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답정남 빌닷, 무례한 빌닷 [욥 18:1-21]
 – 2023년 11월 23일
– 2023년 11월 23일 –
엘리바스와 욥의 대화(15장~17장)가 끝나고 빌닷과 욥의 대화(18~19장)가 시작된다. 세 친구와의 대화(3~31장) 중에서 두 번째 사이클(15~21장) 중이다. 본문 전체가 빌닷의 말이다. 8장 이후 욥을 향한 두 번째 발언이다.
 
빌닷은 욥에게 악인들의 최후에 대하여 설명한다. 그들은 한때 형통할 수 있지만 결국에는 패망하고 죽는다. 그들에게 임하는 재앙은 두려움과 질병을 비롯하여 가옥을 뺏기고, 대(代)가 끊기며, 사람들의 구설에 오르내리다 죽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들에게 임한 재앙을 보고 “악인의 최후”라는 예를 삼을 것이라고, 말한다.
 
빌닷은 엘리바스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원색적으로 욥을 공격한다. 빌닷의 두 번째 발언의 특징 중 하나는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8:7)”와 같은 미래 소망이 없다는 점이다. 그의 발언 핵심은 고통을 겪는 것이 곧 죄가 있음을 증명한다는 것으로, 악인이 맞이하게 될 운명 혹은 귀결에만 집중한다. 그는 욥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려고 집중한다.
 
 
 
1. 욥은 자신을 스스로 망치고 있다(1~4절).
빌닷은 엘리바스나 소발과의 대화를 들으며 욥이 여전히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고 하나님의 통치에 의문을 가지고 있는 모습에 불만이 찬 듯 보인다. 빌닷은 가감 없이 욥이 악인처럼 이런 주장을 계속한다면 악인에게 주어지는 피할 수 없는 비참한 결과가 그의 앞에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빌닷은 욥이 절제와 지혜 없이 분노로 자기 자신을 찢으며 울분을 터뜨리고 있다고 느꼈다. 욥에게 언제쯤이나 말을 그치고 자기와 친구들이 하는 지혜의 조언을 듣겠냐고 나무란다. 빌닷은 욥이 자기와 친구들을 짐승처럼 부지하고 말 못 하는 자로 여기는 점을 지적하며(4절_참고_17:10) 그 생각이 아주 잘못되었다고 언급한다. 그리고 욥이 말을 자제하고 화를 가라앉히며 지혜로운 자신과 친구들의 말을 들어보라고 반박한다. 동시에 하나님이 욥을 구하기 위해 땅을 버리거나 바위를 다른 데로 옮기는 등 자연의 질서를 바꾸시지 않는다고 말한다(4절 하_너 때문에 땅이 버림을 받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겨지겠느냐?). 욥이 자기 죄의 결과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에 따른 결과이므로 욥이 무엇을 하든지 변경될 수 없다는 의미이다.
 
 
 
2. 악인의 운명은 분명하다(5~21절).
빌닷은 욥을 향한 불만을 그치고 5~21절에 이르도록 악인의 최후에 대해 언급하며 욥을 향해 지혜로운 조언을 주려고 한다. 빌닷이 정의하는 악인은 불의를 행하며 하나님을 모르는 자(21절)이다. 그는 욥이 이 범주에 들어간다고 여기며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계획하신 비참하고 끔찍한 결말을 강조하며 욥에게 경고한다.
 
5~6절에서 빌닷은 악인에게 생명과 풍요로움과 기쁨이 빛과 불꽃처럼 빛나고 있다고 하더라도 얼마 안 가서 심판받게 될 것이므로 그 빛을 다 잃고 망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빛은 욥에게서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장막과 그에게 영향을 주는 것에서도 사라져 어둠만을 남길 것이라고 했다.
 
7~10절은 이와 같은 악인의 재앙이 먼저 자신에게 미친다는 것을 지적한다. 악인 활기 있게 활동하며 형통한 삶을 누리는 것은 잠시이며 곧 시들해지리라는 것이다. 또한 자신이 세운 계획인 스스로 올가미(덫)가 될 것이므로 처음에는 발뒤꿈치와 같이 한 부위가 걸린다 해도 나중에는 그의 온몸이 걸려 나올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를 잡을 덫이 땅에 숨겨져 있고 그를 빠뜨릴 함정이 길목에 있기” 때문이다. 즉, 가는 길마다 있기 때문이다.
 
11~19절은 빌닷이 악인에게 임할 재앙과 사망에 대해 자세하게 열거하는 부분이다. 먼저 악인에게 ‘무서운 것이 사방에서’ 그를 쫓을 것이다(11절). 기근으로 쇠하여지고 재앙이 기다릴 것이며(12절), 질병이 임하여 고통스럽게 죽을 것이다(13절). 특히 욥의 악창과 관련하여 재앙이 피부 조직을 먹어 삼키고 ‘사망의 장자’가 악인의 온몸에 침투하여 결국 다 썩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사망의 장자’라는 표현은 고대 세계에서 어떤 사람에게 장자는 그 사람의 황금기에 낳은 첫 아이이므로 그의 생애에 가질 수 있는 최고의 힘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장자가 “사망”의 장자이므로 “죽음을 초래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자”라고 할 수 있다. 이 장자가 누구에게 다가가든 그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빌닷은 악인의 재앙이 자신뿐 아니라 그의 집과 가산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14~16절). 악인이 의지하고 살던 장막이 뽑혀 온 간데없이 사라지고 악인 자신은 공포의 왕인 죽음에게 잡혀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장막에는 다른 사람이 와서 거하게 된다. 그의 옛 처소에는 유황이 뿌려져 그 장막이나 그 안에 있는 어떤 것도 다시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17절은 악인의 재앙이 그의 명성에도 영향을 끼치는데, 악인이 재앙을 당하여 다 죽을 것이므로 사람들은 누구도 그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이름은 다음 세대에 기억되지 않는다.
 
빌닷은 결국 악인의 종착역이 죽음임을 분명하게 밝히며 강조하는 것이다. 악인의 재앙은 자기 자신에게만 미치지 않고 그의 가족과 그의 장막에 함께 거하던 자들에게도 임한다(19절). 악인의 후손은 다 죽어 그 대가 끊어지게 될 것이며 그와 함께 기거했던 자 중 살아남은 자가 없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20~21절은 악인 살아온 세월과 그의 최후가 그와 그의 측근에게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이에게 알려질 것이라고 했다. 동서남북 어느 곳에서 오든 이 악인이 어떤 날을 보냈는지 알고 경악하게 될 것이다. 오가는 사람들이 악인의 결말이 그의 불의와 하나님을 알지 못함에 있음을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도록 악인의 추악한 삶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심판이 명백히 드러날 것이다. 사람들은 이들의 최후를 보면서 “불의한 자의 장막이 이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의 처소가 이러하다”라고 일컬으며 교훈을 삼는다.
 
 
*빌닷은 사람들의 악인에 대한 평가를 통해 악인을 불의한 자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로 정의한다(21절). 사람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이루고 지속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추구하시는 정의를 따라 행하지 않게 되어 결과적으로 불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빌닷은 욥에게 악인이 당할 비참한 최후를 말해주며 욥이 집과 자식과 건강을 잃고 여기까지 왔으나 이제 자신의 경고를 듣고 지혜롭게 행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나는?
-빌닷은 욥이 스스로 분을 이기지 못하고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고 공격한다. 욥의 말과 행위는 짐승 같은 행위하고 빗댄다. 발닷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질서는 전혀 문제가 없는데 욥이 그것을 문제 삼아 전통을 뒤집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 지식과 교훈을 거부하는 욥을 이성을 잃어버린 악한 자로 규정하며 비난한다.
 
-빌닷은 전통적인 지식, 규범적 지혜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고난 중에 있는 자를 불쌍히 여기는 기본적인 태도를 갖추지 못했다. 다른 이들을 판단하기 전에 나의 말과 태도를 먼저 점검하는 것이 기본 중의 기본이다.
 
 
-욥이 고난에 처한 것에 대하여 다양한 원인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빌닷이다. 빌닷은 자신이 알고 있는 규범적 지혜의 테두리 안에서 욥을 악인으로 단정하고 만다. 그리고서 악한 자의 운명에 빗대어 욥을 저주한다. 그리고 욥의 상황이 악한 자의 운명과 얼마나 일치하는지, 그리고 그 결국은 어떻게 되는지를 자세하게 설명한다.
 
-악인과 그의 집이 빛을 잃게 될 것이며, 악인은 자기 꾀에 빠져 넘어질 것이며, 기근과 재앙으로 쇠하고, 죽음이 그 집안을 엄습하여 안식하던 곳이 초상집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또 그의 이름도, 그의 자손도 끊어져 없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빌닷이 말하는 악인의 운명이 욥이 당하는 고난과 일치하는 것을 보면서 내린 결론이다. 그렇기에 계속해서 하나님께 불의하게 행한다면 비참한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잃고 살 소망조차 잃어가는 친구에게 하는 빌닷의 말은 어떤 물리적인 폭력보다 더 잔인하다. 그런데 이런 잔인한 고난을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도 당하셨다. 자기 백성을 위해 지신 십자가는 어떤 이들에게는 저주의 증거였고, 조롱거리였다. 마땅히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할 자들에게서 수치와 모욕을 당하셨다.
 
-위로를 기대한 사람들에게서 오히려 더 큰 고통을 경험할 때, 우리보다 앞서 온몸으로 그 고통을 겪으신 주님을 묵상하며 인내하며 나아가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구하여야 하겠다.
 
 
*적반하장 : 빌닷은 엘리바스와 소발 두 친구를 나무란다. 왜 욥에게 곱게 말하여 욥이 못 알아듣게 하느냐는 것이다. 할 말은 똑바로 해서 욥이 회개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논리다. 그야말로 “적반하장”이다. 욥은 친구들의 충고 때문에 죽음의 고통을 겪고 있음을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 자신들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더 강하게 말해야겠다는 마음이 참 곤란하다.
 
*악인의 운명을 열거하며 욥에게 회개를 촉구한다. 악한 자는 스스로 자기 올무에 빠진다. 그리고 두려움이 임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욥은 하나님께서 악인의 꾀에 빛을 비추시고 선히 여기신다고 불평했었다(10:3). 빌닷의 말은 욥의 토로조차 꼼꼼하게 경청하지 않고 자기 지식과 주장만을 고집하는 말이었다.
 
*고난 가운데 있는 이를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특히나 자신의 견해와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상대를 비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자신의 의견과 경험을 절대적으로 여기며 주장하려는 태도는 오만한 것이다. 내가 철칙처럼 믿고 있는 바가 틀릴 가능성이 있음을 열어 두어야 한다. 잣대로 판단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돌아보아야 하리라.
 
*빌닷은 단정하는 것에 익숙했다. 자신의 지식과 지혜에 근거한 것이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하려는 태도보다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고 문제의 원인을 단순화하며 회개를 강요하는 모습이다. 함부로 단정하는 것에 너무도 익숙한 오늘날 목회자의 표상처럼 보인다. 아…. 이런 목회자를 만나게 되는 성도들은 얼마나 답답하고 곤혹스러울까….
 
*무례하게 주장하려는 빌닷의 모습에서 목사의 모습이 진하게 비친다. 그래서 긴장이 된다. 단정하는 것과 무례함이 쉽게 나오지 않기를 제어하고 제어해야 하겠다.
 
*빌닷의 일방적인 주장에 숨이 막혔을 것 같다. 주관적인 자기 판단과 자기 원칙에 따른 일방적인 주장이 계속된다.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들은 도무지 모든 것을 잃고 살 소망조차 잃은 친구에게 할 소리가 아니다.
 
*자기 의에 충만하고 극단적인 생각에 사로잡힌 자가 흔히 범할 수 있는 잘못이다. 나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내가 제시한 권면에 대해 모욕적인 반응을 보일 때, 나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은 긍휼과 연민, 온유와 사랑으로 지체들을 대해야 한다. 판단보다 스스로 문제를 발견하도록 도와주고 그가 주님을 만나기까지 곁에서 신뢰감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자기 확신을 갖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절대 신봉하는 것은 곤란하다. 유연한 사고와 개방적인 태도로 편협과 고집의 한계를 넘어야 한다. 더 큰 진리의 지평 안에서 내가 확신하고 있는 진리가 더욱 선명히 눈에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해 뜨는 쪽, 동쪽을 “앞”이라고 생각했다. 오른쪽은 자연스레 남쪽이고, 왼쪽은 북쪽이다. 뒤쪽은 서쪽인데 바다 쪽이라고 불렀다. 시간상으로는 과거가 앞쪽이다. 그래서 자손은 뒤에서 나온다. 현재 우리는 대개 북쪽을 위라고 생각하고, 남쪽을 아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 보면 지구는 우주라는 허공에 떠 있으므로 위아래, 동서남북의 구분이 매우 임의적임에도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왔다. 이런 사고방식에서 나온 고정관념들이 꽤 있다. 남향이 좋고 북향은 나쁘다거나, 오른쪽은 의의 편, 왼쪽은 악의 편이라든가, 남자는 용감하고 여자는 얌전하다거나 라는 식의 사고방식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이와 같은 유대인의 사고방식에 순응하지 않으셨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죄인은 죽어 마땅하다는 일반론에 예외가 있음을 몸으로 증명하셨다. 스스로 죄인이 받는 세례를 받으셨고, 흉악범이 달리는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셨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떤가?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처럼 발상의 전환이 자연스러운 사람들일 것이다.
 
*땅에서의 성공, 잘 살고 높은 지위에 오르려는 인생의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가치를 따라 산다. 자유하게 하는 진리를 따라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한다. 그래서 땅에 살지만, 하늘의 방식으로 산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빌닷의 말은 이작도 땅의 가치관에 매여 있는 사람들의 말과 다름이 없다. 매우 일반적인 지혜로 악인을 규정하며 욥을 비난한다. 욥이 당하는 고난을 보면 그는 악인이 분명하다는 식이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상황과 여건을 보고 그의 삶을 단정하지 않는다. 어제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던 죄인이 오늘은 예수님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 모두가 하늘의 가치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 땅의 가치에 얽매여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지식과 경험, 전통과 유산으로 단정하기에는 인생이 너무도 신비롭다. 신비는 지식과 경험으로 판단하는 대상이 될 수 없다. 겸손히 지켜볼 뿐이다.
 
 
 
*주님, 빌닷의 지혜를 빙자한 폭력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 설교로, 양육으로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칩니다. 흔들리지 않는 확고함은 중요하나, 절대적인 신봉이 될 때 상대방에게 폭력이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 경계를 잘 지키겠습니다.
*주님, 답정남이 되지 않겠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의 정답보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삶의 지혜들을 유연하게 품겠습니다.
*주님, 고정된 관념이 고정된 판단에 얽매이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길에 빠지지 않도록 유연하게 사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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