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악인의 번영이 잠시라고? 무슨 말이냐? [욥 21:1-16]
 – 2023년 11월 26일
– 2023년 11월 26일 –
본문은 세 친구와 욥 대화(3~31장)의 두 번째 사이클(15~21장) 중에 엘리바스와 욥의 대화(15~17장)와 빌닷과의 대화(18~19장)가 끝나고 소발의 발언(20장)에 대한 욥의 대답이다. 세 친구는 인과응보의 사상을 기초로 발언하고 욥은 그들의 주장과 달리 인과응보가 현실에서 제대로 적용되지 않고 있음을 밝히며 반박해 간다.
 
악인의 길에 대한 소발의 말에 대해 현실에서 목격되는 악인의 부귀와 영화로운 삶을 예로 들어 소발과 친구들의 인과응보 원리의 맹점을 뒤흔든다.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을 인과응보의 하나님으로 여기므로 욥의 환란은 그 죄악의 마땅한 결과로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이 땅에 사는 악인들은 친구들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심판이 아닌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들의 번영은 그 자신과 후손과 자산에도 미친다. 그러나 그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불경한 자들이며 자신들의 행복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일 뿐이다.
 
소발은 자신의 주장이 인류가 생긴 이래 변함없는 진리라고 말했으나 욥은 악인이 잠깐이 아니라 아주 오랫동안 대대로 잘 먹고 잘사는 엄연한 현실이 존재한다는 것으로 반박한다. “신앙의 렌즈로 현실을 왜곡하지 말라”는 반성적 지혜의 가르침이 본 장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1. 친구들에게 : 내 말을 잘 들으라(1~6절).
욥과 친구들은 서로가 자기 말을 들어달라고 요청하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욥은 이번 장에서 더욱더 힘을 주어 자기 말을 들어달라고 한다. 특히 자신의 처지를 주의 깊게 들어주는 것이 자신을 향한 위로라는 점을 밝히며 진정한 긍휼과 이해를 구한다.
 
엘리바스와 친구들은 욥을 향한 자기들의 말이 “하나님의 위로”와 “부드럽게 타이르는 참 말씀”으로 여겼지만, 욥에게 친구들의 말은 “조롱”이었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16:2)이었다. 또 욥은 자신의 한탄과 원망은 친구들이나 사람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것임을 친구들이 인식해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런 궁지에 몰아넣은 것이므로 마음이 조급해져서 거듭거듭 자기 입장을 되풀이하는 것을 이해해 주기를 바랐다(4절). 욥은 자신의 상황을 친구들이 조금만 주의 깊게 보고 공감한다면 그들도 놀라 손으로 입을 가릴 정도일 것이라고 말한다(5절). 그저 바라만 봐주기를 원한 것이다.
 
“너희가 나를 보면(5절)”으로 번역된 구절을 직역하면 “너희는 나에게 몸을 돌려라(혹은 향해라)”이다. 욥이 처한 상황과는 관계없는 규범적 지혜의 일반론만 이야기하지 말고 친구인 욥이 어떠한 상태인지 어떤 말을 하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친구들의 몸을 자신을 향해 돌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렇게 몸을 돌려서 입을 다물고 자기 말에 진정으로 귀를 기울여 달라고 요청한다.
 
5절과 6절은 “놀라리라”, “입을 손으로 가리리라”, “불안하다.”, “두려움이 내 몸을 잡는다”와 같은 표현으로 놀람과 두려움을 연속적으로 표현한다. 좁게는 욥이 처한 고통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토로하는 말이지만, 넓은 의미로는 7~13절에서 예로 드는 규범적 지혜의 인과응보의 원리가 무너진 현실에 대한 놀람과 공포를 지칭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굳게 믿고 의지한 인과응보의 원리가 자신을 폭행하고 무너뜨린 것을 친구들도 알았다면 경악할 것이라는 뜻도 될 수 있겠다.
 
 
 
2. 일반화의 오류를 들어보라(7~16절)
7절이 본문의 핵심 구절이다. “어찌하여 악인들이 살아서 장수하며 그 세력이 점점 강해지는가?” (새번역)이 문장에는 세 가지의 질문을 내포하고 있다. 먼저, 첫 번째로 인과응보의 원리로 움직이는 세상이라면 악인은 다 죽고 없어져 눈앞에서 사라져야 하는데, 지금도 저렇게 많이 살아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두 번째는 악인들이 잠시 강성할 수 있고 그들은 제 수명을 다 살지 못하고 죽는다고 했지만 그렇다면 왜 그들은 가까스로 생존하는 정도가 아니라 천수를 누리며 장수하는가? 세 번째, 악인들이 그냥 오래 사는 정도가 아니라 힘이 세고 날이 갈수록 점점 더 힘이 강해지는가? 인과응보의 원리에 따르면 그들은 후손이 없거나(18:19), 있어도 가난한 자에게까지 구걸하며 빌어먹는 비참한 신세로 살아감이 마땅한데(20:10),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악인들 옆에는 후손들이 튼튼히 버티고 있고 그들은 장수하며 자손들을 직접 눈으로 본다(8절).
 
하나님의 진노 막대기가 악인들에게 임하는 것이 당연한 원리인데, 그들의 처소는 아무 걱정 없이 평안하다. 왜 그들은 소발의 말대로 그의 처소가 불타지 않는가? (20:26)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매(9:34)가 오히려 저들에게 임하지 않는 것인가? 자신에게 임한 끔찍한 재앙과 달리 악인들의 소유물과 자손들은 복을 누린다. 그들의 수소는 씨를 퍼뜨리는데 실패가 없고 암소들은 새끼를 낳는데 실패가 없다(10절). 또 악인들의 후손은 춤추며 뛰놀며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며 행복해한다(12절).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끝까지 살고 고통 없이 죽음을 맞이한다(13절). 악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14절). 인간이 마땅히 섬겨야 할 전능자가 과연 있기나 하느냐고 묻고 그분을 만나는(기도한들) 일이 대체 자신들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냐고 묻는다(15절).
 
15절에서 “무슨 소용이 있으랴”로 번역된 단어는 “이익, 유익”이라는 의미이다. 다른 번역은 “무슨 유익이 있기에 그에게 기도하겠는가?” (새번역)이라고 했다. 신앙의 효용성을 묻는 말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어떤 이익을 줄 수 있느냐? 라는 질문이다. 이는 “까닭 없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신앙이 가능한가?”라고 의문을 표시한 사탄의 질문과 연결된다. 욥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 앞에 의인이자 지혜자로 살아가는 이유는 그만한 대가를 하나님으로부터 지불받았기 때문이다. 좋은 것을 얻기 위한 투자로서 “유익”이 있으므로 신앙이 유지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대가를 빼앗기면 욥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버릴 것이라고 본 것이다. 욥은 이런 생각은 악인들이 하는 짓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친구들이 주장하는 선과 악의 구분이 분명하고 의인과 지혜자에게는 복이 임하고 악인과 무지자에게는 벌이 임하는 선명한 이분법은 “유익”을 추구하게 하고 “종교 장사”하는 것에는 훨씬 유리하다는 것을 되짚는다. 하나님을 믿으면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에 풍성한 열매가 맺히고 외양간이 소 떼와 양 떼로 넘쳐난다고 가르쳐야 장사가 된다. 하박국과 욥의 신앙은 무익하기 짝이 없다. 욥은 현실은 친구들이 말하는 인과응보의 원리에 따라서만 움직이지 않는 것을 말하고 있다. 자자손손 이어지는 악인들의 행복과 번영은 그들의 손으로 직접 일군 것이 아니다(그들의 손안에 있지 아니하니_16절). “뿌린 대로 거둔 것이아니다”라는 것이다.
 
 
 
나는?
-진정한 위로는 진심으로 들어주는 귀와 마음에서 시작된다. 욥의 친구들은 자신들의 말을 하나님의 위로와 부드럽게 타이르는 말로 여겼으나 받아들이는 욥의 마음에는 조롱이었다. 진정한 위로는 나의 판단이나 경험을 배제하고 오로지 사람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말이 없어도 따뜻한 미소를 지어주고 손 한 번 잡아주는 것이 진정한 위로가 되기도 하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악인들의 영화는 잠깐이며 그 후에 심판이 기다린다는 것을 부정할 자는 없다. 그러나 현실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해준다. 악인은 시간이 흐를수록 쇠하는 것이 아니라 더 강해지고 더 큰 성공을 거두다가 자손들에게까지 그 부를 물려주어 자손들도 번성하는 일이 드물지 않다. 반대로 번성함과 풍요로움이 늘 하나님께 신실한 사람이 되게 하지도 않는다.
 
-부귀영화가 늘 하나님의 축복 열매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악이 개입되지 않기가 어렵고 부한 자들은 그 부가 주는 안정과 편안함만을 원할 뿐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기 삶에 개입하시는 것도 인정하지도 원하지도 않는다. 부가 더욱 겸허하게 만들기보다 교만하게 만들기 쉽다. 이렇게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 부라면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일까?
 
 
*1~6절에서 욥은 친구들에게 자기 말을 좀 들어 달라고 부탁한다. 조롱하더라도 다 듣고 나서 하라고 부탁한다. 친구들은 욥이 당하는 현실적인 고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전통적인 인과법칙을 주장하기 바쁘다. 욥을 악인으로 단정한다. 욥의 친구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비난과 정죄를 일삼는다. 욥의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계속 드는 마음은 혹시 나도 고난 겪는 자들의 마음을 알아주고 신음소리를 들어주기보다 내 원칙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며 정죄하지는 않을까? 찬찬히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욥은 친구들이 자기에게 많은 말을 하는 것보다는 자기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차라리 더 위로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고통에 몸서리치는 자신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한다. 고난 겪는 자들에게는 논리 정연한 우리의 말보다 침묵으로 함께 있어 주는 것이 더 위로가 됨을 기억해야 한다.
 
 
*7~16절을 통해 욥이 토로하는 악인들의 모습을 통해 친구들이 주장하는 의가 보상받고 악이 벌을 받는다는 원리에 따라 욥이 지금 고난 겪고 있으므로 죄를 지은 것이 틀림없다는 주장을 반박한다. 욥은 자기 경험과 악인의 번영을 예로 들면서 친구들의 일방적인 가르침을 맞서는 것이다. 엘리바스는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집안이 평화를 누릴 것이라고 했는데, 욥은 오히려 의인이 누려야 할 평화를 악인이 누리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현실에서도 충분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도 없고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이들이 더 힘 있고 부유한 모습으로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
 
현실 속에서 악인이 더 오래 살고, 더 잘 살고, 더 힘이 있고, 더 부유하고, 더 재미있게 살고, 자식들도 잘되고, 죽을 때도 편안히 죽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악인의 번영이 잠시뿐이라는 소발의 말과 이에 동의하는 친구들의 인과응보의 논리를 반박한다. 이 세상에서 악인이 성공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현실을 볼 때 어떤 생각이 드는가? 하나님께서 불공평하시다고 생각되어 참을 수가 없는가? (4절). 내 지혜로 이해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살아갈 지혜와 힘을 얻는 것이 더욱 올바른 믿음이 아닐까?
 
 
*특히 9절과 16절의 말씀을 통해 욥은 하나님이 경건한 삶을 산 자신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주시면서 하나님을 무시하는 악인들에겐 매를 대지 않으신다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다르다 우리는 하나님을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선에서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제 뜻대로 이 세상을 이끌어 가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섭리의 과정은 인간의 관찰로 충분히 파악될 수 없다. 하나님은 인간이 인식하는 질서 위에 계시며 그 질서에 매이지 않으시기에 우리의 이해나 환경을 하나님의 선하심을 가늠하는 척도로 사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욥이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악인에게 전혀 매를 대시지 않은 것처럼 느끼는 것은(9절) 오늘 우리의 느낌과 다를 바 없다. 하나님께서 악인들과는 차원이 다른 경건한 삶을 사는 욥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주시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무시하는 악인들에게는 많은 복을 허락하시는 것만 같다고 말한다(16절). 욥의 고민은 이런 하나님의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도 이 땅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물의와 악행을 보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하고 고민해 본 적이 있지 않는가?
 
우리 지혜로 하나님의 섭리를 다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여쭤볼 특권이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알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통치 하심을 의심하기보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보는 것이 어떤가!
 
 
 
*주님, 악인의 번영을 보며 울분이 일어나지만, 나의 지혜의 한계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의 신비한 이끄심을 믿기에 나의 지혜에 스스로 발목 잡히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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