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나의 대속자가 계시니 [욥 19:1-29]
 – 2023년 11월 24일
– 2023년 11월 24일 –
욥은 빌닷을 비롯한 친구들이 죄 없는 자기를 계속 말로 정죄하는 것에 답답해한다. 욥은 친구들에게 계속 자신을 정죄하려면 그렇게 하라고 한다. 그러나 자신이 현재 당한 고난은 하나님이 자기의 상황을 어긋나게 하심으로서 발생한 결과라는 점을 확실히 알라고 요구한다. 욥은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시고 공격함에 당황하며 더 답답하고 억울해한다.
 
재난당한 후 욥은 그의 형제와 친구 등 자신의 사랑하는 모든 이로부터 조롱받고 소외당하고 있다. 그에게 남은 것은 병들고 마른 몸과 상한 마음뿐이다. 그렇지만 욥은 자신의 무고함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다. 욥에게는 결국 하나님께서 자신의 결백을 변호해 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1. 그대들이 나를 학대한다(1~5절).
욥은 친구들이 자신을 괴롭히고 학대한다고 말한다. 빌닷과 친구들은 상처 입은 친구를 치료하고 보살펴 주는 대신 폭력적인 말로 폭행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비참하게 드러누운 친구를 짓밟아 모욕했다. 욥은 그들을 향해 “어느 때까지” 이 일을 계속할 것인지 탄식하며 묻는다. 설령 친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죄의 결과라도 그것은 하나님과 자신의 문제이기에 친구들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위치에 있지 않다고 항변한다.
 
*상처받은 이웃을 위해 내가 할 일은 고난의 이유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회복과 구원을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이웃에 대해 책임을 감당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이다.
 
 
 
2. 고난 당하는 욥에게 하나님은? (6~12절)
욥의 친구들은 고난의 이유를 욥의 불의함에서 찾는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대적하시기 때문에 고난이 있는 거라고 말한다. 욥은 하나님께서 높은 담과 어둠으로 막으시고 영광을 거두어 가시고, 몸을 쇠하게 하셨다고 토로한다. 욥에게 하나님은 마치 노를 발하시는 원수와 공격해 오는 적군과 같았다. 지금까지 욥이 알던 하나님이 아니었다. 고통 때문에 부르짖는 간구에도 응답하지 않고 귀를 닫으셨다.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단련하신다. 온화하던 모습은 온 간데없고 냉정하게 자녀를 훈육하신다. 자녀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는 아버지가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기도에 침묵하실 때가 있다.
 
하나님이 원수처럼 되셨다고 토로하던 욥도 이 고통스러운 연단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될 것이다. 지금 일어나는 현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어 낙심하고 있는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만 굳게 지키고 있다면 하나님은 이 모든 과정을 통해 결국 선을 이루실 것이다.
 
 
 
3. 친구가 되어 주시는 예수님(13~20절)
철저한 고독 속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친구가 되어 주신다. 고난당한 욥을 위로해야 할 친구들이 욥을 버리고 낯선 자들(외인)처럼 되었다. 대속자의 의무를 다해야 할 가족과 친족들은 욥을 버렸다. 가장 가까이에서 욥과 슬픔을 함께 나누어야 할 아내는 그를 역겨워했다. 종들과 어린아이들조차 욥을 무시하고 조롱하였다.
 
하나님과 이웃들에게 철저하게 버림받은 욥의 고통과 외로움이 어떠할지 상상하기 어렵다. 이런 욥의 고통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철저하게 버림받은 한 의인의 고독과 고통을 가장 잘 보여준다. 우리의 고통을 가장 잘 아시고 위로하시는 주님이 계신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4. 반드시 언젠가는(23~27절)
욥은 자신의 무죄함이 죽은 후에라도 입증되어 하나님을 친근하게 다시 대면하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욥은 현재 자신의 무죄를 변호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고 자기 생이 다해가고 있음을 직감한다. 욥은 누군가 자기 말을 책이나, 바위에 기록하여 죽은 이후에라도 그의 무죄가 밝혀지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이 소망은 대속자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진다.
 
대속자가 자신을 위해 땅 위에 우뚝 서는 날에 그의 무죄가 밝혀질 것이며 그는 하나님을 외인이 아닌 친숙한 분으로 다시 대면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세상의 대속자들이 다 나를 외면할지라도 진정한 대속자이신 예수님께서 신실하게 우리를 보호해 주실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친근하게 그를 대면해 보며 기뻐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욥 친구들의 말은 고통 중에 있는 욥을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형제를 불쌍히 여기고 위로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심판하고 공격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렇게 행하는 자들은 동일하게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나는?
-1~12절에서 욥은 주변으로부터 부당한 공격과 하나님의 부재를 느끼는 답답함 속에서 때로 항변과 탄식 어린 토로로 자신을 표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욥은 친구들이 고난의 이유를 지적하기보다 자신을 위로하고 긍휼히 여겨주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기보다는 폭력적인 말로 매도하며 죄를 자백하라는 추궁을 이어간다. 불행한 삶은 불의한 원인이 있다는 전제하고 있있기 때문이다.
 
-욥은 언제까지 나를 괴롭힐 것이며 말로 나를 산산조각 낼 것이냐고 묻는다. 이미 충분한 모욕과 학대를 당하였음을 항변한다. 설사 잘못이 있더라도 자신과 하나님과 문제이며 친구들이 선악을 판단할 위치에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욥은 무조건 수긍하지 않는다. 침묵도 필요하나 당당하게 항변하는 모습도 잊지 않는다. 적절한 선택과 결단이 필요하다.
 
-친구들은 고난의 이유를 욥의 불의함에서 찾았으나 욥은 고난이 하나님에게서 왔음을 지적한다. 자신이 처한 궁지도 그물을 덮어씌우신 분도 하나님이시다고 주장한다. 가는 길을 막는 것도 영광을 거두어 가심도 하나님이시다고 토로한다. 답답한 마음과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대한 비난을 주저하지 않는다.
 
-욥의 이런 모습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이를 이해한다는 듯 초연한 척하는 모습에 도전을 준다. 하나님 앞에 죽을 듯이 답답한 마음을 토로하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하나님을 향하는 신앙의 걸음에 하나님께서도 함께하신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두들겨 패시니 희망이 없다고 토로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욥의 간구에 응답하지 않으시고 귀를 닫으셨다. 고난에 처하도록 하셨다. 욥의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불평이 충분히 가능한 형편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욥을 공격하신 것이 아니다. 다만 고난을 허용하셨을 뿐이다. 고난을 통해 정금 같은 믿음으로 연단하시고 더 좋은 것을 주기 원하셨을 뿐이다. 하나님의 선한 뜻을 굳게 믿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하나님에 대하여 잘못 이해할 수도 있음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13~29절에서 욥을 더욱 비참하게 만든 것은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 종들과 어린아이들까지 그를 멸시하고 떠나버린 것이다. 욥은 죽은 후에라도 인정받기를 소망하며, 대속자가 자기 무고를 변호하는 날에 하나님을 대면하여 볼 것이라 말한다.
 
-모두가 욥을 버렸다. 철저히 혼자다. 하나님에게도 버림받았다는 마음은 더욱 그를 고통스럽게 했을 것이다. 그의 고통과 외로움을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런 고통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이 예수님이시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철저하게 버림받은 한 의인의 고독과 고통을 가장 잘 보여준다.
 
-욥은 자신의 무죄함을 변호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고 자기 생이 다해가고 있음을 직감한다. 그래서 누군가 자기 말을 책이나 바위에 기록하여 죽은 이후에라도 그의 무죄가 밝혀지기를 소망한다. 이런 소망은 대속자에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졌다. 대속자가 자신을 위해 땅 위에 우뚝 서는 날에 그의 무죄가 밝혀질 것이며, 그는 하나님을 외인이 아닌 친숙한 분으로 다시 대면하며 보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욥이 고대하는 이 대속자가 우리에게 이미 오셨다. 진정한 대속자되신 예수님께서 신실하게 우리를 변호해 주신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기뻐하게 되었다.
 
 
*살면서 억울한 일 참 많이 겪는다. 난데없는 재난이나 사고에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도무지 막막하다. 이유를 안다고 해서 딱히 잘 견딜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등진다.
 
*모든 것을 잃은 욥, 거기에 친구들의 외면과 박해 속에서 이 모든 고통이 하나님에게서 왔으니, 하나님만이 자신을 구원해 주실 수 있음도 믿는다. 그래서 친구들의 정죄 법정에서 자신의 무죄함을 신원하여 줄 “구속자”가 되어 주시리라 믿었다. 혹시나 이 고통의 끝에 죽는다고 할지라도 자기를 영접해 주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으리라 믿은 것이다.
 
*믿고 의지했던 사람들이 외면하고 모든 관계가 파괴되었을 때, 그 고통은 형언할 수 없다. 그럼에도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나아가 할 말을 토로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뵐 수 있다는 확신은 어떤 고통과 환난 속에서도 끝까지 인내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주님, 욥의 심정이 얼마나 처절할지 안쓰럽습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만 붙드는 그의 모습을 기억하겠습니다. 하나님이 구원자 되어 주심을 믿기에 그 앞에 처연하게 앉아있는 그 모습처럼 저도 하나님을 매달리는 것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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