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그래도 문제의 해결이 하나님께 있다! [욥 16:1-17]
 – 2023년 11월 21일
– 2023년 11월 21일 –
엘리바스는 더욱 원색적으로 욥의 무지와 죄를 비난한다. 욥의 아픔과 고난과는 더욱 멀리 떨어진 원론적인 인과응보론을 설파했다. 결국 고난을 겪는 사람이 그 고난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욥은 친구들의 지혜가 깊은 고난을 겪어 보지 않은 자들이나 할 수 있는 소리라고 비난한다. 그리고 최소한 자신의 고통에 집중하고 공감해 달라고 요청한다. 16~17장은 완전히 무너지고 부서져서 깨어진 욥의 아픔이 절절하게 묘사되고 있다. 욥은 엘리바스가 자신을 이해하기는커녕 악인(포악자)으로 간주하여 말하는 그것에 상처받는다. 이에 엘리바스에 대하여 “재난을 주는 위로자”라고 표현한다. 그러면서도 욥은 여전히 자신의 무죄를 주장한다.
    
    
    
1. 친구들에 대한 욥의 원망(1~6절)
16~17장은 15장에서 엘리바스가 주장한 말에 대한 욥의 답변이다. 욥은 엘리바스의 말을 다 들은 뒤에 친구들을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1절)”이라고 표현한다. 친구들의 입장이나 욥의 입장이 잘 나타난 표현이다. 친구들은 자신들이 욥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좀 더 나은 상황을 기대하며 유익한 충고하는 위로자들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욥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도 공감해 주지 못하며 죄인으로 몰아붙이는 또 다른 재난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엘리바스가 자기 말을 헛된 지식(15:2)이라고 한 것을 그대로 다시 사용하여 엘리바스의 말에 대해 “헛된 말이 어찌 끝이 있으랴”(3절) 라고, 반박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반대로 친구들이 이런 상황이었다면 위로의 말로 힘을 주고 고통을 풀어주려고 했을 것이라고 말한다(4~5절). 4절의 ‘머리를 흔드는 행동’은 동정이나 조롱의 이중적인 의미로 사용하여 자신도 동정의 뜻으로 머리를 흔들 수 있지만, 지금 자신은 친구들의 그런 행동이 오히려 조롱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의미이다. 욥은 친구들에게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닌 자기 말을 들어주고, 공감해 주며 위로해 주는 것이라고 항변하는 것이다.
    
6절에서 욥은 말하는 것이나 침묵하는 것 모두 자신의 고난을 조금도 줄이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결국 말하는 편을 택했다고 했다. 침묵으로 참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욥은 말을 통해 자신의 심정을 하소연하며 친구의 공감과 하나님의 관심을 끌려도 하는 것이다.
    
    
    
2. 하나님이 나를 치셨다! (7~14절) 
욥은 자신의 재앙이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세 가지로 표현한다. 먼저 하나님은 자신을 쇠하게 하시는 분이라고 했다(7~8절). 하나님께서 자신을 병들게 하시고 자신의 온 집안을 파괴하셨다고 고백한다. 자녀들은 죽고 아내가 떠나므로 가정이 파괴되었을 뿐 아니라 자신을 지지하고 존경해 주던 친구들마저 이제는 자신을 악인이라고 규정하고 비난과 정죄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욥은 이런 자기 모습을 “주께서 나를 시들게 하시므로 그것이 증거가 되며 나의 파리한 모습이 나를 대항해 일어나 내 얼굴에 증언(새번역_8절)”한다고 토로한다. 이와 같은 표현은 전통적인 규범적 지혜에서는 의인은 복을 받고 죄인은 벌을 받는다는 것을 기계적으로 적용하여 눈에 보이는 현상적으로 부유하면 의인이고 병들고 실패하면 죄인이 벌을 받은 것으로 판단하는 친구들에 대한 비판이다.
    
9~11절에서 욥은 하나님을 진노하신 하나님으로 표현한다. 욥에 대한 공격이 더 심해져서 마치 사자나 늑대가 먹이를 공격하는 것처럼 혹은 원수를 대하듯이 욥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이처럼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욥을 노려보시는 것이 사자가 먹잇감을 죽이려고 노려보는 것으로 연결하여 그의 두려움을 더욱 생생하게 표현한 것이다. 인간 대적자들도 “사람들이 나를 향해 자기들의 입을 크게 벌리고 조롱하면서 내 뺨을 때리고 나를 치기 위해 함께 몰려드는구나.” (새번역_10절) 라고 표현한다. “입을 크게 벌린다”라는 것은 입을 활짝 벌리고 웃는 모습으로 조롱한다는 의미이다. 대적자들은 조롱하고 비난하며 욥을 대적하기 위해 모여들고 있다는 것이다. 욥은 하나님께서 이런 원수들(경건치 않은 자들)과 악인들에게 자신을 넘겨주었다고 참담해한다(11절). 욥은 하나님과 원수들이 모두 자신을 공격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다.
    
12~14절은 9절에서 노려보시던 하나님이 직접 욥과 전쟁을 하시는 것으로 표현된다. 욥은 자신이 당한 재난이 하나님의 “잔인한 공격(12~13절)” 때문이라고 표현한다. 12절에서는 하나님이 나를 꺾으시며, 부서뜨리시며, 과녁으로 삼으셨다고 표현하고, 13절에서는 자신을 과녁 삼고 아낌없이 화살을 쏘아대시는 궁수로 표현했다. 그 화살들이 콩팥(킬야)을 꿰뚫고 쓸개가 땅에 쏟아지게 하였다고 했다. 고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콩팥이 가장 예민하고 중요한 장기로 여겼고 “정서와 감정이 자리 잡은 부분”으로 이해했다. 콩팥을 꿰뚫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욥의 육체뿐 아니라 감정까지도 공격하셔서 깊은 절망과 공포, 분노 등이 일어나 매우 힘든 상태임을 토로하는 표현이다. “쓸개(메라라)”는 쓸개즙을 의미하는데, 깊은 고통을 의미한다. 쓸개즙이 땅에 쏟아졌다는 것은 모든 고통을 쏟아내고 있는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자신을 모든 고통이 쏟아질 때까지 공격하고 계신다고 토로하는 것이다. 14절에서 하나님이 “용사같이” 자신에게 달려든다고 한 것은 엘리바스가 지적한 것처럼 자신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달려들고(15:26)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맹렬히 공격하시며 달려들고 계신다고 항변하고 있다.
    
15~17절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치셨으므로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를 묘사한다. 베옷을 입었다는 것은 슬픔과 탄식의 상태이고, 뿔이 땅에 처박혔다는 것은 명예와 권세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을, 울음으로 얼굴이 붉다는 것은 너무 많이 울었다는 것을, 눈꺼풀에 죽음의 그늘이 있다는 것은 눈을 못 뜰 정도로 탈진하고 기운이 없어 곧 죽으리라는 것을 표현한다. 그럼에도 욥은 담담히 고백한다. “그러나 내 손에는 포학이 없고 나의 기도는 정결하니라” (17절). 즉, 자신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이다. 끝까지 떳떳하고 담담하게 자신의 무죄와 정결함을 주장한다.
    
    
    
나는?
-누구나 아는 지혜로 쉽게 충고하는 것이 위로가 될 수 없다. 친구들의 말은 욥도 이미 잘 알고 있는 말이었다. 욥은 그런 지혜로 자신의 현실을 설명할 수 없어서 괴로웠다. 고난의 문제를 단순한 상식적인 지혜로 설명하고 훈계하려는 친구들의 시도 자체가 이미 상처를 헤집어 더 심한 고통을 가하는 폭력과도 같았다. 그런 친구들을 향해 처지를 바꾸어 생각해 보라고 답답해한다. 비난과 조롱의 말을 쏟아낼 때 이를 듣는 마음이 어떠할지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로 함께 살아내는 우리에게 새겨들어야 할 욥의 강변이다.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이에게 백 마디의 지식적인 말보다 마음을 공감해 주고 함께 아파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마치 원수처럼 대하신다고 토로한다. 가족을 망하게 하고 자신을 죽어가는 몰골로 만들어 사람들 앞에 자신이 죄인인 것의 증거로 삼으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셨기에 사람들이 조롱하고 짓밟았다고 항변한다. 욥이 하나님께 대적하고 대항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대적하여 용사처럼 공격하셨다고 주장한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비참함과 하나님께 징벌받았다는 모욕을 함께 당하는 욥의 처참한 심정이 날것 그대로 쏟아져 나온다.
    
-참담한 고난 중에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고 왜 자신을 이토록 비참한 지경으로 떨어뜨리셨는지 이해할 수 없을 때 욥은 하나님께 정직하게 그 마음을 날것 그대로 토로하며 매달린다. 그만큼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방증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치열하게 인내하는 그 시간이 쌓여 장성한 신앙으로 성숙한 열매로 인생 나무에 열매 맺힌다.
    
-욥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낙망하지 않고 자신의 무죄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실함을 주장한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쉬운 선택을 하지 않고 비록 죽음이 문턱에 닥쳐와도 자신의 마음을 속이지 않는다. 내가 본받아야 할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한 마음이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이고 진실한 관계라면 정직하게 마음을 열고 그 앞에 당연히 나아간다. 정직한 표현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공허한 위로에 상처받지 않아야 한다. 구구절절 옳은 말로 가르치려 드는 친구들이 많은 말을 쏟아내지만, 욥은 전혀 위로받지 못했다. 입에 발린 말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식적인 지혜로 해답을 찾을 수 없는 자신의 현실이었기에 더욱더 괴로웠다. 말하면 할수록 가시 돋친 말로 고통만 가중했다. 이런 상황에서 욥은 그런 말은 이제 그만하고 처지를 바꾸어 생각해 보라고 담담히 토로한다.
    
*나는 어떨까? 상대의 상황과 마음을 전혀 공감하지 못한 채, 입술로만 위로하거나, 위로를 가장하여 비판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을까? 공허한 위로만 남발하는 목사가 되지 말아야지…. 공감하며 위로해 주는 친구가 되어줘야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이해할 수 없는 처사에 분노하며, 모욕감과 수치심을 감추지 않는 욥의 모습이 도전된다. 마음의 고통을 토로하는 것은 불신앙이 아니다. 속마음을 감추지 말고 정직하게 토로하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가! 때로 우리에게는 하나님과의 갈등의 시간이 있어야 한층 더 성숙해진 관계로 다져지지 않겠는가? 하나님과의 갈등을 회피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욥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깊은 슬픔과 눈물로 세월을 지새웠다. 맨살에 베웃을 걸치고 통곡했다. 얼마나 울었던지 얼굴은 붉어졌고, 눈 밑은 검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러나 끝까지 자신은 무죄하다고 항변한다. 자신은 폭행을 저지른 일이 없었고, 자기 기도는 언제나 진실했다고 주장한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떳떳함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그만큼 욥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고 정직하며 경건했다(1:1).
    
*고통스러운 일에 직면하게 되면 세상과 사람들이 정해놓은 답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을 때가 있다. 당연하다고 여겨지던 대답들은 전혀 공감되지 않는다. 그럴 때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정직한 마음으로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과 씨름하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씨름하는 것을 소홀히 하면 안 된다. 그래도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에게 있다.
    
    
    
*주님, 욥은 끝까지 하나님께 해결을 구합니다. 사람과 세상이 정해놓은 전통과 지혜에 타협하지 않습니다. 제게도 하나님을 이토록 신뢰하는 마음, 기대하고 의지하는 마음이 굳세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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