이 되는 말씀을 준비하기 위해 먼저 성도님들의 삶을 부지런히 살펴야 하겠다.
 
 
-소발은 욥에게 “만일 지금이라도 회개하면 새로운 세상에서 생명의 안식을 누릴 것이지만,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다면 남은 한 조각 생명의 소망마저 잃게 될 것”이라고 처방한다. 죄를 지으면 회개해야 한다는 명제는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런데 이 처방이 엉뚱하게 발행되었다. 아무리 좋은 명약이라도 맞지 않는 사람에게 투약되면 심각한 부작용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욥을 향한 소발의 권면은 “맞는 말, 적합한 처방”인 듯 주었지만, 오히려 욥의 마음에 더 큰 상처가 남게 했다.
 
*말씀을 잘 해석하는 것도 중요하나, 그 말씀을 정확한 대상에게 바르게 적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고 전달하느냐에 따라 말씀을 듣는 사람에게 상처가 될 수도, 생명의 위로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말씀을 준비할 때마다 “주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까?”를 수없이 되뇐다.
 
*말씀을 해석하고 전할 때 하나님의 자리에서가 아니라 사람의 자리 성도의 자리로 겸손하게 내려와 공동체의 상황을 바르게 인식하고 성도의 아픔에 공감하며 생명의 양식으로 말씀을 전해야 하겠다. 주님께서 나를 이런 말씀 사역자로 다듬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결국 소발을 비롯한 엘리바스, 빌닷의 한계는 공감 능력 부족이다.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은혜”란 원인 되는 행위 없이도 놀랍고 감사한 결과가 주어지는 것이다. 심지도 않았는데 거둔다. 때지 않았는데 연기가 나는 것이다. 빈 항아리에 물을 부었는데 포도주가 되는 것이다(요 2:1~11). 이런 원리를 바울은 “값없이 의롭게 되었다”라고 말했다(롬 3:24). 분명 규범적 지혜 그 너머의 실제이다.
 
*규범적 지혜는 콩 심는 데 콩 나는 것이다. 착하고 의로운 사람이 존경받고 부지런한 사람의 살림이 풍족한 것이다. 사계절과 밤낮의 이치를 잘 알고 그에 걸맞게 살면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하지만 사탄이 욥을 향해 해를 가하는 무기도 규범적 지혜였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복을 베푸셨으니,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니 복을 거두면 경외함도 중단될 것”이라는 논리이다. 사탄의 논리가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이상이 있다는 것이다. 사탄은 그것밖에 몰랐다. 욥의 친구들도 이것밖에 몰랐다. 세상에는 상식을 초월하는 일이 의외로 꽤 있다.
 
*소발의 표현하기 버거운 고난 중에서 탄식하는 욥에게 하는 거친 언행은 도에 지나치고 상스럽다. 틀린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하나 따져보면 다 맞다. 그러나 소발도 역시 1차원적인 원리 그 이상을 보는 눈이 아직 뜨이지 않았다. 욥은 규범적인 지혜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을 직면하며 괴로워하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최소한의 연민의 감정인 공감 능력이 규범적 논리에 함몰되어 버렸다. 사랑이 원칙에 덮여버렸다.
 
*지금 우리는 공감 능력 부재의 시대를 살고 있다. 정치 지도자들은 서민들을 이용만하고 그들의 삶을 공감하지 못한다. 종교 역시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아픈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죄인의 친구가 되어 주셨고 친히 십자가를 지셨다. 심판보다 사랑을 먼저 행하셨다. 규범적 지혜로 정죄하고 판단하시기보다,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삶의 고통을 먼저 이해하셨다. 주님의 마음과 가르침이 새삼 생각하고 절실해지는 아침이다.
 
*가장 기초적인 것부터 공감 능력이 회복되면 좋겠다. 부부관계, 자녀와의 관계부터 회복해 보자.
 
 
 
 
*주님, 늘 말과 행동을 조심하겠습니다. 함부로 생각하고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죽이고 상처를 내는 말씀이 아니라 살리는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주님, 죄인들의 친구를 자처하셨던 주님의 마음을 바라봅니다. 까닭 없이 사랑해 주신 주님의 마음이 제게 더욱 필요합니다. 먼저 헤아려 주신 주님의 마음이 나의 마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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